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춘금은 창씨개명도 하지 않은 채 일본 국회의원에 3번이나 당선된 매국노였습니다.
그는 일본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조선인들 대상으로 깡패짓을 일삼았던 깡패에 조폭이었죠.
1910년 일본에 강제로 나라를 빼앗긴 경술국치 이후 식민지 상태가 된 조선의 경제가 무너지면서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는데요.
명목상으로는 모두 같은 일본 제국 신민이라 불렀지만 일제 당국은 일본인의 호적과 조선인의 호적을 분리해서 관리했죠.
그리고 특별고등경찰을 통해 일본을 배척하는 사상을 가진 조선인이 없는지 감시하는 등 당시 일본에 살던 조선인들은 늘 감시와 경계를 받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조선인들이 핍박받던 그 시절 일본 땅 그것도 그들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일본의 국회의원에 3번이나 당선된 인물이 있다고 하는데요.
심지어 그는 놀랍게도 창씨개명조차 하지 않고 조선 이름 그대로 출마했는데 당선이 되었다고 하죠.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일제강점기의 친일파 중 가장 미스테리한 인물이라 불리는 박춘금입니다.
박춘금은 1891년 4월 17일 경상남도 양산시에서 태어나 밀양에서 자랐다고 하죠.
빈민층으로 태어난 그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 글자만 겨우 읽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고 하는데요.
1904년경 14살이 된 그는 대구로 가서 일본군 병영에서 급사로 일했다고 하죠.
그리고 그곳에서 일하며 일본어를 익혔고 1908년 8월경에는 빈손으로 일본에 건너가 도쿄와 고베 지역에서 탄광이나 토목공사현장의 노동자로 일했다고 합니다.
당시 일본에도 재일교포들이 만든 폭력조직이 있었는데 우연한 기회로 이곳에 들어간 박춘금은 점차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는데요.
이후 그는 나고야에서 조선인 회장으로 취임할 정도의 거물로 성장하게 되죠.
그리고 당시 일본 야쿠자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흑룡회의 실세 도야마 미츠루의 밑으로 들어갔으며 동시에 정치에도 발을 들이게 되는데요.
박춘금은 1920년 30살의 나이로 이기동과 함께 도쿄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을 모아 상구회라는 단체를 만들고 회장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이후 상애회로 이름이 바뀌는 이 단체는 조선인 노동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자본가들을 상대로 파업하는 노동자들을 폭행하는 일종의 조직폭력배들이었는데요.
이때부터 본색을 드러낸 그는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찾아내서 학살하는데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만행까지 저질렀죠.
이후 일본 정치인들의 도움을 받아 상애회 조직을 일본 전 지역으로 확장했고 1924년에는 조선에도 상애회의 지부라 할 수 있는'노동상애회'를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친일행위를 본 동아일보에서는 사설을 통해 거침없이 박춘금을 비난했는데요.
그 소식을 듣고 화가 난 박춘금은 당시 동아일보 사주인 김성수와 사장 송진우를 식도원이라는 요정으로 불러 그들을 무참히 폭행한 후 오물을 퍼부어 버렸죠.
이때 김성수와 송진우는 꽁꽁 묶인 채 박춘금에게 무려 3시간 동안이나 두들겨맞았는데 도중에 화를 참지 못한 박춘금이 김성수의 목을 칼로 찌르려 하자 송진우가 급하게 동아일보 사설 내용에 대해 사과를 했고 김성수는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김성수와 송진우는 무려 3천 원(현재 약 1억원)이나 되는 거금을 박춘금에게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나서야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고 하네요.
이후 박춘금은 조선에서도 온갖 테러에 앞장섰다고 하죠.
1924년 전라남도의 하의도에서 소작농들이 지주들을 상대로 농민운동을 벌였는데 박춘금은 시위 현장에 깡패들을 몰고 가서 주먹과 총칼을 앞세워 하의도 주민들을 진압해버렸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수없이 많은 깡패질을 했는데 그가 가는 곳은 주로 노동자나 농민처럼 힘없는 서민들이 착취당하는 현실을 참다못해 시위를 벌이는 현장이었다고 하죠.
그 와중에 1928년 4월 하의도에서 또 한 번 시위가 일어났을 때에는 무장경찰 20여 명과 함께 하의도에 나타나 행패를 부리다가 오히려 주민들에게 붙잡혀서 몰매를 맞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고 하네요.
조선인들 입장에서 보면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매국노이지만 일본 정치인들 중에서는 자신들을 위해 이렇게 온몸을 던져 싸우는 박춘금에게 감동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죠.
덕분에 1932년에는 깡패 출신이었던 박춘금이 일본 제국 의회의 중의원에 당선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1932년 일본 제국 18대 중의원 선거에서 도쿄 시 제4구의 무소속 후보로 나서서 당선된 것인데요.
당시 조선인과 대만인일지라도 일본에 체류하고 있는 남성이라면 선거권이 있었다고 하죠.
게다가 선거기간에 일본 내무성에서는 투표용지에 한글을 써도 유효 투표로 인정해 줬다고 합니다.
1930년대 일본에 체류하는 조선인의 수가 30만 정도였다고 하니 아마도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조선인들 중에서는 같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박춘금에게 투표한 사람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이후 박춘금은 1940년 19대 선거와 1942년 선거에서도 중의원으로 당선되었는데 그는 일본 제국 시대 중의원 중 유일한 조선인이었다고 하죠.
중일전쟁 이후에는 '동양 평화를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일본 천황에게 충성할 것을 요구하는 황민화 시국강연을 하러 다녔다고 하는데요.
태평양 전쟁 말기에는 일제강점기 조선을 일본에 완전히 통합하자는 내용의 내선일체를 주장하며 대화동맹이라는 단체까지 만들었고 곳곳을 돌아다니며 일본제국을 위한 충성을 부르짖는 강연회를 열었다고 합니다.
1945년 2월에는 대의당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는데 이 조직에는 군부의 관료들과 친일세력들이 다수 참석했다고 하죠.
일제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던 중국 난징 괴뢰정부와 만주국의 대표 등도 이 조직에 연설을 하러 참석했다고 하네요.
박춘금이 당수로 있던 대의당은 일제를 상대로 저항하던 독립투사들의 활동을 격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폭력단체였다고 하죠.
종전 직전인 1945년 7월 24일 대의당은 서울 부민관에서 아시아민족분격대회라는 행사를 열기로 했는데 그 자리에는 조선 총독과 조선군 사령관 그리고 박춘금이 참석할 예정이었죠.
박춘금이 행사를 주최했다는 소식이 신문을 통해 보도되자 대한애국청년당의 당수인 유만수와 강윤국 조문기 세 명의 독립운동가들은 민족의 반역자인 박춘금과 일제의 침략자들을 동시에 처리해버릴 계획을 세웠습니다.
24일 저녁 세명의 청년들은 부민관에 몰래 숨어들어서 2개의 폭탄을 터뜨리는데 성공하게 되는데요.
아쉽게도 박춘금을 처리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폭탄이 터진 행사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박춘금이 계획한 행사는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고 하죠.
이 사건은 한국의 독립운동의 마지막을 장식한 쾌거로 기록되고 있다고 합니다.
광복이 되자 박춘금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일본으로 도망갔다가 얼마 후 다시 비밀리에 한국으로 입국하게 되는데요.
그런데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지면서 반민특위 조직이 만들어졌는데 반민특위에서 박춘금을 반민족 행위 1급 피의자로 지목했고 그 소식을 들은 박춘금은 또다시 일본으로 도망가 버렸죠.
이에 반민특위는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에게 박춘금을 체포해서 강제로 국내 송환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반민특위가 이승만 정부에 의해 해산되면서 박춘금은 그가 저지른 죄의 대가를 받지도 않은 채 일본에서 평생 동안 살았다고 합니다.
이후 박춘금은 1962년 도쿄에 있는 아세아 상사의 사장 자리에 있으면서 잘 먹고 잘 살다가 1973년 3월 도쿄의 게이오 대학 병원에서 81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되죠.
이후 그의 시신이 밀양에 몰래 묻히고 송덕비까지 세워지는 참사가 있었는데 다행히도 이 사실을 누군가가 세상에 알렸고 지역 시민들이 격렬히 항의한 끝에 그의 묘와 송덕비가 철거되었다고 하네요.
박춘금은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작성한 친일인명사전 명단에도 모두 올랐습니다.
그리고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오른 프로 매국노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죠.
지금까지 평생을 일본제국의 앞잡이로 살았던 매국노 박춘금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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