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터지자 나라를 버리고 압록강을 건너 백성들과 나라를 버리고 명나라로 도망가려 했던 왕이 있었죠.
조선시대 대표적인 암군 선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조선 역사를 통틀어 가장 최악의 왕이 누구냐고 물어본다면 대부분이 이 사람을 뽑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라가 위기에 빠지자 자기만 살겠다고 백성들을 버리고 도망친 비겁자.
위태로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싸운 성웅 이순신을 죽이려고 했던 옹졸한 왕.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능력은 있었지만 너무나도 책임감이 없고 콤플렉스로 똘똘 뭉쳐 있었던 왕 선조입니다.
임진왜란의 역사 속에서 현대인들에게 가장 많은 찬사를 받은 인물이 이순신 장군이라면 가장 많은 욕을 먹은 것은 아마도 이 사람이 아닐까 싶은데요.
바로 당시의 왕이었던 선조입니다.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선조는 항상 무능하고 어리석은 군주의 모습을 보여주죠.
하지만 사실 선조는 무능하다고 하기에는 생각보다 능력이 있는 왕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훌륭한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이 뛰어났는데요.
말단 관리에 불과했던 이순신을 전라도 바다를 책임지는 사령관으로 파격 승진시킨 것도 바로 선조였습니다.
조정 신료들이 입을 모아 반대했지만 "이순신은 충분히 그 일을 감당해 낼 수 있다. 더 이상 말하지 말라" 라고 말하며 끝내 이순신을 전라좌수사 자리에 앉혔고 결과적으로 이 일은 훗날 조선을 살리는 신의 한 수가 되었죠.
하지만 불행하게도 선조에게는 큰 단점이 있었으니 너무나도 책임감이 없고 질투심이 강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임진왜란이 시작되고 왜군이 20일 만에 미친 속도로 부산에서 한양까지 밀고 올라오게 됩니다.
선조는 조선군이 연달아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신하들을 데리고 도망갈 준비를 했는데요.
한양에서 개성, 개성에서 평양, 평양에서 의주로 끝없이 도망을 계속합니다.
심지어 평양성에서는 도망가지 않을 테니 자신과 함께 싸우자며 주변의 병사들과 백성들을 소집하기까지 했죠.
하지만 선조는 한양을 되찾으러 올라오던 조선군이 용인 전투에서 왜군에게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의주까지 도망을 가버립니다.
선조의 말을 믿고 평양성에 모였던 백성들은 왕이 자신들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걸 알고 분통을 터뜨렸죠.
왕이 도망가는 것을 반대하는 신하들도 있었지만 국왕이 왜군에게 잡히면 전쟁은 조선의 패배로 끝나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신하들이 선조가 의주까지 피난 가는 것을 반대하지 않고 왕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선조는 계속되는 조선군의 패전 소식을 듣고 왜군에 대한 공포가 점점 커지면서 국왕으로서의 책무를 집어던진 채 요동으로 도망가고 싶다고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는데요.
이에 신하들은 너무나도 황당한 나머지 "조선의 국왕이라면 설령 죽는 일이 있더라도 조선 땅에서 죽어야 하옵니다!"라고 일갈하며 선조의 요동 도주행에 매우 강경하게 반대의 의사를 표시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전황이 불리해도 한 나라의 국왕이 자신의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다른 나라로 도망친다는 것은 신하들에게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죠.
선조의 졸렬함은 임진왜란 동안 목숨을 걸고 싸운 장군들과 의병장들을 대한 태도에서도 잘 나타나 있는데요.
선조는 이순신 장군에 대해 ‘처음에는 힘껏 싸웠으나 나중에는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며 공개적으로 그를 비판했습니다.
명나라 경리 양호가 이순신의 공을 높이 사자 "통제사 이순신이 사소한 왜적을 잡은 것은 그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며 큰 공이 있는 것도 아닌데 대인께서 그토록 높게 평가를 하시니 과인은 마음이 불안합니다"라며 졸렬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죠.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끌고 도원수 자리에까지 이른 권율도 해임시켜버립니다.
전투 중 도망치는 병사들의 목을 베었다는 이유로 말이죠.
자신의 해임 소식을 들은 권율이 "전쟁에 임하는 대장이 도망병의 목을 베었다고 어찌 파면을 당할 수 있는가"라며 탄식했다고 하네요.
유명한 홍의장군 곽재우도 선조에게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평생을 숨어 살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선조는 신하들을 끊임없이 의심했으며 뛰어난 공을 세워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신하들을 옹졸하게 질투했죠.
이런 추한 모습은 전쟁이 끝난 후 공신을 정하는 자리에서도 계속됩니다.
바로 자신이 백성들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갈 때 옆에서 호위했던 86명의 신하들을 최고 공신으로 임명한 것인데요.
심지어 그중에는 내시 24명, 의관 2명, 마부 6명까지 모두 포함돼 있었습니다.
반면에 왜군과 목숨을 걸고 싸웠던 장수들은 마지못해 18명만 공신 자리에 임명했고 곽재우, 조헌, 고경명 등 큰 활약을 세운 의병장들은 거기에 뽑히지도 못했죠.
이에 신하들이 반발하자 선조는 조선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명나라가 참전했기 때문이고 결국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한 자신의 공이 제일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자신을 옆에서 호위한 신하들 또한 최고의 공을 세운 것이라 볼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요.
전쟁이 시작되고 왜군이 밀려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백성들을 버리고 도망간 왕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기엔 너무나도 뻔뻔한 말이었습니다.
선조가 이렇게 뻔뻔하고 시기 질투로 가득 차게 된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자신이 서자 출신의 왕이라는 콤플렉스 때문이었습니다.
선조는 애초 왕이 될 수 없는 위치였는데요.
그런 그가 왕위를 잇게 된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었습니다.
조선의 13대 왕인 명종에게는 원래 뒤를 이을 아들이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명종의 아들은 13세의 나이에 병에 걸려 요절하게 되죠.
4년 후 명종 또한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왕실의 어른인 인순왕후의 명으로 16세의 나이의 선조가 왕위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조선 왕조 최초로 서자 출신의 왕이 탄생한 것인데요.
이러한 자신의 배경 때문에 선조는 재위 기간 내내 남을 의심하고 질투했습니다.
자식인 광해군 또한 예외는 아니었죠.
임진왜란이 시작되고 선조는 피난을 떠나면서 조정을 둘로 나눠 일부는 선조를 따라 의주로 가도록 했고 일부는 세자로 책봉한 광해군을 따라 함경도, 강원도 등으로 가서 왜군을 막도록 했습니다.
광해군은 각 지역에서 목숨 걸고 싸운 의병장들과 장수들에게 사람을 보내 상을 내리고 관직에 임명하는 등 그 공을 격려했고 왜군이 한양에서 물러난 뒤에도 각지를 돌면서 군과 백성을 격려하며 민심을 수습하는 데 힘썼는데요.
자신들을 버리고 도망가 버린 왕과는 너무나도 비교되는 모습이었기에 조정 관료들과 백성들로부터 많은 지지와 존경을 받게 되죠.
전쟁이 계속되면서 광해군이 엄청난 활약을 하자 명나라에서도 광해군을 새로운 조선의 국왕으로 즉위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신하들도 이에 동조하는 분위기를 보였는데요.
콤플렉스 덩어리인 선조는 아들 광해군에게 왕위를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질투심과 함께 의심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선조는 자신의 권위를 되찾고 광해군을 견제할 목적으로 여러 차례 양위 소동을 벌이며 아들을 괴롭혔죠.
이런 사실들을 봤을 때 선조는 결코 멍청한 왕은 아니었습니다.
너무나도 이기적이었고 책임감 없으며 인간적인 매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악질일 뿐이죠.
운 좋게 왕의 자리에 올랐으나 평생을 열등감 속에서 살았던 남자 선조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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