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는 개인적인 탐욕으로 반정을 일으켜 왕이 되었죠.
그는 자만심과 허세가 가득해 후금 때도 그랬고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진 후에도 오랑캐를 업신여기고 도발하여 결국 나라를 두 번이나 전쟁터로 몰아넣은 암군이었습니다.
어떤 시대 어느 단체에서든 리더가 무능하면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게 되는데요.
조선시대에도 능력도 없으면서 욕심을 부려 왕 자리에 올랐다가 수많은 백성들을 고통에 빠뜨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늘 이야기할 인물은 한나라의 왕이면서 아무런 대비도 없이 자신보다 강한 나라를 모욕하고 도발해서 전쟁을 일으켰고 수십만 명이 넘는 백성들을 전쟁의 불길 속으로 몰아넣었죠.
바로 조선 역사상 가장 무능했던 왕 인조입니다.
조선의 역사 속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왕이 된 사람은 중종과 인조가 있는데요.
이 두 사람이 왕이 된 과정에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중종이 정변을 일으킨 공신들의 추대로 얼떨결에 왕이 되었다면 인조는 왕이 되고 싶은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자신이 직접 계획을 준비하고 앞장서서 정변을 일으켰던 인물이죠.
인조와 서인 정권은 광해군의 패륜행위와 폭정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광해군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는데 성공했지만 그들이 내세운 명분을 믿어주는 백성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다음 해에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자 인조는 한양을 버리고 급히 도망갔지만 그를 따르는 백성은 하나도 없었는데요.
오히려 인조가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려 한다는 소식을 듣자 백성들은 왕이 타지 못하게 배를 숨겨놓기까지 했다고 하니 당시 백성들이 인조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이죠.
하지만 이괄의 반란은 결국 실패로 끝났고 인조는 계속해서 왕의 자리를 지키게 됩니다.
광해군을 쫓아낸 서인 세력들은 명나라와 후금 간의 균형을 유지하는 광해군의 중립외교 대신에 명나라와의 의리를 중시했고 이는 결국 1627년 정묘호란으로 이어졌는데요.
1627년 조선을 침략한 후금군은 전쟁이 시작된 지 열흘 만에 평안도와 황해도를 점령해버립니다.
인조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특기를 발휘해서 잽싸게 강화도로 도망가 버렸죠.
후금이 침략해온 이유는 조선을 완전히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명나라를 치기 전에 후방을 안전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이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조선에 화친을 제의했죠.
화친의 조건은 바로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으라는 거였는데요.
하지만 후금을 오랑캐라며 깔보는 마음이 강했던 인조와 조정 신료들은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제안을 거절합니다.
한양까지 점령하며 조선을 궁지로 몰아넣은 후금이었지만 애초에 그들의 목표는 명과의 전쟁 중에 조선에게 뒤통수를 맞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더 이상 시간을 끌어봤자 자신들에게도 좋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명나라와 관계를 끊지 않아도 된다는 조건으로 다시 화친을 제의했고 이번에는 인조도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화친을 맺는 대가로 후금에 조공을 보낸다는 조건이 포함되었기 때문에 백성들로부터 강제로 공물을 거둬들여야 했는데요.
애꿎은 조선의 백성들만 허리가 휘게 생겼지만 인조에게 딱히 중요한 사실은 아니었죠.
그에게 중요한 것은 백성들이 아니라 자신의 자존심이었습니다.
화친을 맺으러 오는 후금의 사신을 큰길이 아닌 샛길로 오게 했고 화친을 맺는 자리에서 오랑캐와는 직접 만나지 않겠다며 의식에 쓰이는 향만 피우고는 바로 궁으로 돌아가버렸죠.
그리고 화친을 맺는 조건으로 왕의 동생을 인질로 보내라는 요구를 받자 인조는 왕족인 원창군을 자신의 동생으로 속여 후금에 보내버립니다.
게다가 후금의 제의에 대한 답서에는 후금이 아닌 명나라의 연호를 찍어서 보내기까지 했는데요.
나라가 망할 뻔한 위기를 겪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계속해서 후금에게 시비를 건 것이죠.
정묘호란이 끝난 지 9년여가 지난 1636년 2월 인조의 어머니인 인헌왕후가 죽자 후금에서 조문단을 보냅니다.
인조와 신하들이 오랑캐들에게 제대로 된 대접을 해줄 리가 없었는데요.
조문을 온 후금의 사람들에게 건물 안이 좁다는 핑계를 대며 밖에 천막을 쳐둔 곳이 있으니 거기서 제사를 지내라고 합니다.
그나마도 어설프게 만들어뒀는지 바람에 날아가 버렸죠.
게다가 천막 뒤에 병사들까지 세워두며 대놓고 그들을 의심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찬밥 대접에 분노한 조문단은 그대로 후금으로 돌아가버렸는데요.
이러한 일들이 쌓이고 쌓여 마침내 조선에 대한 후금의 분노가 폭발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후금의 왕 홍타이지가 청나라를 세우고 황제 자리에 오르는 즉위식을 하는데 축하를 위해 조선에서 보낸 사신들이 사고를 쳐버린 것인데요.
다른 나라에서 온 사신들은 황제에게 모두 머리를 조아리는데 조선의 사신들만 오랑캐에게 머리를 조아릴 수 없다며 꼿꼿이 서있었던 것이죠.
분노한 홍타이지는 그들을 죽지 않을 만큼만 때려서 조선으로 돌려보냅니다.
그리고 사신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건네주며 조선의 왕에게 전달하라고 명하죠.
"나는 전쟁을 통해 강약과 승부를 겨룰 뿐사신을 죽이는 비겁한 짓은 하지 않겠다. 스스로 죄를 깨우쳤다면 조선의 왕자를 볼모로 보내라."
그런데 사신들은 그 편지를 조선에 전해주면 큰일이 나겠다 싶어 돌아오는 길에 그냥 편지를 버려버립니다.
편지를 보냈음에도 조선에서 아무런 답이 없자 결국 홍타이지의 분노가 폭발했죠.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났고 12만 8천여 명의 청군은 5일 만에 한양을 또다시 점령해버립니다.
워낙 순식간이었기 때문에 인조는 멀리 도망가지도 못한 채 남한산성에 갇히게 되는데요.
인조가 남한산성에 고립된 지 이틀 뒤 청은 인조의 동생과 대신을 인질로 요구합니다.
인조와 신하들은 잔머리를 굴려 10년 전 정묘호란 때 써먹었던 그 꼼수를 다시 써먹기로 하는데요.
바로 가짜 동생, 가짜 대신을 만들어서 보내는 것이었죠.
10년 전 거짓 동생 노릇을 했던 원창군이 아직까지 들키지 않았으니 이번에도 써먹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 달리 청나라는 예전에 보냈던 원창군이 진짜 왕자가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는데요.
청나라의 장수는 너희가 진짜가 아님을 알고 있다며 가짜 왕자와 가짜 대신을 추궁했고 결국 모든 사실이 드러나며 협상은 결렬됐죠.
그 후 왕족들이 대피해있던 강화도까지 청나라에 함락되었고 황제 홍타이지는 왕이 직접 나와 항복하라며 조선에 최후통첩을 합니다.
결국 인조는 청황제에게 삼배구고두례로 신하의 예를 하게 되는데요.
삼배구고두례란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다는 뜻으로 신하가 황제를 만날 때 행했던 예식입니다.
삼배구고두례는 군신관계를 명백히 보여주는 행위로 정묘화약으로 후금과 형제의 관계를 맺었던 조선이 이제는 그들의 신하가 돼버린 것이죠.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갔을 텐데 괜히 시비를 걸다가 나락으로 가버린 것인데요.
이렇게까지 일을 키운 것은 바로 조선의 왕 인조였습니다.
후금 시절부터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할 징조는 계속해서 있었지만 인조는 위험신호를 보고도 대비하기는커녕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켰는데요.
그는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계속해서 청나라를 깔보고 시비를 걸었으며 적의 침입에 대비하자는 신하들의 청마저 무시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청나라가 쳐들어오고 남한산성에 고립되자 자신이 그토록 무시하던 오랑캐들의 황제에게 온갖 아부로 가득한 편지를 보내며 목숨을 구걸했죠.
그렇게 인조는 자신의 목숨을 건졌고 왕의 자리도 계속 지킬 수 있었지만 백성들은 자신들의 왕이 저지른 실수의 대가를 치러야만 했는데요.
청나라군이 침략하는 과정에서 지나치는 모든 마을을 약탈하고 불을 질렀기 때문에 수많은 백성들이 죽거나 집을 잃었죠.
게다가 청나라군은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수십만 명의 조선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가버렸습니다.
"우리가 끌고 가는 조선인 포로들 가운데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탈출에 성공하는 자는 보내주겠다. 하지만 일단 강을 건너 한 발짝이라도 청나라 땅을 밟은 다음에 도망치는 자는 조선이 도로 잡아 보내야 한다."
청 태종 홍타이지가 1637년 1월 항복을 받을 당시 조선 조정에 제시했던 포로 관련 조건이었습니다.
조선 백성들에겐 너무나도 가혹한 조건이었죠.
만약 인조가 세계정세에 조금만 관심이 있었더라면 병자호란과 같은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평가가 많은데요.
무능한 지도자 하나 때문에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예견된 재앙을 피해 가지 못하고 고통받게 된 것이죠.
개인의 욕심 때문에 왕 자리에 올랐지만 자신의 무능함 때문에 수십만의 백성들을 피눈물 흘리게 했던 왕 인조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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