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의 간섭을 없애고 고려를 개혁하려던 개혁군주였지만 훗날 암군이 되어버리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왕 공민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랜 기간 원나라의 간섭을 받던 고려에도 한줄기 희망의 빛은 있었습니다.
원나라의 간섭을 끝내버리고 망해가던 고려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개혁을 단행했던 한 명의 왕이 있었던 것이죠.
그는 바로 고려 제31대 왕인 '공민왕' 입니다.
공민왕은 왕이 되기 전인 1341년부터 원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그곳에서 지냈는데요.
당시 고려는 사위의 나라라는 뜻인 부마국으로써 고려의 태자나 왕자들은 원나라 공주와 결혼했어야 했죠.
그래서 공민왕 역시 원나라 공주였던 '노국대장공주'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고려왕들은 원나라 공주들과 결혼을 해도 사이가 별로 좋지 않거나 공주들에게 휘둘리기 일쑤였지만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사이가 너무나도 좋았죠.
아무튼 공민왕은 당시까지만 해도 왕이 되기에는 조금 애매한 위치에 있었는데요.
충숙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형이었던 충혜왕이 왕위에 올랐고 그 뒤로도 조카들이던 충목왕, 충정왕이 왕위를 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충정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외척과 간신들이 날뛰기 시작해 국정이 나날이 문란해졌고 이에 원나라에서는 충정왕을 폐위시키면서 공민왕을 왕위로 앉혔던 것이죠.
원나라에서는 공민왕이 그곳에서 오래 살아 원나라에 대해 잘 알기도 했고 부인이던 노국대장공주와도 아주 돈독하게 잘 지냈으니 공민왕이 원나라를 좋아하고 적극적으로 친원 정책을 펼칠 거라 예상했었습니다.
그러나 원나라의 이런 예상을 공민왕이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데요.
공민왕은 원나라에서 살면서 대륙에서 돌아가던 국제정세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원나라가 서서히 망해 가고 있고 명나라가 급부상하고 있는 상황도 모두 꿰뚫고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이 기회를 이용해 고려의 자주성을 되찾자는 생각에 굉장히 강력한 '반원자주정책' 을 펼친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공민왕은 고려사회에 만연해 있던 원나라의 풍습을 없애버리기 시작했는데요.
원나라 풍습이던 변발과 호복 등을 금지시켰고 원나라의 연호와 관제 또한 폐지해 문종 때의 고려의 제도로 되돌려 버렸죠.
또한 원나라가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인 정동행중서성이문소도 폐지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원나라 황제의 비가 된 기황후의 위세를 등에 업고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나중에는 왕의 머리꼭대기에 서서 공민왕까지 무시해버렸던 기황후의 오빠 기철과 그의 일파를 모조리 제거해버렸죠.
여기에 그치지 않고 원나라 태자에게 자신의 딸을 바친 친원파의 대표격이던 권겸 또한 연회 자리에 불러 그 자리에서 숙청해버렸습니다.
거기다가 공민왕은 여세를 몰아 이성계의 아버지이던 이자춘에게 명령해 원나라가 고려의 화주 이북을 직접 통치하기 위해 100년 이상을 고려에 뿌리를 뻗쳤던 쌍성총관부를 폐지해버리기까지 했죠.
이처럼 공민왕의 반원정책은 굉장히 과감하고 신속하며 거침없이 단행되었고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성과를 거두어들였습니다.
또한 그는 승려 보우를 왕사로 임명해 불교의 중흥을 도모하기도 했죠.
하지만 이렇게 거침없는 개혁에는 당연히 부작용도 많았고 공민왕의 이런 행보에 발목을 잡는 악재도 많았는데요.
위로는 홍건적이 끊임없이 쳐들어왔고 아래로는 왜구들이 들끓었던 것이죠.
1359년에는 모거경이 이끄는 4만 명의 홍건적이 쳐들어와 서경이 함락되기도 했으며 2년 후에는 20만 명이나 되는 홍건적의 공격으로 수도 개경이 함락되고 공민왕은 안동까지 피신을 떠나는 등 막심한 피해를 입었던 것이죠.
하지만 다행히 최영과 이성계 등이 이끄는 고려군이 그들을 격파해 수도를 재탈환하기도 했지만 계속된 그들의 침략에 결국 반원정책을 잠깐 포기하고 원나라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정동행성을 다시 설치했으며 관제도 다시 원나라의 것으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왜구도 나타나 아래 지방을 괴롭혔죠.
거기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내부적으로도 반란이 많았는데요.
1363년 3월 흥왕사에 들렀다가 환궁을 하는 도중 원나라의 지원을 받던 덕흥군과 김용이 공민왕을 시해하려 했으나 가까스로 공민왕은 목숨을 건지게 되었고 최영, 오인택 등에 의해 반란이 진압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 1년 후인 1364년에는 자신의 오빠인 기철을 죽인 것에 앙심을 품은 기황후가 최유라는 인물을 지원해 주었고 덕흥군을 왕으로 옹립하려고 난을 일으켰는데 의주가 함락되기도 하는 등 위기가 있었지만 최영과 이성계의 활약으로 최유의 난도 진압이 되었죠.
이렇게 모든 일들을 잘 처리해 나가며 거침없이 고려를 개혁해 나가던 공민왕에게 시련이 닥치게 되는데요.
공민왕이 너무나도 사랑하던 아내, 노국대장공주가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었죠.
그가 원나라에 볼모로 잡혀있을 때 그녀에게 많이 의지했고 공민왕이 반원정책을 펼칠 때에도 노국대장공주는 원나라가 자신의 친정이었지만 사랑하는 남편인 공민왕의 정책들을 지지했었습니다.
또한 그런 그녀와 공민왕의 사이에서는 오랫동안 자식이 없었는데 드디어 1365년에 둘의 사랑의 결실인 아이를 갖게 되었고 훗날 만삭이던 노국대장공주가 난산 끝에 죽음을 맞이하고 만 것이었죠.
그녀의 죽음은 공민왕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그는 정사도 돌보지 않은 채 노국대장공주의 초상화만 바라보며 한없이 흐느끼고 통곡했습니다.
그렇게 술로써 슬픔을 달랬던 공민왕은 자신의 옆에서 함께 개혁을 단행하던 왕사 신돈에게 전권을 위임하게 되었고 자신은 노국공주만을 위해 불교에 전념했죠.
그렇게 공민왕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신돈은 공민왕만큼 거침없는 개혁을 단행했는데요.
조정을 좀먹던 많은 대신들과 수많은 파벌들을 조정에서 축출해버렸고 권문세족이 중심이 된 도당의 권리를 약화 시켰죠.
이후 그 자리에 신진사대부들을 기용했습니다.
그리고 성균관을 재건해 그곳에 이색과 정몽주 등을 책임자로 임명해 신진 유학자들을 키우는데 힘썼습니다.
과거제도도 부정한 방법으로 합격자가 나오지 않게 개선했으며 오직 과거제도를 통해서만 벼슬길에 오르게 만들었죠.
또한 공민왕이 시행하려다 실패했던 전민변정도감을 다시 설치해 권문세족들이 불법으로 빼앗은 토지와 농장 등을 원래 소유자에게 돌려주었고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해방시켜주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신돈을 성인이라며 칭송하기 시작했죠.
하지만 신돈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며 전진하던 개혁정치는 권문세족과 많은 기성세력들의 반발을 불러오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공민왕에게 신돈을 비하하고 모함하기 시작했고 그의 사생활을 파헤쳐 여색을 탐한다느니 재물을 착복해 재산이 엄청나다느니 하며 신돈을 어마무시하게 까댄 것이죠.
이에 공민왕은 처음엔 신돈을 감싸는듯 했지만 신돈의 나날이 강해지는 권력에 공민왕도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으며 이에 서서히 신돈에 대한 신임도 옅어지게 된 것입니다.
공민왕의 예전 같지 않은 태도에 초조해진 신돈은 그에게 죽임당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공민왕을 시해하려는 계획을 세우다 이인의 고발로 들키게 되어 역모죄로 수원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죠.
그리고 그는 공민왕에게 전권을 위임받은지 6년도 채 안 된 시간 만에 수원에서 처형 당했습니다.
이렇게 신돈도 세상을 떠나자 공민왕의 개혁정책은 사실상 끝이나 버렸죠.
공민왕도 총기를 잃고 더 이상 개혁에 대한 의지마저 갖고 있지 않았고 더 이상 국정을 돌보지도 않았으며 매우 문란한 생활에 빠져들었죠.
그는 젊은 미소년들로 구성된 자제위를 설치한 뒤 술과 남색에 빠져 변태적인 행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젊고 예쁜 시녀들을 방안에 모아놓고 자제위 소속의 김흥경, 홍륜 등과 온갖 저질스러운 짓을 하게 했고 자신은 문 틈으로 그것을 지켜보는 등 이상한 행동까지 하고 있었죠.
또한 홍륜 등 자제위의 미소년을 자신의 침실로 불러들여 동성애를 하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자제위에게 자신의 왕비들을 강간하게 했는데요.
만약 왕비 중 누군가가 임신을 하게 되면 그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삼을 생각이었던 것이죠.
그러다 결국 익비한씨가 홍륜과 관계를 가진 뒤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내관이었던 최만생은 공민왕에게 익비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을 알려줬는데요.
그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삼고 이 사실을 아는 모든 자들을 없애야겠다 생각한 공민왕은 최만생에게 모든 준비를 시킨 뒤 술에 취해 잠이 들어버렸죠.
이에 최만생은 그 사실을 자신도 알고 있으니 본인 역시 죽임을 당하겠구나 생각했고 고민 끝에 홍륜을 찾아가 모든 사실을 알려주게 되었죠.
그러자 홍륜을 비롯한 한안, 권진, 노선 등, 자제위들은 공민왕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고 홍륜은 그날 밤 만취한 상태로 잠들어있던 공민왕을 시해했습니다.
그렇게 고려의 마지막 희망이던 공민왕은 1374년 11월, 45세의 나이로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게 되었죠.
이후 공민왕의 죽음에 관련된 인물들은 모조리 이인임에 의해 체포되어 죽거나 유배를 보내지게 되었고 이때부터 정권을 잡은 이인임은 이후 고려 최고의 권력을 휘두르게 됩니다.
공민왕이 죽은 후 고려의 멸망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는데요.
권문세족들의 전횡으로 인해 백성들이 살기 힘들 정도였고 공민왕의 뒤를 이은 고려의 왕들에게는 고려를 다시 일으켜 세울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했죠.
결국 공민왕이 죽고 나서 18년이 지난 1392년에 고려는 멸망했고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조선이 건국되었습니다.
그는 고려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마지막 왕이었는데요.
공민왕은 원나라의 간섭을 뿌리쳐버린 왕이었고 정치, 사회적으로 이전과는 180도 다른 고려 전체를 개혁을 하고자 했었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던 부인의 죽음으로 좌절하고 말았고 그가 죽고 나서 고려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만약 공민왕이 개혁을 완성했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네요.
고려시대 말 총명함과 의지를 갖고 개혁을 하려 했던 왕이자 마지막에는 암군의 모습을 보여줬던 두 가지 모습이 공존하는 왕, 공민왕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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