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비신씨는 폭군 연산군이 진심으로 사랑했던 유일한 여인이었습니다.
심지어 대중에게 잘 알려진 장녹수보다 아내인 폐비신씨를 훨씬 더 아끼고 사랑했었는데요.
미쳐 날뛰는 폭군을 유일하게 컨트롤 할 수 있었던 여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연산군대의 조선왕조실록에는 어떤 한 사람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요.
이 사람은 성품이 매우 어질고 화평하며 온순하고 아랫사람들을 은혜로써 어루만져 주었다고 하죠.
연산군이 무고한 사람을 죽이며 음란하고 방종함이 끝이 없는걸 볼 때마다 밤낮으로 근심했으며 연산군이 미쳐 날뛸 때 그를 울면서 말리며 간곡하게 간언했는데 비록 연산군의 포학함이 바뀌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 사람에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이 유배형을 당했을 때도 이 사람은 울부짖으며 연산군을 따라가려고 했었죠.
이 인물은 바로 연산군의 정비였던 폐비신씨 입니다.
연산군은 죽기 전 이 폐비신씨를 보고 싶다는 한마디만 남기고 세상을 떠났는데요.
그녀는 1488년 1월, 13세의 나이로 동갑이었던 연산군과 가례를 올리고 세자빈이 되었죠.
신씨는 성종이 직접 세자빈으로 점 찍었었기 때문에 간택 없이 책봉된 첫 사례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시아버지이던 성종이 세상을 떠나고 남편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그녀도 중전의 자리에 올랐죠.
그녀는 내명부의 수장인 중전의 자리에 있었지만 후궁들이나 궁녀들에게 존댓말을 사용할 정도로 훌륭한 인품을 가지고 있었고 오죽했으면 사관들은 중전이 너무 답답하다고 했을 정도였죠.
게다가 앞서 말했다시피 그녀는 연산군에게 간언을 할 때도 자주 있었는데요.
그래도 연산군은 화를 내기는 커녕 오히려 칭찬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서로 매우 사랑하는 사이이던 연산군과 신씨는 금슬마저도 좋아서 둘 사이에서 8명이나 되는 자녀가 태어났죠.
흔히 연산군이 총애했던 여자라고 하면 장녹수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정작 장녹수와의 사이에서는 딸 하나밖에 없었으며 다른 후궁들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을 다 합해도 신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보다 1~2명 더 많은 정도였습니다.
장녹수의 치마폭에서 놀아나고 흥청이라는 기생집단과 어울렸지만 정작 신씨와의 금슬이 가장 좋았던 것이죠.
또한 실록에도 악행을 일삼는 연산군이 신씨만은 굉장히 아꼈으며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에게도 이것저것 많이 챙겨줬다는 기록이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1502년 아버지 신승선이 사망하자 그녀는 만삭의 몸으로 부친상을 치루고 있었는데요.
이에 연산군은 신씨의 몸이 상할까봐 곡도 못하게 하고 고기도 먹도록 명했죠.
그러다 2년 후인 1504년,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윤씨의 죽음과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 갑자사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연산군은 성종의 후궁이던 귀인정씨와 귀인엄씨를 때려죽인 뒤에 그대로 자순대비가 있는곳으로 갔는데요.
앞마당에서 칼을 뽑아든채 자순대비에게 밖으로 나오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죠.
이에 자순대비를 모시던 궁녀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을 쳐버렸고 자순대비는 방 안에서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 정도로 개막장으로 치닫던 연산군의 악행을 막아선 이가 있었으니 바로 폐비신씨였죠.
연산군이 대비전 앞에서 난리를 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신씨는 부리나케 그곳으로 달려갔고 연산군의 옷을 잡고 울고 불며 말렸는데 이에 신씨의 얼굴을 본 연산군은 그냥 조용히 다른 곳으로 갔다고 합니다.
그날 수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하고 연산군도 눈 돌아가 날뛰고 있는 마당에 그를 저지한 유일한 사람이 바로 폐비신씨였던 것이죠.
당시 상황이나 연산군의 성격상 들고 있던 칼로 바로 신씨를 베어버렸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는데 다른 사람 같았으면 벌써 죽임 당했을 일이었지만 신씨라서 아무 일 없었던 것입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연산군은 신씨에게 예법에도 어긋나고 선례가 없었던 '제인원덕왕비' 라는 존호까지 내렸죠.
연산군이 신씨를 얼마나 생각하고 사랑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인 것 같은데요.
그로부터 1년 후 중종반정이 일어나게 되면서 신씨도 폐위되어 거창군 부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폐위되어 강화도로 떠나는 연산군과 같은 곳으로 보내 그를 모시며 살게 해달라며 울면서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서로 다른 곳으로 보내져, 끝내 둘은 살아서 다시 만나지는 못했죠.
그러나 그녀의 또 다른 크나큰 비극은 바로 자식들마저 모조리 잃은 것인데요.
그녀와 연산군의 자식들 중, 폐세자 이황과 창녕대군 이성은 왕자라는 이유로 반정세력에게 죽임을 당했고 결국 자식이라고는 휘신공주 밖에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폐서인 되고 나서도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는데요.
원래 같으면 왕이나 왕비가 폐위되면 사람들에게 개무시 당하기 일쑤였는데 평소 신씨의 온화한 성품과 훌륭한 인품 덕분에 사람들에게 무시나 모욕을 받지 않았고 육체적으로는 크게 힘든 삶을 살지는 않았다고 하죠.
시간이 흘러 연산군은 "중선(신씨)이 보고 싶다" 라는 말만 남긴 채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훗날 그녀는 연산군의 묘를 양주로 이장해 줄 것을 중종에게 요청하자 이를 허락해 주었죠.
또한 중종에게 자신이 죽으면 자신을 연산군 옆에다 묻어달라는 부탁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1537년 4월 8일,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훗날 연산군 묘에 같이 묻히게 되면서 죽어서라도 다시 만나게 되었죠.
중종반정이 일어나기 전에 신하들은 세자만 믿고 있었을 정도로 폐세자 이황은 굉장히 총명했었고 국모이던 중전 신씨도 온화하고 따뜻한 성품이었기 때문에 연산군만 무사히 넘어갔다면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궁금하긴 하네요.
연산군이 정말 사랑했던 그녀 폐비신씨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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