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는 정묘호란, 병자호란으로 나라를 말아먹은 조선 역사상 무능함과 비굴함의 끝판왕이었죠.
하지만 그의 아들인 소현세자는 성군의 자질을 완벽히 갖추었는데요.많은 사람들이 만약 소현세자가 살아서 왕이 되었다면 진짜로 조선의 미래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가 달라졌을 거라고 합니다.
500년 조선왕조의 인물 중 젊은 나이에 사망한 것이 가장 안타까운 사람을 뽑으라면 사람들이 주로 얘기하는 인물이 문종과 소현세자입니다.
그나마 문종은 세자일 때 왕을 대신해 나랏일을 돌보던 대리청정 시절과 왕으로 즉위했던 시절을 합치면 1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자신의 능력을 보여줄 수라도 있었지만 소현세자는 채 왕이 되기도 전에 사망해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는 인물이죠.
소현세자는 1612년 인조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인 인조가 반정을 일으켜 왕이 되면서 소현세자의 신분도 평범한 종친 집안의 맏아들에서 왕세자로 바뀌게 되죠.
인조는 당대의 뛰어난 인재들을 세자의 스승으로 뽑아 세자를 교육했고 소현세자도 성군이 되는 데 필요한 능력을 배우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인조와 소현세자의 관계는 무척 좋았다고 하죠.
14살에 세자가 되고 2년 후인 1627년에 정묘호란이 발발했는데요.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인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강화도로 도망갔습니다.
그러면서 조정을 둘로 쪼개서 소현세자에게 맡겼는데 조정에서 논의한 결과 세자의 행선지는 전라도로 정해졌고 소현세자는 전주까지 내려가서 분조(조정을 둘로 나눔)를 만들게 되죠.
그런데 소현세자는 불과 16살밖에 되지 않는 나이로 위기의 상황을 맞아 실로 한나라의 왕자다운 기품을 보여줍니다.
전쟁으로 지친 백성들의 민심을 잘 다독거려줬으며 지방관리들에게는 전쟁 중이니 함부로 백성들에게 세금을 걷지 말 것을 지시하죠.
인조실록에 의하면 하루는 소현세자가 진흙투성이가 된 길 위를 말을 타고 가다가 자신이 타고 가는 말이 잘 걸을 수 있도록 볏짚을 길가에 깔아둔 것을 발견합니다.
이에 세자는 "이 볏짚은 전쟁통에 말을 먹일 수 있는 귀한 식량인데 내 말발굽에 진흙이 묻고 내 옷에 진흙이 좀 튀면 어떠하다고 이 귀한 군수품을 나를 위해 쓴단 말이냐 헤프게 쓰지 말고 말을 먹이는데 써라"라고 합니다.
또 백성들이 힘드니 자신을 대접하기 위해 농사짓는 소를 함부로 잡지 말라는 명을 내리죠.
이러한 세자의 덕은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졌고 정묘호약이 체결된 후 소현세자가 도성으로 돌아오자 도성의 백성들이 소현세자를 굉장히 반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9년 후인 1636년에 병자호란이 발발합니다.
이번에는 분조를 이룰 틈도 없이 소현세자는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에 갇히게 됩니다.
남한산성을 완전히 포위한 청군은 빨리 성에서 나와 항복하라고 인조를 다그쳤는데요.
성 밖으로 나가면 청나라로 끌려가게 될까 봐 두려웠던 인조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죠.
소현세자는 그런 인조를 대신해 자신이 적진으로 가겠다고 나섭니다.
아버지 대신 굴욕을 감당하겠다는 효심이었죠.
하지만 청은 소현세자의 요청을 거부했고 결국 1월 30일에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하는데요.
인조는 협정을 맺는 자리에서 자신이 심양으로 끌려가기 싫은 마음에 아들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부부를 전부 다 볼모로 보낸다는 조건을 승낙합니다.
청나라 입장에서는 혹시라도 조선이 자신들을 배신하지 못하도록 인질을 잡은 셈이죠.
인조에게도 아버지로서의 미안한 마음은 남아있었는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심양까지 끌려갈 때 궁궐을 나와서 서오릉(지금의 고양시)까지 배웅을 했는데요.
그러면서 당시 소현세자를 끌고 가던 인물인 도르곤에게 자신의 아들들이 심양까지 가는 길에 따뜻한 온돌방에서 잘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소현세자 일행은 1637년 4월, 심양에 도착했는데요.
청나라에서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머물 수 있도록 심양관이라는 건물을 하나 내줬습니다.
청나라는 소현세자에게 조선과 자신들을 잇는 창구 역할을 맡기려 했는데요.
조선에 대한 요구 사항이나 두 나라 간의 해결할 문제가 생기면 심양관을 통해 조선에 전달하려고 했죠.
그래서 청나라는 소현세자를 정책회의나 연회 자리에 정기적으로 참석시켰고 황제의 동생인 도르곤을 비롯해 고위 관료들까지 소현세자와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회의에 참석한 소현세자에게 외교적 현안 특히 명나라와의 문제에 대한 것을 물어보고는 했는데 그때마다 세자는 마치 외교 훈련이라도 받은 듯이 능숙하게 답변해서 많은 청나라인들을 감탄하게 만들었다고 하죠.
소현세자는 청나라인들이 자신을 핍박하고 시비를 걸어도 결코 화를 내지 않고 기가 죽지도 않은 채 당당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청나라 왕자들과 대신들이 세자에게 감히 무례하게 대하지 못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와 왕자들 고위 관료들 모두가 소현세자를 존중하고 좋아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소현세자 또한 적극적으로 청나라의 고관들과 접촉하면서 친분을 쌓으며 인맥을 만들어나갔고 그들로부터 얻은 고급 정보를 몰래 인조에게 알려줘서 조선이 미리 대비할 수 있게 도움을 주기도 했죠.
횡의 사건 때는 도르곤 등을 찾아가 청나라에 끌려온 수많은 조선인들이 무사히 귀국할 수 있게 많은 노력을 했다고 합니다.
횡의 사건에 대해 설명하자면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조선에게 지원군을 요청했는데요.
조선에서는 조총과 활로 무장한 병사들을 보냈는데 이들이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겠다며 공포탄과 화살촉을 뺀 화살을 날리면서 태업을 해버린 것입니다.
게다가 청나라를 도우러 왔으면서 명나라군에 식량을 제공하기까지 했는데요.
이후 명나라의 병부상서가 청나라에 항복하면서 이 모든 사실이 드러났죠.
이것을 횡의 사건이라고 하는데 이 때문에 당시 평양감사를 비롯한 조선의 관료들이 청나라에 끌려와서 죽을 위기에 처했고 이때 이들의 목숨을 구해준 것이 바로 소현세자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소현세자는 세자빈 강 씨의 권유로 심양관 근처에 농장을 만들고 청나라에 있던 조선인 포로들을 사서 그 농장에서 일하게 했는데요.
병자호란 때 수많은 조선인들이 청나라 땅에 끌려가서 노예로 팔리고 있었기 때문에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힘들게 모은 돈으로 조선인 포로들을 사서 그들을 자유민으로 만들어준 후 함께 농사를 짓고 살자고 제의한 것이죠.
당시 세자를 따라갔던 시강원 관리들은 성리학을 공부해야 할 세자가 농업과 상업에 신경을 써서는 안된다며 말렸지만 세자는 "성리학? 우리 조선이 성리학에만 전념하다가 나라가 이 꼴이 된 게 아니었던가!"라고 대답했다고 하죠.
여기서 수확한 곡물로 청나라 상인들과 물물거래를 하다보니 심양관이 마치 시장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소현세자는 상업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요.
조선에서 가져온 진귀한 물건들과 심양의 땅에서 생산한 농작물로 청나라 왕자들과 고위 관료들을 상대로 거래를 하다 보니 소현세자와 세자빈은 막대한 부를 쌓게 되었죠.
소현세자의 뛰어난 능력을 본 청나라 관료들에게서 사사건건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인조 대신 소현세자를 조선의 왕으로 앉히면 우리와 조선 모두에게 이익이 아니냐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는데요.
이 소식은 인조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어느 순간부터 성리학이 아닌 농업과 상업에 열중하는 장남을 못마땅해하던 인조는 그때부터 소현세자를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 정치적 라이벌로 여기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자빈의 아버지 강석기가 사망하게 되는데요.
게다가 세자빈의 어머니마저 병에 걸려 몸져 누워있었기에 소현세자는 부인이 아버지를 잃고 성묘 한번 가지 못했는데 어머니마저 아프시다고 하니 조선에 가고 싶다고 청나라에 부탁해서 일시적으로 귀국을 하게 되죠.
그런데 이때 인조가 어마어마한 꼬장을 부리는데요.
세자빈 강씨가 자기 아버지 산소에 성묘를 가는 것을 하지 못하게 막아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수많은 신하들이 "이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다 또한 청나라에서는 세자빈이 부친상을 당했다고 해서 보내준 것인데 이를 막으면 청나라에서도 의심을 하지 않겠느냐"라며 항의했지만 인조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면서 끝까지 성묘를 가지 못하게 하죠.
심지어 세자빈이 자신의 어머니를 만나는 것마저 하지 못하게 막아버립니다.
이제 인조에게 소현세자는 효성스러운 아들이 아니라 경쟁자이자 정적으로 보였던 것이죠.
그렇게 세자빈 강씨는 한양까지 와서도 돌아가신 아버지의 성묘 한번 못하고 병든 어머니를 만나지도 못한 채 다시 심양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1644년 4월 이자성이 이끄는 농민 반란군에 의해 명이 멸망했는데요.
당시 명나라 장수 오삼계는 반란군을 막기 위해 청에 원조를 요청합니다.
청나라는 도르곤을 대장으로 삼아 병사들을 파견했는데 소현세자도 이들과 함께 출전하게 되죠.
심양에서 북경까지 소현세자의 종군 길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물과 식량이 부족한 데다 막사 지척에 포탄이 떨어지는 아찔한 경험도 여러 번 있었는데요.
고난 끝에 청군은 이자성을 몰아냈고 청은 수도를 심양에서 북경으로 옮깁니다.
소현세자는 그렇게 역사가 바뀌는 현장을 직접 목격했죠.
그는 조선에서 그토록 섬기던 명나라가 이제는 완전히 망했다는 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조선이 야만인들의 나라라고 무시했던 청나라가 강력한 힘과 발전된 기술을 가졌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죠.
소현세자는 북경에 머무는 동안 독일인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을 만나게 되는데요.
그는 흠천감이라는 천문 관측기구의 총책임자 자리를 맡고 있었으며 북경에 동천주당이라는 굉장히 크고 예쁜 교회를 짓기도 했죠.
아담샬은 소현세자에게 로마 가톨릭과 각종 서양 문물이 담긴 책들을 선물로 줬는데요.
세자는 서양의 선진문물에 감탄하며 조선에도 이러한 것들을 전파하고 싶어 했죠.
실제로 아담 샬이 남긴 기록을 보면 당시 소현세자가 아담 샬에게 보낸 편지 속에 이러한 내용이 모두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세례 받은 천주교 신자를 조선에 보내고 싶다는 아담 샬의 제의에도 별다른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하죠.
생전 처음 보는 천주교와 서학에 대해서도 열린 자세를 보인 것입니다.
청은 북경을 접수하자 소현세자를 귀국시켰고 그는 9년간의 볼모생활을 끝내고 드디어 조선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하지만 인조는 영구 귀국한 아들을 전혀 반기지 않았는데요.
신하들이 세자에게 예를 올리겠다는 요청도 거부했죠.
안타깝게도 9년간의 타지 생활로 인해 극도로 쇠약해진 소현세자는 조선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작스럽게 사망해버렸는데요.
한때 소현세자가 독살당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승정원일기의 기록으로 봤을 때는 폐렴에 가까운 증세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역사에 만약을 붙인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죠.
하지만 만약 소현세자가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면 조선은 어쩌면 청나라와 일본보다 더 빨리 문호를 개방하고 강해질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랬다면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는 일도 없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드네요.
어쩌면 조선의 역사를 바꿨을지도 모를 소현세자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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