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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귀영 살인사건. 사채업을 하던 양반 이인한은 돈을 갚지 않았다는 이유로 채무자의 아내를 잡아와 폭행을 가한 사건

by 사탐과탐 2021.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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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고리대금업이 있었고 돈을 빌려주는 사람은 돈 많은 양반들 그리고 빌리는 사람들은 헐벗고 가난한 백성들이었죠.
하지만 요즘과 마찬가지로 돈을 받을 때는 가혹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채 때문에 사람이 죽은 사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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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시대에도 사채라던가 사채업자라던가 하는 말을 들으면 굉장히 무섭게 느껴지는데요.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사채업자들은 엄청나게 높은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면서 만약 돈을 갚지 못했을 시엔 구타를 가하거나 잔혹하게 괴롭히거나 하는 모습으로 많이 나왔습니다.

 

실제로는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과거 조선시대에는 방금 이야기한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온 사채업자들과 같이 돈을 갚지 않을 때는 지독하게 그들을 괴롭혔죠.

그만큼 조선시대에도 고리대금업이 성행했는데요.

이것도 돈이 많은 사람이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양반들이 직접 하는 경우도 많았죠.

 

심지어 조선의 재상에 있던 사람이 고리대금업을 하다가 탄핵을 받기도 했을 정도였습니다.

어쨌든 양민들 수탈은 기가 막히게 잘하던 양반들은 어처구니없는 조건을 내세워 돈을 빌려주며 일반 백성들을 괴롭혔죠.

양반들이나 돈 많던 토호들이 백성들에게 빌려주는 돈의 연 이자는 10~20%였지만 나중에는 연 50%의 이자를 뜯어낼 정도였습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자는 20%를 넘지 못하도록 하기도 했고 흉년이 들었을 때는 모든 민간의 사채 이자를 풍년이 들 때까지 받지 못하게 하는 '사채 동결령'을 내리기도 했죠.

그렇지만 이러한 일명 '사채'를 쓰는 사람들은 굉장히 가난한 백성들이었기 때문에 빚을 갚는 경우보다 갚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하지만 사채업자들은 기한이 되었는데 돈을 갚지 않았을 땐 바로바로 무엇이든 빼앗아 갔는데요.

땅을 강제로 빼앗기도 했고 가족을 노비로 삼기도 했죠.

그러다보니 조선 후기에 이르면 많은 백성들이 땅을 빼앗겨 소작농이 돼버리거나 아니면 살던 곳을 떠나 떠돌이 유민이 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렇게 돈을 빌려준 사람들의 횡포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송사 또한 잦아져서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기도 했죠.

그러나 방금 말했던 일들보다 더 잔인한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조선시대 때 사채로 인해 빚어진 살인사건입니다.

 

숙종 3년인 1677년 12월 16일, 을씨년스러울 만큼 추웠던 겨울날 온몸을 움츠린 채 길을 가던 행인들이 한 소나무 앞을 지나던 차에 무언가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 소나무에 목을 매고 죽어있는 한 여자의 싸늘한 시신을 발견했기 때문이었죠.

 

이에 곧바로 그들은 한성부에 신고를 했고 그러자 신고를 받은 포도청 종사관과 포도부장, 의생 등은 서둘러 그 여인의 시신이 있는 곳으로 향했습니다.

그렇게 소나무에서 시신을 끌어내린 그들은 즉시 검시를 시작했죠.

 

그들이 시신을 검시해 보니 스스로 목을 맸을 때 반드시 있어야 하는 흔적들이 없었습니다.

그 흔적이란 것은 바로 사람이 목을 매면 무조건 미친 듯이 발버둥 치기 때문에 나뭇가지에도 줄에 쓸란 자국이 있어야 하고 시신에 목에도 격렬하게 발버둥 친 흔적이 있어야 했는데 나무에도 이 여자의 목에도 그런 흔적이 전혀 없었던 것이죠.

 

거기다가 온몸에 멍이 들어 있었으며 여기저기에 맞은 흔적들과 심지어 옷에는 발자국까지 찍혀 있었습니다.

이에 조사를 나섰던 그들은 이 사건은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라고 확신을 하게 되었죠.

포도청에서는 즉시 이 피해자가 누군지 파악에 들어갔는데 그녀는 김제원이라는 사람의 아내 귀영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래서 죽은 귀영의 친정어머니를 찾아가 어찌 된 영문인지 조사를 진행했는데 그녀에게서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죠.

그녀의 친정어머니가 했던 말은 바로 사위인 김제원이 참봉벼슬을 지내고 있던 이인한에게 사채를 빌려 썼지만 갚지 못했고 그러자 이인한이 남자 종들을 보내 김제원을 엄청나게 구타한 뒤 끌고 가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끌려간 김제원은 이인한의 집에서도 엄청 두들겨맞았는데 극심한 고통을 참지 못하고 김제원은 도망을 쳐버렸고 이에 이인한은 그의 아내였던 귀영을 잡아와 헛간에 가둬놓고 약 45일의 시간 동안 가노들을 시켜 채찍으로도 때리고 몽둥이로도 두들겨 패자 결국 그렇게 그녀는 엄청 구타당하다가 그만 숨이 멎어버린 것이었죠.

 

그러자 이인한은 그녀를 자살로 위장시키기 위해 늦은 밤 하인들을 시켜 귀영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처럼 보이게 해놓았던 것입니다.

그 말을 보고받은 포도대장 구일은 이런 얼토당토안한 일에 불같이 화내며 당장 참봉 이인한을 잡아들이라 명했죠.

 

그래서 이인한을 비롯한 노비들이 줄줄이 포도청으로 잡혀왔습니다.

포도대장 구일은 이인한에게 너는 귀영을 사사로이 가두고 고문을 가했으며 결국에는 그녀를 때려죽인 죄를 인정하냐고 물었지만 이인하는 까딱 잘못하면 자신이 잘못될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한 일이 절대 아니라며 죽어라 발뺌을 하는 것이었죠.

 

그러자 포도대장은 시체를 검안할 때 시신에 있었던 흔적들을 기록해놓았던 것을 가져오라 한 뒤 그의 앞에서 읽어내려갔습니다.

스스로 목을 매지 않았다는 증거들 그리고 누군가에게 구타당한 흔적들 등과 죽은 여자의 친정어머니의 증언과 마을 사람들의 증언까지 쭉쭉 읽어나가니 이인한의 얼굴이 점점 굳어져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렇게 포도대장은 더욱 매섭게 이인한을 추궁했습니다.

하지만 이인한은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며 계속 모르쇠로 일관했죠.

그러자 결국 포도대장 구일은 이인한과 함께 잡혀온 종들에게 자백을 받기 위해 고문을 가하기 시작했는데요.

 

심지어 횟수나 장의 크기 따위를 무시한 채 아무 몽둥이를 가지고 마구잡이로 죄인을 두들겨 패는 난장을 실행했는데 흠씬 두들겨 맞은 이인한의 종들은 견디지 못하고 결국 모든 걸 자백하고 말았죠.

종들의 자백 내용은 귀영의 친정어머니가 했던 진술과 일치했는데요.

 

그러자 이인한은 종들이 지들 맘대로 구타했을 뿐 나는 귀영을 때린 적이 없다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발뺌만 하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사건의 모든 전말을 알게 된 포도대장 구일은 형조에 보고서를 올렸고 형조에서는 숙종에게 이 일을 보고한 뒤 이인한의 처벌에 대한 논의를 하기 시작했죠.

 

영의정이던 허적은 귀영을 죽인 것은 종들이니 이인한은 약한 처벌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좌의정이던 권대운은 어쨌든 이인한의 종들은 명령에 따라 한 짓일뿐이니 그러한 명을 내린 이인한을 중형에 처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대신들의 의견을 듣고 있던 숙종은 마침내 비답을 내렸는데 이인한의 처벌은 고작 장 100대 또는 은 10냥밖에 안되는 아주 약하디 약한 처벌을 내린 것이었죠.

 

그러자 사헌부에서는 더 큰 벌을 내려야 한다고 숙종의 뜻에 반대를 하고 나섰고 조정에서는 다시 논의를 거친 후 결국 이인한을 유배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죠.

그렇게 이 돈 못 갚은 사람의 아내를 강제로 납치해 때려죽인 사건이 일단락 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미 오랜 기간이 지난 옛날이야기이지만 돈 많은 사람들의 행동이나 처벌 수위, 가난한 사람들이 받은 핍박 등을 보면 과거나 현재나 좀 비슷해 보이는 건 기분 탓인가 싶네요.

 

조선시대 때 있었던 사채에 얽힌 살인사건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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