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취수제는 말 그대로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취한다는 말이죠.
과거 고구려와 부여에서 이러한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예전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근친혼에 의한 부작용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요.
하지만 과거에는 합스부르크 가문 외에도 다른 유력한 가문들은 근친혼을 통해 재산과 영토, 권력 등을 지키기도 했죠.
이렇게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과거에는 크게 문제 없이 일어나기도 했는데요.
신라시대에는 그들만의 독특한 마복자 제도나 색공 등이 있기도 했죠.
오늘은 부여와 고구려에 있었던 풍습 형사취수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97년 5월의 어느 날, 고구려의 9대 왕인 고국천왕이 갑자기 사망하고 말았죠.
그러자 그의 아내였던 왕비 우씨는 다음 왕은 고국천왕의 남동생들 가운데 한 사람이 이어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첫 번째 시동생인 발기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선 왕이 죽었다는 말은 하지 않고 발기가 왕위를 물려받아야겠다고 말을 하니 발기는 왕비가 나를 앞세워 반란을 일으키려 하는구나 생각하고 화를 내며 우씨를 쫓아내 버리는 것이었죠.
그렇게 시동생에게 쫓겨난 왕비 우씨는 두 번째 시동생인 연우의 집을 찾아갔는데 연우는 우씨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대문 밖까지 나와 그녀를 정중히 모셨으며 많은 음식을 차려 그녀를 후하게 대접했는데요.
이에 감동을 받은 우씨는 연우에게 모든걸 털어놓고 자신을 왕비로 삼으라고 하면서 연우에게 왕위에 오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연우는 그녀의 말을 들어 왕위에 올랐고 형수였던 우씨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며 그가 바로 고구려 10대 왕 산상왕이죠.
하지만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발기가 군사를 일으키는 등 왕위 계승 순서에 대해서만 문제가 있었을 뿐 연우가 형수였던 우씨와 결혼한 사실에 대해서는 별문제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갔습니다.
그만큼 당시 지배층에게는 형사취수제에 대해 큰 반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죠.
형사취수제는 말 그대로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다' 라는 뜻인데요.
이는 고구려뿐만 아니라 부여, 흉노, 돌궐, 인도 등의 나라 및 유목민족에게서 흔히 행해지던 형태의 혼인 풍습이었죠.
또한 고대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은 '레비라트'라고 불리우는 형사취수제가 있기도 했고 과거 유럽의 국가들에서도 근친혼이나 형사취수제는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옛부터 문화적으로 앞섰다고 생각한 농경국가들이 기마민족이나 유목민족을 미개인이니 오랑캐니 하며 까내리고 조롱하기 위해 이 형사취수제를 저급한 문화로 치부해 그들을 욕하는데에 자주 이용하기도 했는데요.
그럼 도대체 왜 형수가 동생의 아내가 되는 이런 풍습이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당시 유목 민족들은 잦은 전쟁으로 인해 남편을 잃어 과부가 된 여자들이 많았었죠.
이런 과부들은 생활 여건상 먹고살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남편의 일족이 과부와 그의 자식들을 보호 및 부양해 주었고 거기다가 평생 여자를 과부로 살게 할 수 없으니 남편의 동생과 결혼해 살게 했던 것이죠.
그러면 친정으로 돌아가면 되지 않냐 하겠지만 그건 남편 집안에서 허락을 하지 않았는데요.
유목 민족 특성상 자주 이동을 하며 살아야 하고 가사노동 또한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기 때문에 가족의 중요한 여성 노동력을 잃고 싶지 않아서 였기도 했습니다.
당시 노동력은 곧 경제력을 상징했는데요.
남편이 죽은 과부가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게 되면 노동력이라 할 수 있는 여자와 그의 자식이 모두 다른 씨족에게 넘어갔기 때문이었죠.
그리고 남자의 수는 줄어도 여자의 수가 그대로면 다음 세대 인구수는 줄지 않았기 때문에
종족 번식의 이유도 있었습니다.
또한 형이 죽었을 때 재산은 형수가 물려받게 되는데요.
만약 형수가 형의 일족이 아닌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면 상속받은 모든 재산이 형의 일족이 아닌 다른 일족으로 넘어가 버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형사취수제는 형이 죽고 나서 그의 가족과 재산에 대한 모든 것을 동생이 이어받아 생활 능력이 부족한 과부와 그의 어린 자식들을 부양해 주는 것으로 가계를 유지하고 일족을 지속적으로 번성하게 하는 그런 방법 중 하나였던 것이죠.
이와 같이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아내로 맞지는 않고 형수와 성관계만 가진 후 임신이 되면 형의 대를 잇게 하는 방법도 간혹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아이를 낳은 경우엔 생물학적으로는 동생의 아이였지만 법적으로는 죽은 형의 자식이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당시 결혼이란 것은 개인과 개인이 아닌 가문과 가문의 결합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이는 곧 고대 사회에서는 하나의 큰 세력을 형성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요인이 되었죠.
또한 가문과 가문끼리 혼인으로 인해 결성된 동맹 관계가 남자가 죽었을 때 깨질 수도 있는데 죽은 남편 자리를 그의 동생이 이어받아 지속적으로 동맹관계를 유지시켜주는 기능도 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형사취수제가 일반적이었던 곳에서는 친족 집단의 구성원들끼리의 공동체적 유대와 성격이 강했죠.
그러다 농업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여성 중심의 결혼 풍습이 남성 중심으로 바뀌게 되고 친족 공동체보다 직계 가족이 더욱 중시되기 시작했으며 산상왕 이후 고구려의 왕위는 부자 상속이 원칙이 되기 시작하면서 점점 고구려에서 형사취수제는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또 있는데요.
형사취수는 고대사회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지만 꼭 형수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죠.
바로 친모를 제외한, 아버지의 첩들과 여자 조카까지 죽은 남자의 동생이나 아들이 결혼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아들이 죽은 아버지의 첩들을 취하는 것을 수계혼 이라고 했는데요.
아버지가 죽으면 처첩들이 생계를 이어나가기 힘들어지니 형사취수제와 비슷한 이유로 아들이 그녀들을 먹여살린 것이죠.
일본에서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군인이던 남편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수많은 과부들이 생겨났고 이때 아버지를 잃은 어린 조카를 위해 형수와 결혼을 한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당시에 시대 상황상 어쩔 수 없는 현상들이었는데 이때 문제는 전사한 것으로 알았던 남편이 패잔병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면서 동생과 결혼한 아내를 보고 한바탕 난리가 나는 경우도 허다했다고 하죠.
이처럼 현재의 관점으로 보면 있을 수 없는 굉장히 윤리적으로 어긋난 행동처럼 보일 수 있는데요.
당시 상황으로써는 남편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여성들이나 아이들을 동생이 돌봐주면서 사는 한 가지 생존 방편이었던 것 같네요.
과거 고구려나 부여를 포함해 여러 나라에 있었던 형사취수제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한국역사 탐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성왕후. 영조의 아내로 평생을 마치 투명인간과 같이 철저히 무시당했던 왕비 (0) | 2022.03.02 |
---|---|
생각보다 심각했던 걸로 보이는 영조의 편집증과 강박장애. (0) | 2022.02.28 |
조선시대 때 모쏠이 별로 없었던 이유 (0) | 2022.02.23 |
금주령. 목숨 걸고 술을 먹을 수밖에 없었던 영조시대 금주령 이야기 (0) | 2022.02.17 |
박춘금. 조선인 대상으로 깡패짓만 일삼다가 일본 국회의원에 3번이나 당선된 악질 매국노 (0) | 2022.02.12 |
종단이 사건. 영조시대에 있었던 기이하고 충격적인 사건 (0) | 2022.02.11 |
알렌. 고종과 민비의 총애를 받아 조선의 이권을 모두 미국에 넘겨버린 로비스트이자 서구 의학을 들여온 의사 겸 선교사 (0) | 2022.02.10 |
공민왕. 원나라의 간섭을 없애고 고려를 개혁하려던 개혁군주였지만 훗날 암군이 되어버리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왕 (0) | 2022.0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