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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고려 멸망 후, 고려 왕족들의 비참한 삶

by 사탐과탐 2022.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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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가 멸망하고 나서 남겨진 왕족들의 비참한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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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성(賜姓)정책 이라고 아시나요?

 

사성이란, 성(姓)을 내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요.

크게 공을 세운 장수나 신하들에게 군주가 성씨를 내렸던 것입니다.

성 중에서도 특히 국성(國姓)을 하사하는 제도였죠.

 

우리 한반도에서도 많은 나라에서 이 사성정책을 사용한 국가가 많았습니다.

그중 고려는 태조 왕건이 나라를 세우면서 사성을 많이 하다보니 엄청나게 많은 왕씨가 생겨났죠.

그리고 이 왕씨를 하사받은 사람들도 자손을 번성시키면서 고려시대때는 인구수가 최고로 많은 성씨가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나 많았던 왕씨들은 조선이 건국된 이후 어느 순간 대부분 사라지게 되었고 지금은 한국에서도 인구수가 소수인 성씨로 전락해 버렸죠.

사실 고려의 왕족이던 왕씨들이 사라진 이유에 대해서는 정사인 조선왕조 실록에는 기록된 부분이 거의 없을 정도이고 간접적으로 애매하게 언급만 되어있어서 주로 구전이나 야사를 통해 전해져 왔습니다.

 

도대체 그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통해 고려의 권력을 장악하고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아들이라는 소문을 이용해 폐위시켜 버렸죠.

그리고 나서 별다른 능력도 없어 보이던 왕요를 왕위에 앉힌 뒤에 조금만 협박하면 쉽게 왕위를 선양해 줄 것이라 믿고 그를 왕으로 옹립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가 바로 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이었죠.

그런데 여기까진 좋았지만 왕위에 오른 공양왕은 이성계의 의도와는 다르게 선양은 커녕 고려 왕조의 명맥을 유지시키기 위한 움직임을 보였던 것입니다.

 

그를 적극적으로 도운 신하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정몽주' 였죠.

그러던 중 1392년 3월, 이성계가 황주에 갔다가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해 정신을 잃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를 두 번 다시없을 기회라 여긴 정몽주는 공양왕에게 말해 이성계의 최측근이던 정도전, 조준, 남은 등을 모두 탄핵하고 유배를 보내버렸고 심지어는 그들을 제거하려고 했죠.

 

또한 정몽주는 빠르게 이성계까지 제거를 하려고 했으나 공양왕이 이성계 처결에 대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이방원은 조영규, 조영무 등을 데리고 가 선죽교에서 정적이던 정몽주를 살해했습니다.

이는 곧 고려의 멸망으로 이어지는 시발점이 되었죠.

마침내 공양왕이 폐위되고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면서 조선이 건국되게 되었죠.

 

하지만 이성계의 즉위는 정당성이 부족했습니다.

자신이 세운, 완벽한 왕인 공양왕이 직접 선위를 해주었다면 이성계가 왕이 되는데에 전혀 문제될게 없었지만 공양왕의 선위도 아닌 왕대비 안씨가 내린 교지로 왕이 되었으며 무력으로 왕을 끌어내린 반정도 아니었기 때문에 정당성에 애매한 문제가 있었고 사람들이 '이성계가 왜 왕이 됐지?' 라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는 노릇이었죠.

 

이렇게 이성계의 즉위에 명분이 부족하게 되었고 이는 고려 왕족들이 모반을 일으킬 수 있는 명분을 주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그러한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조선이 건국된 후 왕씨들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하지는 않았고 모반을 꾸미는 일을 했다는 증거 역시 없었지만 조선을 세운 세력들에게는 왕씨를 경계할 필요가 생긴 것이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렇게 조선을 유지하는데에 있어서 방해물이 돼버린 왕씨들을 모조리 숙청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주청을 이성계가 다 묵살 해왔지만 어떤 사건을 계기로 왕씨들이 몰살 당하게 되는데요.

피의 숙청에 대한 불길은 박위(朴葳)라는 사람에게서 시작되었죠.

 

조선이 건국되고 3년 후인 어느 날, 박위는 김가행과 박중질이라는 사람을 시켜 점쟁이를 찾아가 공양왕을 비롯한 고려의 왕족인 왕씨의 운을 물어보고 이성계와 비교해 운이 누가 더 나은지 하는 등의 점을 보라고 시켰던 것인데요.

하지만 그러한 점을 본 것이 발각되고 말았는데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이들의 행위를 역모로 간주했고 고려 왕족들을 강화도와 거제도로 강제 이주 시켰습니다.

 

그런데 몇몇 왕씨들이 모반을 꾀한다는 제보가 정도전이나 이방원 등을 통해 계속 들어오자 신하들은 왕씨들을 제거해야 한다며 이성계에게 지속적으로 주청했고 결국 이성계도 그들을 제거하기로 결심했죠.

그렇게 태조 3년인 1394년 4월 15일, 윤방경 등은 강화도에 있던 학성부원군 왕향 등 16명을 강화 나루에서 물에 빠트려 죽여 버렸죠.

 

그로부터 2일 뒤인 4월 17일엔 공양왕과 폐세자 왕석이 삼척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또한 공양왕의 다른 아들들도 이때 살해 당했죠.

그리고 20일에는 거제도에서 수연군 왕규 등 왕씨일족 110여 명을 바다에 던져 버린 참극이 벌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왕씨의 남은 자손들을 대대적으로 색출하기 시작하여 많은 왕씨들이 죽임을 당했죠.

또 다른 야사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는데요.

이성계가 왕씨들에게 강화도에서 살게 해주겠다는 말을 하고 왕씨들을 모아 배에 태운 뒤에

배 밑바닥에 구멍을 내 강화도 앞바다에 배와 함께 모조리 가라앉혀버렸다는 이야기이죠.

 

그 외에 남아있던 왕씨들은 외가의 성을 따르게 해 성을 고치게 했고 사성정책으로 개성 왕씨가 된 사람들은 원래 성씨로 되돌리면 위해를 가하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살아남은 왕씨 일족들은 왕(王)이라는 한자를 변형시켜 옥(玉), 신(申), 전(田), 전(全), 김(金), 마(馬)씨 등으로 성을 바꿔 왕씨가 아닌척 하면서 숨어 살았다고 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성을 바꾼 이야기는 사실 옥씨만 검증이 되었을뿐 나머지 성들은 왕(王)자에서 바꿨다는 근거가 부족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순흥군 왕승, 정양군 왕우 일가와 여인들 그리고 방계를 제외하고 고려 왕위 서열이 높은 남자 후손 150여 명은 조선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삼척, 강화도, 거제도에서 제거되었죠.

 

그런데 어쨌든 이 모든 이야기는 야사에 기록된 내용인데요.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에는 이성계가 왕씨들을 죽이는데 반대했지만 신하들이 이성계 몰래 왕씨들을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숨어사는 왕씨를 밀고하는 사람들이 나올 정도였던 것으로 볼 때 왕씨를 찾아내고 죽였던 것은 매우 큰 규모로 철저하게 진행 되어진것으로 보이죠.

 

이성계가 반대를 했든 찬성을 했든 엄청나게 많은 수의 왕씨들이 죽임을 당하자 이성계와 새 나라인 조선에 대해 민심이 굉장히 흉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나 개성에 살던 귀족들은 왕씨와 연관이 안된 사람이 없을 정도였는데 이들이 그동안 누리던 기득권을 모조리 빼앗기고 신분도 중인으로 내려간데다가 친척들이던 사람들까지 몰살 당했기 때문에 개성 지역 사람들의 조선과 이성계에 대한 비판은 나날이 거세졌죠.

 

이러한 개성의 최악의 민심 때문에 조선 건국 초기에는 개성이 수도였지만 결국 한양으로 수도를 옮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천도를 하고 나서도 개성지역의 반발은 오래 지속되었고 돼지고기를 '성계육'이라 부르며 씹어 먹는 것을 표현할 정도였으며 개성의 향토음식인 조랭이떡은 '이성계의 목을 조르는 모습이다' 하여 생긴 것이라는 전설도 있을 정도로 이성계를 미워했는데요.

 

먼 훗날 조선을 찾아온 서양인들의 기록에도 개성 사람들은 조선 왕조를 싫어했다고 적혀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조선이 건국된 직전에는 엄청 많았던 개성 왕씨가 학살로 인해 순식간에 몰락하면서 소수밖에 남지 않은 성씨가 되어버렸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 이후로도 정치를 해 높은 위치에 오르지 못하고 그대로 도태되어 갔습니다.

왕씨에 대한 대대적인 제거 작업이 있은 후로 조선 왕조는 빠르게 자리 잡기 시작했고 이후 태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왕씨 제거는 중단되었죠.

형제들끼리 죽고 죽인 사건인 왕자의 난을 태종이 일으키는 것을 본 개성왕씨들은 '이는 곧 하늘이 내린 천벌이자 전주이씨들의 업보다' 라고 여긴다고 합니다.

 

그리고 1413년이 되었을 때 태종은 왕씨들을 숙청하던걸 그만하겠다는 선언을 하기도 했죠.

하지만 왕씨들은 계속 숨어지냈는데요.

문종 때에 한 가지 사건이 벌어지게 되죠.

 

그 일은 성을 바꾸고 숨어살던 왕씨인 왕우지가 이웃집 사람과 싸우게 되었는데 이에 열받은 이웃집 사람들은 왕우지가 원래 고려 왕족이던 왕씨라는 것을 관아에 고발하는 사건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조선 조정은 이미 왕씨를 죽이지 않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그를 죽이지 않고 오히려 벼슬을 내려줬으며 몰래 바꾸고 살았던 이름을 왕씨 가문을 이어나갈 수 있게 다시 왕순례로 바꿔 주었고 상당한 특별 대우를 받았다고 하죠.

 

하지만 어쨌든 이 대대적인 숙청 작업으로 인해 고려 왕족 성씨인 왕씨는 신라나 가야 왕족의 성씨인 경주김씨나 김해김씨 등과 같이 번영을 누리는 성씨가 되지 못하고 현재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소수 성씨가 되어 있습니다.

막 생긴 조선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 같기도 하지만 그 많던 왕씨가 소수 성씨가 될 정도인걸 보면 지독한 탄압을 받은 것 같기도 하네요.

 

고려가 멸망하자 엄청 많은 수의 왕족들이 몰살당한 것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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