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와 빙애의 자식으로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전군은 자신이 원하지도 않던 역모사건에 휘말려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요.
조선에서 가장 불쌍한 삶을 살았던 왕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조선의 역사 속에서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왕자들을 뽑아본다면 단종이나 소현세자 등 여러 인물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불쌍한 삶을 살았다고 할만한 사람이 한 명 있는데요.
이 왕자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했고 억울한 누명을 쓴 채 비참하게 죽어야만 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죠.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정조의 배다른 동생이었던 왕자 은전군입니다.
은전군은 영조 35년인 1759년 사도세자와 경빈박씨 빙애의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 따르면 은전군의 어머니인 빙애는 숙종의 세 번째 왕비인 인원왕후의 침방 궁녀였다고 하는데요.
원래 왕실 어른에게 소속된 사람을 건드리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지만 빙애의 미모에 빠진 사도세자는 결국 그녀를 취하게 되는데요.
1757년 9월에는 그녀를 자신의 후궁으로 삼아버리기까지 하죠.
게다가 이 일은 인원왕후의 상중에 일어났기 때문에 영조는 사도세자를 심하게 꾸짖고 빙애를 데려오라고 명합니다.
불과 몇 년 전 영조 자신도 며느리인 현빈조씨의 상을 치르면서 현빈조씨의 궁녀였던 숙의문씨를 자신의 후궁으로 삼았던 일이 있었는데 말이죠.
어쨌든 영조의 명을 받은 사도세자는 빙애가 잘못될까 두려웠는지 그녀를 화완옹주의 집에 숨겨두고 다른 궁녀를 '가짜 빙애'로 만들어 영조 앞에 세웠는데요.
영조가 이 사실을 알고 빙애를 쫓아내려 하자 사도세자는 양정합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 소동까지 벌인 끝에 겨우 허락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은전군이 불과 세 살밖에 되지 않았던 1761년에 갑작스러운 비극이 찾아오게 되는데요.
어린 시절부터 오랫동안 영조에게 학대를 받았던 사도세자는 혼자서는 제대로 옷을 입지 못하는 증세가 있었습니다.
옷을 입으면 영조에게 가서 질책을 들어야 하니 아예 옷 입는 일 자체를 두려워하게 된 것인데요.
때문에 사도세자에게 옷을 입히려다가 발작 증세를 일으키는 그의 손에 살해당한 궁인이 한둘이 아니었다고 하죠.
그래서 사도세자의 옷시중은 주로 정실인 혜경궁 홍씨가 맡았는데 혜경궁 홍씨마저도 사도세자가 던진 벼루에 맞아 큰일 날 뻔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결국 1761년 1월에 가장 총애 받던 빙애가 사도세자의 옷시중을 들던 중 또다시 발작을 일으키면서 미쳐버린 사도세자에게 맞아 죽어버리게 되죠.
심지어 사도세자는 빙애가 낳은 자신의 아들 은전군을 연못으로 던져버리기까지 했다는데요.
당시에 겨우 돌이 지난 아기였던 은전군은 그렇게 아버지의 손에 죽을뻔했지만 다행히 이 사실을 듣고 달려온 정순왕후 김씨가 그를 구해내서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은전군에게는 하엽생(연잎에서 살아나다)이라는 별명이 생겼다고 하죠.
비천한 궁녀 출신의 며느리 빙애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영조도 그녀의 성품만큼은 높게 샀다고 하는데요.
사도세자가 그녀를 살해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빙애가 그리도 좋다며 우물에 뛰어들어서 자살 소동까지 벌이더니 이제 와서 그녀를 죽였단 말이냐? 그 사람이 아주 강직한 성품이었으니 보나 마나 네 잘못된 행실을 말리려다가 너에게 죽은 것이겠구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고작 세 살의 나이에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구타당해 죽었다는 것은 너무나도 끔찍한 기억이겠죠.
게다가 1년 뒤에는 그 아버지마저 자신의 할아버지에게 죽게 되는데요.
극도로 정신병이 심각해진 사도세자는 수많은 궁녀들을 잡아다가 때리고 성폭행했으며 많은 내시와 나인들을 살해하게 됩니다.
결국 1762년 분노한 영조의 명에 따라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이하게 되죠.
당시 혜경궁의 맏아들이자 세손인 정조마저 위태로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부모를 모두 잃은 은전군을 맡아줄 사람이 없었다고 하는데요.
그렇게 그는 궁궐 안에서 상궁들의 손에 맡겨져 자랐다고 합니다.
사도세자와 정조를 견제하던 노론 벽파의 세력들은 은전군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손에 어머니를 잃었기 때문에 그가 아버지에게 적개심을 품었을 것이라 생각했죠.
그래서 사도세자의 자녀들 중에서도 유독 은전군에게 관심을 가졌고 그를 왕위 계승자로 추대하려는 사람도 있었다고 하는데요.
은전군을 추대하려던 이들 중에는 정순왕후의 오라비 김귀주와 홍계희 일족 그리고 정조의 친모인 혜경궁 홍씨의 친정 일족들도 끼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노론 세력이 왕으로 추대할 수 있는 중요한 후보로 떠올랐기 때문에 정조에게 자신의 배다른 동생인 은전군은 노론 벽파를 뒷배로 두고 왕권을 위협하는 정적이 된 셈인데요.
1776년에 영조가 사망한 후 마침내 정조가 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자신의 즉위를 방해했던 정후겸과 홍인한 등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실시했는데요.
이들 무리와 같이 사사건건 정조를 비방했던 홍상간도 ‘왕권에 도전했다’는 혐의로 잡혀와 국문을 받다가 죽게 됩니다.
홍상간의 아버지 홍지해도 아들 사건에 연관되어 국문을 받고 귀양을 가게 되죠.
그야말로 정조의 반대편에 섰던 남양 홍씨 일가는 풍비박산이 나버린 것인데요.
이에 홍계희의 후손들은 정조를 제거할 계획을 꾸몄고 이 일에 홍지해의 아들 홍상범이 앞장섰습니다.
먼저 그는 천민 출신 장사꾼인 전흥문을 포섭했고 전흥문은 궁성호위군관인 강용휘를 끌어들인후 20여 명의 무사들을 은밀히 모았죠.
1777년 7월 28일 홍상범은 암살단을 궁궐에 잠입시켜 정조를 살해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는데요.
이들은 궁에서 일하는 강용휘의 조카의 안내를 받으며 정조가 머물고 있는 경희궁 존현각까지 별문제 없이 도착하게 되죠.
강용휘와 전흥문은 존현각 지붕으로 올라가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렸습니다 밤이 되면 지붕을 뚫고 아래로 내려가 잠든 정조를 살해하려는 계획이었는데요.
하지만 그들이 존현각 지붕 위에 있던 기왓장을 하나씩 들춰내는 소리를 독서 중이던 정조가 듣게 되죠.
이에 정조는 급히 자신의 호위들을 불렀지만 자객들은 이미 눈치를 채고 도망가버린 후였습니다.
다음날 정조는 조정의 대신들에게 궁궐 내의 경비가 허술함을 꾸짖으면서 비상 경호 대책을 세울 것을 명하는데요.
그리고 존현각은 너무 노출돼 있기 때문에 경비하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자신의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기게 됩니다.
그렇게 궁궐 내에 특별경계령이 내려졌는데도 불구하고 전흥문은 또다시 겁 없이 대궐 담을 넘으며 정조의 암살을 시도했는데요.
하지만 그들은 정조를 만나지도 못한 채 궁궐을 지키는 군사인 수포군에게 체포당하게 됩니다.
전흥문이 체포되자 정조는 한밤중에 친히 범인을 국문했죠.
심문 과정에서 전흥문은 강용휘에게서 왕을 암살하는 대가로 상평통보 1500문과 여자 노비 1명을 아내로 받기로 했다는 자백을 합니다.
전흥문뿐만 아니라 강용휘도 국왕을 시해하기 위해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호위청 무사 50여 명을 함께 데리고 갔었다고 실토했는데요.
국왕을 호위하는 군관이 국왕을 직접 죽이기 위해 자객과 함께 임금의 침전에 접근한 것은
조선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홍상범은 왕을 시해하려 했던 죄로 거리에 묶어놓고 창으로 찔러 죽이는 책형을 받고 죽게 되는데요.
그리고 그 계획에 연관된 인물들 역시 모두 사형을 당하게 되죠.
그런데 문제는 조사 과정에서 이들이 정조를 죽이고 새로운 왕으로 내세우려 했던 인물이
바로 은전군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인데요.
이에 조정의 대신들이 모두 들고일어나 은전군을 죽일 것을 요구했죠.
하지만 정조는 은전군을 사형시키라는 요청이 수십번이나 들어왔음에도 "내 형제들 중 은신군 이진은 일찍 죽었고 은언군 이인은 병약해서 목숨만 겨우 붙어 있다. 그나마 사람답게 살고 있는 건 은전군 뿐이니 그를 너무 몰아세우지 말라." 라며 은전군을 지키려 했죠.
하지만 조정 대신들은 결코 자신들의 태도를 굽히지 않았고 집요하게 그를 죽이라는 요구를 계속해왔습니다.
결국 정조도 어쩔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며 은전군에게 자결할 것을 명했는데요.
그런데 은전군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억울할 만한 것이 자신은 역모를 꾸민 사람들이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저 반역을 꾸민 사람들이 자기들 멋대로 은전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던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죽을 이유가 없다며 명을 따를 수 없다고 반항했죠.
조선시대 왕족들은 자신도 모르게 역모의 수장으로 추대된 경우 이렇게 억울하게 죽는 경우가 많았는데요.
당연히 영문도 모르고 죽는 은전군 입장에서는 격렬하게 반항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은전군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지 않자 대신들은 정조에게 그를 사형시킬 것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정조도 이에 못 이겨 하는 수없이 그에게 사약을 내렸고 은전군은 강제로 사약을 먹고 죽게 되죠.
이때가 1778년 은전군의 나이 20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모두 잃고 남의 손에 자라다가 성인이 되자마자 자신은 아무 관계도 없는 일로 죽음을 맞이하다니 너무나도 안타까운 삶이었죠.
지금까지 조선 역사상 가장 불행한 삶을 살았던 왕자 은전군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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