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은 만약 오래 조선을 통치했으면 세종보다 더 위대한 왕이 되었을 거라는 이야기가 많은 천재왕 입니다.
문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637년 1월, 청나라의 숭덕제 홍타이지는 정묘호란이 있은 후 약 10년 만에 또다시 조선을 침략했습니다.
그리고 삼전도의 굴욕을 겪은 뒤 조선의 항복으로 전쟁은 마무리가 되었죠.
그렇게 병자호란을 겪고 궁을 정리하는 와중에 타다 남은 왕의 어진이 하나 발견되었죠.
그 어진 속 인물은 풍채가 크고 당당했으며 수염이 길고 수려한, 보기만 해도 위엄이 느껴지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이 어진을 인종의 어진이라고 말했는데 나중에 어진을 고치려 배접을 벗겨보니 뒷면에 '문종대왕어진' 이라고 쓰여있었던 것이죠.
알고 보니 그 풍채 당당하고 위엄 있던 어진은 인종의 어진이 아닌 문종의 어진이었던 것입니다.
문종은 조선의 다섯 번째 왕으로 세종의 아들이죠.
왕이 된지 고작 2년 3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면서 드라마나 영화 등에서 문종은 병약하고 허약하며 비실비실 대고 힘없는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는 문종의 실제 모습과는 다르다고 하죠.
문종은 허약하기는커녕 모든 면에서 능력이 탁월했던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이 죽었을 때보다 문종이 죽었을 때 백성들이 더 슬퍼했을 만큼 대단한 인물이었으며 세종의 뛰어난 두뇌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죠.
그리고 조선시대 왕들의 평균 수명이 약 44세 정도라고 볼 때 그는 38세의 나이로 죽은걸 보면 심하게 단명하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성종이 문종보다 1년 더 짧은 삶을 살았죠.
다만 성종의 재위 기간은 26년이나 되고 문종의 재위 기간은 2년 3개월 밖에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단종이 12살의 어린 나이에 다음 왕위를 잇다 보니 아주 짧은 삶을 살고 매우 젊은 나이에 사망을 한 것으로 여겨지게 된 것입니다.
문종은 선왕의 적장자이자 8살의 나이로 세자가 되어 29년 동안 세자 자리에 있으면서 왕이 되기 위한 교육도 완벽하게 받았고 부왕이던 세종을 잘 보좌해 정통성에 있어서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으며 심지어 능력치 또한 동생들에 비해 넘사벽 수준이라 동생들은 감히 왕위를 넘보지 못했다고 하죠.
그는 세자로 책봉된 지 3년 만인 10살 때 벌써 논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11살 때는 맹자를 배우는 등 공부도 굉장히 잘했습니다.
또한 그는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도 깊게 관여를 했다는 기록도 많은데요.
성삼문은 자신이 저술한 직해동자습에 훈민정음은 세종과 문종의 합작품이라고 기록했다고 하죠.
그리고 그는 글씨도 굉장히 잘 써서 신하들은 그의 글씨체를 따라 하려고 연습하기도 하고 문종이 글을 써서 주기라도 하면 엄청 좋아했다고도 합니다.
또한 문종은 과거의 역사를 정리하고 병법과 국방에도 힘썼으며 사회 기반을 다지는데 노력했던 세종 다음을 이어 왕이 될 준비가 완벽한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형이 너무 넘사벽 수준이다 보니 훗날 계유정난을 일으키는 수양대군 조차도 문종 앞에서는 아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데요.
문종이 수양대군에게 "너는 이정(당태종 시기 최강의 명장)보다 낫고 나는 아마 제갈량이랑 비교하면 아주 약간의 차이밖에 나지 않을 것 같다" 라고하니 수양대군이 문종에게 말하기를 "제갈량 따위를 어떻게 형님과 비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면서 아부를 떨기도 했다고 하죠.
그만큼 형제들에게도 문종의 위치는 절대 넘볼 수 없는 그런 위치였던 것입니다.
문종은 외모에 대한 기록도 존재할 만큼 잘생겼었나 본데요.
체격이 크고 기골이 장대했으며 수염도 관우와 같이 풍성하고 수려해서 명나라 사신들이 그의 얼굴을 보고 "조선의 산수가 어디 비할데 없이 절경이다 보니 이런 아름다운 인물이 난다" 라고 극찬을 하기도 했죠.
또한 그의 외모를 한번이라도 보기 위해 궁녀들이 처벌을 무릅쓰고 문종의 처소에 몰래 잠입하는 경우도 빈번히 일어났다고 합니다.
문종은 외모만큼 인성 또한 훌륭했는데요.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이야 아버지 세종과 할아버지 태종을 보고 자라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요즘으로 치면 성격 좋은 핵인싸 느낌이라 사람들과도 금방 잘 지냈고 동복동생은 물론이고 이복동생들까지 잘 챙겨줬다고 합니다.
어쨌든 세종이 점점 나이가 들어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하면서 1445년부터는 문종에게 조정의 업무들을 하나하나 인계하며 대리청정을 맡겼는데요.
이 대리청정은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시킨 것 같은 신하들 충성도 테스트가 아니라 세종의 전폭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한 왕이 되기 직전에 하는 현장 실습 급이었기 때문에 크고 작은 모든 업무는 문종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여 그가 대리청정을 하던 기간인 8년 동안의 업적은 대부분이 문종의 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문종에게는 뛰어난 정치력이 있다 보니 세종 자신은 훈민정음 편찬에 몰두를 할 수 있었죠.
문종이 대리청정을 하는 기간에는 세종이 하던 정책들을 자신이 주도하였고 그가 왕위에 오른 이후부터는 자신만의 정책들을 하기도 했습니다.
신하들의 소통을 중요시 생각한 문종은 6품 관리까지 윤대를 허락해 줄만큼 신하들 말에 귀를 기울여 주는 관대함을 보이기도 했죠. (윤대 : 관리들이 돌아가면서 왕과 응대하는 일)
이 일이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세조가 즉위하고 나서는 바로 폐지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아버지 세종 못지않은 일 중독이었는데요.
신하들을 죽지 않을 정도로만 빡씨게 굴렸고 이에 대해 신하들이 뭔 말이라도 하는 날이면 워낙 똑똑하다 보니 아버지처럼 모든 걸 논리정연하게 되받아쳐 신하들을 꿀 먹은 벙어리로 만들어 버리기 일쑤였죠.
그리고 그는 국방에도 너무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세자 때부터 공부해오던 진법과 병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는데요.
그는 고조선부터 고려 말까지의 전쟁사를 모두 정리하라는 명을 내렸고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동국병감>이라는 책이었죠.
거기다가 군사에 관한 모든 분야를 집대성한 '오위진법'을 펴냈습니다.
그리고 기존에 12사 체제의 군사제도를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군사제도인 5사 체제를 만들었고 이는 훗날 5군영 체제로 바뀌는 조선 군사제도의 기본틀이 되었죠.
그리고 그는 신기전이라고 불리던 당시엔 너무나도 획기적인 화차를 개발했으며 어떻게 운용하는지에 대한 방법까지 완벽하게 완성했습니다.
이 화차를 '문종화차' 라고 불렀는데요.
더 놀라운 사실은 이 화차의 구상과 개발 그리고 테스트를 거친 후 설명서를 만들고 대규모 양산 후 실전에 배치까지 하는데 1년도 걸리지 않았다는 것이죠.
문종화차는 실제로 4군 6진 지역에 약 200대 정도를 배치하여 사용했다고 하는데 화살같이 생긴 것에 폭탄을 달아 화약으로 쏘는 것으로 이걸로 적을 공격하면 폭탄이 터지면서 피해를 주고 비록 맞지 않더라도 여기서 내는 소리와 빛 때문에 적들은 혼비백산했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과학발전에도 이바지했는데요.
장영실이 생각하고 만들었다고 여기고 있던 측우기도 사실 문종이 세자 시절 만든 것인데요.
비가 올 때 땅을 파서 젖은 깊이를 쟀는데 그건 너무 정확하지 않았고 고심 끝에 구리로 만든 원통형 기구를 만들어 여기에 고인 빗물을 쟀다고 합니다.
당시 12살밖에 되지 않았던 문종이 측우기의 원리를 구상해 내고 장영실에게 만들라고 한 것이었죠.
하지만 너무나도 슬픈 사실은 그가 어릴 적부터 크고 작은 병에 시달렸다는 것인데요.
하필이면 그가 조선에서 손꼽히는 효자 중 하나였던 것입니다.
어머니였던 소헌왕후 심씨가 1446년에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자식으로서 삼년상을 하게 된 것이죠.
삼년상은 묘지 옆에 움막 같은 걸 짓고 거기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묘지에 식사를 올리고 통곡도 해야하며 어디 나가고 들어올 때 부모님이 살아계시듯 일일이 보고도 드려야 했고 술과 고기도 못 먹고 채소와 과일만으로 연명해야 했는데요.
말이 삼년상이지 당시엔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너무 힘들어서 몸이 축나 죽어나가는 사람도 많았고 그렇게 효를 중시하던 사대부들 마저도 너무 힘들어 형제들끼리 돌아가며 삼년상을 치르거나 노비들에게 대신 시키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심지어 공자도 누가 부모 삼년상 중에 고기를 먹었다고 한 제자가 일러바치자 그거라도 안 먹으면 죽을 수도 있다며 이해하고 넘어갔을 정도였죠.
하지만 문종은 누구에게도 시키지 않고 왕으로써의 엄청난 업무량까지 감당하면서 혼자 묵묵히 어머니의 삼년상을 지낸 것입니다.
이때 문종의 몸이 너무나 쇠했지만 간신히 버텨내긴 했죠.
그런데 어머니 삼년상이 끝나고 몸이 회복되기도 전에 아버지 세종까지 세상을 떠나면서 또다시 그 힘든 삼년상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삼년상까지 치르다가 결국 3년을 채 채우지도 못한 채 2년째 되던 1452년 6월 10일에 문종마저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죠.
신하들도 몸이 나날이 안 좋아지는 문종에게 효도도 좋지만 적당히 하라며 상소를 올렸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문종의 지극했던 효심이 오히려 자신에게 악재가 되어 돌아와 버린 것이죠.
문종이 세상을 뜨기 전 병석에 누워서도 조선의 발전을 위해 많은 일을 했는데요.
고려시대의 역사를 정리한 역사 책인 <고려사>와 <고려사 절요>를 편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문종의 죽음에 대해 타살이라는 의견이 있기도 한데요.
당시 어의였던 전순의가 종기에 대한 처방은 하지 않고 오히려 더 병이 악화될 수도 있는 처방만 내렸던 것이죠.
그러다 문종이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종기에 대한 처방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미 치료하기엔 너무 늦어서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죠.
그렇게 전순의는 귀양을 갔다가 수양대군이 왕이 되고 나서 공신에 책봉되고 다시 복권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문종 독살설이 돌기 시작했고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고 하죠.
게다가 문종은 아내 복도 참 없는 인물인데요.
그만큼 여자에게도 큰 관심이 없어 보이죠.
그의 첫 번째 부인인 휘빈 김씨는 자신에게 별 관심이 없던 문종의 사랑을 받으려고 세자가 좋아하던 궁녀의 신발 뒷굽을 잘라 불에 태운 뒤 그 재를 문종이 마실 차에 넣으려 했고 뱀이 짝짓기를 할 때 나오는 정기를 닦은 수건을 몸에 지니고 다니기까지 했는데 그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세종은 그녀를 폐위시켜 버리죠.
그리고 두 번째 부인인 순빈 봉씨는 세자빈이나 왕비를 하기엔 성격이 너무나도 막장이었는데 세종이 공부하라고 한 열녀전 책을 밖에 던져버리고 궁에서 술을 먹고 주사를 부리기도 했으며 가장 막장 사건은 소쌍이라는 궁녀와 문란하게 동성연애를 하다 결국 세종에게 걸려 그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두 번이나 세자빈 간택에 실패한 세종은 그냥 세자의 후궁 중 행실이 바르고 착한 인물을 세자빈으로 삼자는 결론을 내리고 권씨를 세자빈으로 삼았는데요.
문종은 그녀는 마음에 들었는지 경혜공주와 훗날 단종이 되는 아들도 낳았지만 권씨는 결국 산후병으로 인해 1441년에 요절하고 말았죠.
그 이후 문종은 더 이상 중전을 두지 않았고 그렇게 수많은 왕들 중 최초로 왕비가 없는 왕이 되었습니다.
수려한 외모에 성격이나 인품도 너무나도 훌륭하고 능력은 아버지였던 세종과 맞먹을 만큼 엄청났던 인물이자 무엇 하나 모자란게 하나도 없었던 문종은 결국 지극한 효심이 화가 되어 일찍 세상을 떠난 것 같은데요.
문종이 더 오랜 시간 재위를 이어나가고 아들인 단종도 성인이 되어 왕위를 이어받았다면 세종만큼이나 큰 업적을 남겼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죠.
역사상 길이 남을 성군이 되었을 거라는 의견도 많습니다.
문종은 죽기 전 영의정 황보인과 우의정 김종서에게 어린 세자를 부탁한다는 말을 하고 세상을 떠났는데요.
자신이 아껴주던 친동생 수양대군에 의해 아들이 죽임을 당하고 딸과 사위까지 지독한 일을 당하게 되죠.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정말 문종이 오랫동안 살았다면 한반도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 될 수도 있었을까 하고 궁금하기는 하네요.
아버지 세종의 뒤를 이어 자신도 조선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 될 수 있었는데 일찍 요절하고 말았던 천재왕, 문종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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