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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화평옹주. 영조가 너무 사랑한 딸이자 사도세자와 영조의 위태로운 상황을 이어준 유일한 연결고리 옹주

by 사탐과탐 2022.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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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에게 사랑을 듬뿍 받았던 화평옹주는 살얼음판 같은 사도세자와 영조의 부자 사이를 녹여주던 유일한 존재였는데요.
화평옹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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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38년인 1762년 5월 13일, 영조가 자신의 아들이던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굶겨 죽인 사건인 임오화변이 일어납니다.

당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아버지가 죽인 충격적인 사건이죠.

 

이렇게 피도 눈물도 없을것 같은 영조에게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화평 옹주였죠.

그녀는 영조의 총애를 넘어 편애를 받았던 딸이었는데요.

사도세자의 친누나이기도 했습니다.

 

1727년 4월 27일, 영빈이씨의 오랜 산고 끝에 어여쁜 옹주가 태어났습니다.

그녀가 태어났을 당시에는 첫째 아들이던 효장세자가 살아있었기 때문에 영조에게는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없었죠.

그래서인지 총애하던 화순옹주를 낳고 나서 7년 만에 태어난 옹주가 너무나도 예뻤습니다.

 

새로 태어난 옹주는 그렇게 영조의 모든 사랑을 독차지했죠.

그러던 어느 날, 그렇게 애지중지 키우던 옹주에게 불행이 닥쳤는데요.

그것은 바로, 당시 수많은 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병인 천연두가 창궐했고 이 천연두에 옹주가 걸리고 만 것입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당시에 천연두에 걸린 환자가 있을 때는 부정탈만한 일을 하면 안 되었기 때문에 옹주가 천연두에 걸린 즉시 영조는 모든 추국과 형신을 정지시켰죠.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옹주가 잘못될까 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영조의 마음이 하늘에 닿았던 것일까요?

다행히 옹주는 병마와 싸워 이길 수 있었고 그해 7월 20일이 되자 화평옹주로 책봉되었죠.

시간이 흘러 화평옹주가 시집갈 시기가 되자 영조는 간택령을 내렸고 그렇게 1738년, 예조참판 박사정의 아들인 금성위 박명원과 결혼했습니다.

 

화평옹주의 결혼식은 성대하게 열렸는데요.

효종의 딸이던 숙녕옹주의 남편 박필성이 모든 혼인 과정을 주관했는데 그가 말하길 "내가 혼인할 때보다 화순옹주의 결혼식 예물이 10배는 더 풍성했고 화평옹주가 결혼할 때는 화순옹주보다 더 풍성했다" 라고 말할 정도였죠.

 

영조는 화평옹주를 사랑하는 만큼 그녀의 남편인 박명원 또한 총애했습니다.

하지만 혼례를 치른 후에도 사랑하는 딸과 사위를 밖으로 내보내기 싫었던 영조는 둘을 궁내에서 살게 했는데요.

원래 결혼한 공주나 옹주는 궁밖에 나가서 사는게 원칙이었지만 화평옹주를 너무나도 예뻐한 영조는 그딴 건 다 무시해버리고 사위까지 옆구리에 끼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4년 동안 딸부부를 끼고 살다가 결국 1742년부터는 궁 밖으로 내보내게 되었죠.

그리고 영조는 어머니 숙빈최씨가 살았던 이현궁을 화평옹주의 신혼집으로 주기 위해 큰돈을 들여 리모델링을 실시했습니다.

 

이에 대신들은 이현궁은 효종이 봉림대군이던 시절 살았던 어의궁보다 더 크다고 하면서 그곳에서 옹주를 살게 한다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며 반대를 했고 화평옹주 역시 이현궁은 자신에게 과분하다며 거절했죠.

그렇게 화평옹주를 내보내고 나서도 영조의 사랑은 끝이 없었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한 번은 어머니 숙빈최씨의 묘를 갔다가 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딸이 보고 싶다면서 화평옹주의 집으로 가겠다고 한 것이었죠.

그러자 신하들은 왕이 어디로 행차할 때는 반드시 미리 예고를 하고 사람들이 알게 해야 하는데 이렇게 옹주의 집으로 가는 건 너무 갑작스럽다고 그냥 환궁하는게 낫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영조는 화를 내며 아비가 딸이 보고 싶어서 가겠다는데 뭐가 잘못이냐고 난리를 쳤죠.

 

영조의 그런 태도에 깜짝 놀란 신하들은 아무 말 못 하고 더 이상 영조를 말릴 순 없었으며, 그렇게 화평옹주를 만나러 갔다고 합니다.

게다가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궁으로 돌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신하들이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지만 영조는 들은 체도 안 했다고 하죠.

 

여기까지만 보면 영조는 완전 딸바보에 착한 아버지로 보이지만 문제는 화평옹주만 비정상적으로 편애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화협옹주와 사도세자는 미워했는데요.

 

영조가 화평옹주를 보러 갈 때는 사도세자에게 무언갈 묻고 그에 대한 대답을 들은 뒤 귀를 씻고 양치질을 했으며 그 씻은 물을 화협옹주가 사는 집 방향으로 버렸다고 하죠.

영조의 이런 행동들은 마치 재수 없고 부정타는 것을 미리 씻어내는 행동으로 보이는데요.

그러다보니 혜경궁홍씨는 화평옹주에 대해 '부왕의 자애를 특별히 받는 옹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화평옹주는 성격마저 좋고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여서 아버지 영조의 사랑을 독차지하려고 하지 않고 사도세자나 화협옹주와 같은 동생들에게도 돌아가게끔 많은 노력을 했죠.

영조에게 자신만 편애하지 말고 동생들도 사랑해 주라며 부탁했지만 영조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여전히 화평옹주만 편애했다고 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렇게 시간이 흘러 임신을 했던 화평옹주의 해산 일이 다가왔죠.

하지만 아이를 낳다가 난산으로 그만 고작 22살의 나이로 출산하던 아이와 함께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화평옹주가 죽기 전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영조는 헐레벌떡 그녀의 집으로 향했고 옹주의 죽음을 확인한 영조는 엄청난 상심에 큰 충격을 받고 말았죠.

 

그렇게 영조는 밤새도록 그녀의 시신 앞에서 통곡했다고 합니다.

이틀이 지나도록 궁으로 돌아가지도 않은 채 슬퍼하기만 했고 왕의 옥체에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염려한 대신들이 알현을 요청했지만 전부 다 거부했다고 하죠.

그렇게 모든 대소신료들의 간청도 무시한 채 영조는 화평옹주의 염습하는 것도 직접 보고 슬퍼하다가 4일 만에 궁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영조는 화평옹주의 장례를 국상에 버금가게 치러주었는데요.

왕이 너무 지나치게 슬퍼한다고 하기도 하고 옹주의 장례로는 너무 과하다라며 신하들이 간언하자 영조는 격분하며 그런 소리를 한 신하 모두를 파직시켜버렸죠.

그녀의 분묘를 만드는데만도 수개월이 소요되었고 이때 동원된 백성들은 농사도 짓지 못했다고 합니다.

 

또한 영조는 "화평옹주가 내 마음을 알아주는 딸이었는데 이런 지경에 이르러 버렸다" 라고 하면서 비통해 했다고 하죠.

그런데 화평옹주가 사망한 것은 아버지 영조뿐만 아니라 동생이던 사도세자에게도 큰 불행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평소 화평옹주는 따뜻하고 어진 마음을 가졌던 인물이었기에 다른 동생들과 두루 친하게 지냈었는데요.

나날이 살얼음판 같이 변하는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를 그나마 조율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였던 것이죠.

 

혜경궁홍씨가 쓴 한중록에 따르면 "화평옹주가 살아있을 때는 영조에게 '참아라', '그렇게 하지 마라'라고 말하며 서로 맺힌 것을 푼 일이 많았는데 그렇게 착한 옹주가 일찍 돌아가신 건 국운과 무관하지 않다 할 수 없다. 화평옹주가 있었으면 부자간의 자애와 효도를 갖추게 했을 텐데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이 너무나도 애석하다." 라며 기록해두었을 정도였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만큼 화평옹주의 역할은 국운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굉장히 컸던 것이죠.

그렇게 그녀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면서 이제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의 격해지는 갈등 상황을 중재해 줄 사람이 없어져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나마 인원왕후와 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가 사도세자의 편이 되어 그를 보호해 주기는 했지만 이들도 세상을 떠나자 부자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죠.

 

이후 영조의 편애는 화완옹주로 넘어가게 되었는데요.

화평옹주와는 다르게 화완옹주는 영조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의 격해진 갈등을 중재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그녀가 세상을 떠나고 3년 상을 치르는 기간 동안 영조는 화평옹주의 집에 가기 위해 궁 밖으로 나서기도 했고 아니면 다른데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들르기도 하는 등 여전히 먼저 떠나버린 딸을 그리워했죠.

 

그리고 삼년상을 다 지내고 나서 탈상하는 해에 혜경궁 홍씨가 첫아들 의소세손을 낳았는데요.

당시 아기를 낳다가 세상을 떠난 화평옹주의 탈상을 했던 해라서 그런 것일까요.

영조는 손자의 탄생을 처음에는 그렇게 기뻐하지 않았다고 하죠.

 

또한 화평옹주를 낳았던 영빈이씨가 혜경궁 홍씨의 해산을 도왔는데 영조는 그런 영빈이씨에게 칭찬은 못해줄망정 딸 죽은건 다 잊었고 손자 태어난 것만 좋아하냐며 타박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혜경궁홍씨도 시아버지 눈치 보느라 아들 낳은 것을 기뻐하지는 못하고 오히려 무서워했다고 하죠.

 

그러다가 영조는 의소세손의 어깨에 있는 점이 화평옹주 어깨에 있던 점과 같은 위치에 있는 것을 보고 나서부터 화평옹주의 환생이라고 믿어 의소세손을 예뻐했다고 합니다.

좋은 사람은 하늘도 알아서 일찍 데려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요.

화평옹주 역시 그런 사람이었을까요?

 

그녀가 살아있었다면 임오화변과 같은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네요.

자식에게 무자비했던 영조가 아이러니하게도 너무나도 아꼈던 딸, 화평옹주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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