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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에 대한 오해와 진실. 실제로는 수공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몰살 시켜버렸음

by 사탐과탐 2022.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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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은 모두가 알고 있는 엄청난 대승이었죠.
하지만 실제로는 수나라의 대군을 수공으로 물리친 것은 아니고 다른 방법으로 몰살 시켰다고 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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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초 수나라는 주변 여러 나라들로부터 조공을 받는 동아시아 최강대국이었죠.

하지만 그들에게 조공을 보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역으로 수나라를 공격하기까지 하는 나라가 있었는데요.

바로 우리 고구려의 조상님들이었습니다.

 

이런 패기 넘치는 행동은 수나라의 2대 황제인 수양제 때까지 이어졌고 이에 화가 많이 난 수양제는 무려 100만 명이라는 세계 전쟁사에 유례가 없는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해 고구려를 침략했죠.

이때 수나라를 박살 내버리면서 멸망의 위기에 처해있던 고구려를 구한 전쟁영웅이 있었으니 바로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을지문덕입니다.

 

을지문덕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살수대첩이죠.

그런데 우리가 여태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르게 실제 살수대첩에서는 물을 이용해서 적을 공격한 기록이 전혀 없다고 하는데요.

그렇다면 과연 을지문덕은 어떤 방법으로 그 많은 대군을 물리쳤던 것인지 지금부터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을지문덕은 그 엄청난 활약상에도 불구하고 그의 출생과 전쟁 이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고 하는데요.

때문에 그가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 알 길이 없다고 하죠.

한마디로 어느 날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나 나라를 구하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다시 자취를 감춘 것인데요.

 

아마도 을지문덕이 전쟁 당시 높은 벼슬에 올라있기는 했지만 그 가문이 정말 세력이 약했거나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곳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기록이 남아있지 않는 것이라 짐작된다고 하죠.

그렇다면 별다른 배경도 없었던 그가 어떻게 그 정도의 지위에 올랐던 것일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당시 고구려 왕들이 추진했던 신진세력 등용 정책 덕분이었다는 추측이 있습니다.

그 정책으로 등용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평강공주의 남편인 온달이죠.

 

612년 수 양제가 113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정벌을 시작합니다.

그야말로 수나라의 국력을 탈탈 털어 모든 인력과 자원을 총동원한 전쟁이었는데요.

이때 수나라의 군대는 7세기까지 세계 역사상 동원되었던 모든 병력 중 가장 큰 규모였을 것으로 짐작된다고 하죠.

 

음력 3월 15일 수나라 군대는 요하에 도착했습니다.

수나라 침공군의 전 병력이 출발지에서 모두 떠나는 데만 40일이 걸릴 정도로 역사상 유례없는 초거대 규모의 군대였음을 생각하면 대단히 진군 속도가 빨랐던 셈인데요.

하지만 요하에서 그들과 맞서 싸우는 고구려군의 저항은 강력했고 그렇게 수나라 군대가 요하를 건너는 데만 2개월이 걸렸다고 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고생 끝에 겨우 요하를 건너 요동성 공격을 시작했지만 또다시 1개월이 넘도록 요동성을 함락하기는커녕 큰 손실만 입게 되는데요.

하지만 병력과 물자를 잃은 것보다 더 큰 문제는 그들에게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수양제가 끌고 온 병력의 수가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에 그들이 먹을 식량을 구하기가 매우 힘들었기 때문인데요.

 

때문에 곧 겨울이 다가오면 여태까지 힘들게 함락한 성들을 모두 포기하고 다시 그들의 땅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이에 수양제는 이 상황을 해결할 비장의 승부수를 던졌습니다.

100만대군중 30만 명의 정예병력을 따로 뽑아 별동대를 조직해서 우중문과 우문술의 지휘 아래 평양성으로 보낸 것인데요.

 

그들의 부대를 황해를 건너고 있던 또 다른 수나라 부대와 합류시켜 한 방에 평양성을 무너뜨리겠다는 작전이었죠.

하지만 이 작전에는 치명적인 걸림돌이 있었으니 바로 병사들의 보급 문제였습니다.

당시 수나라군은 30만 명의 별동대에게 100일분의 식량과 군복, 무기, 야전텐트 등을 들고 가게 했는데요.

 

그러다보니 병사 1명당 군장의 무게가 무려 50kg이나 돼버렸죠.

이 무식한 짐들을 도저히 들고 갈 자신이 없었던 수나라 병사들은 보급품을 땅속에 묻거나 길가에 버렸다고 하는데요.

결국 별동대는 머지않아 심각한 물자 부족에 시달리게 됩니다.

 

수나라군이 압록강 근처까지 다가오자 을지문덕은 항복을 핑계로 혼자서 적군의 본진을 찾아갔는데요.

그리고는 수나라와 항복 협상을 하는척했지만 그의 진짜 목적은 수나라군의 상태가 어떤지 조사해 보는 것이었죠.

별동대가 피로와 굶주림에 지쳐 있다는 것을 확인한 을지문덕은 작전을 실행하는데 문제가 없겠다고 판단을 내렸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때 우중문과 우문술이 혼자 적진을 찾아온 을지문덕을 사로잡으려는 마음을 먹기도 했지만 참군으로 따라왔던 유사룡이 사신을 사로잡아서는 안된다고 말린 끝에 생각을 바꾸게 되죠.

그렇게 을지문덕이 돌아간 후 우문술은 군량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퇴각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하지만 우중문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요.

게다가 수양제가 이미 우중문을 최고 지휘관으로 임명해둔 상태였기 때문에 수나라군은 계속해서 평양을 향해 진격하게 됩니다.

이후 을지문덕은 안 그래도 피곤한 상태였던 수나라군을 더욱 힘들게 만들기 위해서 끊임없이 그들에게 싸움을 걸었는데요.

 

수나라 군대가 자신들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거짓으로 패배하는 척하면서 점점 상대를 깊숙한 곳으로 끌어들였죠.

어떤 날은 우문술의 군대를 상대로 하루에 7번을 싸우다 도망가기를 반복했다고 합니다.

결국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대를 평양성 앞 30리까지 끌고 오는 데 성공했는데요.

간신히 평양성까지 오긴 했지만 지칠 대로 지친 수나라군이 견고한 평양성을 함락시키기는 너무나도 힘들어 보였죠.

 

게다가 바다를 통해 상륙해서 그들과 합류하기로 했던 내호아는 고건무(영류왕)에게 철저하게 박살났기 때문에 외부의 지원을 받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을지문덕은 청야전술(주변에 적이 사용할 만한 모든 군수물자와 식량 등을 없애 적군을 지치게 만드는 전술)을 써서 수나라군이 고구려 현지에서 식량을 구할 수 없게 만들었는데요.

 

덕분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우중문에게 을지문덕이 역사에 남을 시 한 수를 보내 그를 조롱합니다.

바로 그 유명한 여수장우중문시인데요.

 

"그대의 신기한 책략은 하늘에 달했고 묘한 전술은 지리를 통달했구나. 싸울 때마다 이겨 높은 공을 세웠으니 이제 그만 만족하고 돌아감이 어떠한가."

언뜻 보면 띄워주는 내용 같지만 마지막 줄에 공이 이미 하늘에 닿았으니 돌아가라는 말은

사실은 너희들이 이미 식량이 떨어진 상태란걸 다 알고 있다 너희들이 돌아가는 것 말고는

딱히 선택할 방법이 없다는걸 알고 있다며 그를 조롱했던 것인데요.

 

자신을 조롱하는 시를 보고 화가 나긴 했지만 이제는 우중문도 식량이 다 바닥났기 때문에 전투 자체를 할 수가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화를 꾹 참고 철수를 명령했죠.

하지만 을지문덕은 그들을 곱게 보내줄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여태까지 거짓 후퇴만 반복하며 참아야만 했던 분풀이를 하듯이 성문을 활짝 열고 나와서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네 방향에서 수나라 군대를 둘러싸고 그들을 두들겨 패기를 반복했기 때문에 수나라군은 방어진을 편채 그들의 공격을 받아내야만 했죠.

계속되는 고구려군의 공격 속에 극도로 지친 수나라군 별동대는 지금의 청천강 일대인 살수에 간신히 도착하게 되는데요.

 

그리고 역사적인 살수대첩이 벌어지게 되죠 그런데 우리가 여태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르게

역사서에는 물을 써서 수나라 군대를 공격했다는 기록이 없다고 합니다.

완전무장한 30만 병력을 한방에 쓸어버리는 인위적인 수공은 현대의 기술력으로도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죠.

 

삼국사기나 수서, 당서 등의 역사서 어디에도 살수대첩에 수공이 사용된 기록은 없다고 합니다.

고구려군이 수나라군을 물리친 과정은 다음과 같았는데요.

수나라군 총병력의 절반쯤이 강을 건너는 순간 고구려군은 전 병력을 집중시켜 최후의 총공격을 개시했습니다.

 

강을 건너는 순간이 그 부대의 방어력이 제일 약해지는 순간이기 때문이었는데요.

가장 먼저 타겟이 된 것은 후방에 있던 부대였습니다.

거센 파도와도 같은 고구려군의 공격에 지휘관인 신세웅마저 전사할 정도로 철저히 박살이 났죠.

그리고 후방부대가 말 그대로 박살이 나는 것을 보자 수나라의 30만 대군 전체가 극도의 혼란 상태가 되었는데요.

 

그때부터 수나라 군사들은 오로지 살기 위해 도망가기 시작하면서 부대의 진형 자체가 무너져버렸죠.

을지문덕의 고구려군은 그렇게 대열이 무너진 채로 도망가는 수나라군을 끝까지 추격해서 전멸시켰다고 하는데요.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이때 30만 명의 수나라 병사 중 살아남은 사람들의 수가 겨우 2700명이었다고 합니다.

 

백만 대군을 이끌고 위풍당당하게 북경을 출발했던 수양제로서는 이런 비참한 결과가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겠죠.

남은 수나라군 총병력은 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치열했던 2차 고구려-수 전쟁이 끝났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돌아가는 길에 수 양제는 분노를 참지 못하며 우중문과 우문술을 쇠사슬로 포박해서 장안까지 끌고 갔는데요.

장안에 도착하자마자 이들을 서인으로 강등시켜 감옥에 가둬버렸죠.

특히 유사룡은 을지문덕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망쳤다는 이유로 패전의 제일 큰 원흉으로 지목되어 참수당하게 됩니다.

 

7세기 세계 최대 규모의 전쟁이 벌어진 결과는 이렇게 모두의 예상과는 다른 결과로 끝나게 되었죠.

그 한가운데에 바로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 있었습니다.

을지문덕은 수나라라는 당대 동아시아 최강대국의 압도적인 병력을 상대로 단순히 그들을 물러나게 만든 정도가 아니라 아예 회전을 벌여서 무려 30만이라는 병력을 싸그리 전멸시키며 고구려의 대승을 이끌어냈는데요.

 

그야말로 역사에 길이 빛날 엄청난 업적을 세웠다고 할 수 있죠.

지금까지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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