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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간택. 왕이나 왕의 자식들의 배우자를 찾기 위해 시행했지만 나중에는 양반들의 권력 유지 도구가 되어버린 제도

by 사탐과탐 2021.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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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왕이나 왕의 자손들의 배우자를 찾기 위해 시행한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간택 제도이었는데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양반들의 권력 유지 도구로 악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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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태종의 딸이던 정신옹주의 간택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요.

 

이게 무슨 사건인지 간단히 말씀드리면 태종이 자신의 딸인 정신옹주를 시집보내려고 했는데 이속 이란 인물이 정신옹주의 친모인 신빈신씨가 예전에 원경왕후의 여종이었다는 사실을 꼬투리 잡아 "내 아들을 여종의 딸에게 장가보낼 순 없다" 라고 하며 태종과 신빈신씨 그리고 딸인 정신옹주까지 싸잡아 모욕을 한 사건이었죠.

 

그 일로 태종의 노여움을 사 이 이속이란 사람은 어마어마한 죄를 받게 되었던 사건이었습니다.

이 이후로 태종은 간택 제도를 만들게 되는데요.

오늘은 이 간택 제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간택이란 왕이나 왕의 아들, 또는 딸이 결혼을 할 때 배우자를 고르는 행사인데요.

그전에는 없었던 제도였고 왕실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서 태종이 만든 제도였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왕은 만백성의 아버지이자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로써 모든 백성들이 잘 먹고 잘 살게 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고 그러기 위해선 당연히 현명하고 어진 아내를 얻어 왕실 자손을 번성시켜야 했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는 처자들을 궁으로 불러 엄격히 심사해야 한다는 것을 명분 삼아 간택을 시행했는데요.

 

그렇다보니 간택은 오로지 조선 왕실만의 특권이고 왕실의 위엄을 드러내는 절차임이 강조되었으며 이 명령에 불응하거나 양반 집안에서 자식들을 결혼 시킨다고 이 간택을 따라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불충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고려 시대 때는 왕실에서 마음에 드는 가문에 결혼의 의사를 먼저 전하고 상대 가문에서 오케이를 하면 결혼이 성립되었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다른 귀족 가문에서 왕에게 결혼 의사를 전달하는 경우에도 왕이 오케이 하면 결혼이 가능했었죠.

 

고려시대에는 귀족 가문의 여성들을 궁으로 모아서 평가하고 간택하는 제도는 없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왕자나 공주의 배우자를 간택하는 방법은 꽤나 까다로웠는데요.

간택을 하기 전에 왕이 금혼령을 내리면 그때부터 양반 가문 뿐만 아니라 평민들도 결혼 적령기 여성이나 남성들은 결혼을 하지 못했죠.

 

그리고나서 먼저 봉단령을 내렸는데 봉단령은 전국 팔도에서 자신이 적임자라고 생각되는 양반가 처녀 중 이씨가 아닌 사람, 부모가 있는 사람, 첩의 딸이 아닌 사람 그리고 결혼하려는 왕자나 2~3세 연상까지의 여자가 스스로 '처녀단자(處女單子)'를 제출하라는 명이었습니다.

 

처녀단자에는 처녀의 생년월일이 적혀있었고 다음에는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그리고 외할아버지가 누군지를 적었죠.

요즘으로 치면 서류심사 비슷한거 같은데요.

그리고나서 서류심사에 통과한 여러 후보들을 궁으로 부른 다음 왕실의 어른들이 면접을 보았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렇게 부마나 후궁 간택일 때는 한 번이나 두 번의 면접을 거쳐 끝내는 경우가 많았는데 왕이나 세자의 정실부인을 뽑는 간택을 할 때는 초간, 재간, 삼간의 3단계를 모두 통과한 한 사람이 비로소 배우자로 뽑히게 되었죠.

게다가 최대한 공정하게 평가하기 위해 처자들은 모두 같은 복장을 입혔습니다.

초간택 때는 노랑 저고리에 다홍치마를 그리고 재간택, 삼간택으로 올라갈수록 옷에 치장하는 장식품이 추가되었죠.

 

초간택의 경우에는 30여 명의 양반집 처자를 모집해서 그들을 궁궐 내에 넓은 마루에 오라고 한 뒤 각자 있는 자리 앞에 자신이 어느 집안이고 아버지가 누군지 적으라 했으며 그러고 나서는 각각에게 다과상을 주었습니다.

그러면 왕과 왕비가 발을 친 뒤쪽에서 처자들이 다과상을 대하는 행동거지를 관찰했죠.

 

그리고 궁녀들은 그녀들 바로 앞에서 관찰했는데 이런 식으로 참한 처자 6~7명을 뽑았고 재간택에서는 3명을 그리고 삼간택에서 마지막으로 한 명을 뽑았습니다.

재간택과 삼간택에서는 처자들의 덕이나 복, 마음 씀씀이, 단정하고 어진 외모 그리고 지혜 등을 보았죠.

 

야사에는 영조가 다시 왕비를 뽑는 간택을 할 때 흥미로운 일화가 있는데요.

삼간택으로 뽑힌 3명의 처자들에게 영조가 묻기를 "어떤 물건이 가장 깊은가?" 라고 하자

한 명은 산이 깊다고 하고 한 명은 물이 깊다고 했으며 마지막 한 명은 사람의 마음이 가장 깊다고 했죠.

 

그러자 영조가 그 연유를 물으니 마지막 처자가 하는 말이 "다른 물건의 마음은 예측할 수 있지만 사람의 마음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영조가 다시 세 명의 처자에게 어떤 꽃이 가장 좋냐고 물으니 한 명은 복사꽃이, 한 명은 모란꽃이 좋다고 했는데 마지막 처자는 목화가 가장 좋다고 대답했죠.

이에 영조가 또다시 그 이유를 물으니 그녀는 "다른 꽃은 일시적으로 좋지만 목화는 옷으로 만들 수 있으니 백성들에게 입혀 따뜻하게 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굉장히 똑똑하고 재치 있는 답변을 한 것 같은데요.

이 대답에 만족한 영조는 세 번째 처자를 왕비로 삼았는데 그녀가 바로 정순왕후라고 하죠.

어쨌든 이렇게 결정된 처자는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았습니다.

바로 별궁으로 데리고가 장차 왕비 또는 세자빈이 될 테니 그에 맞는 교육을 시켰죠.

 

왕실에서 이렇게 간택을 할 때는 집이 명문가이긴 하지만 아버지의 지위가 그렇게 높지 않은 집의 처자를 선호했습니다.

왜냐하면 왕비가 된 딸의 권력을 등에 업고 권세를 휘두를까 봐 경계를 했던 것이죠.

 

그래서 영조는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던 혜경궁 홍씨를 며느리로 삼았고 흥선대원군은 가문은 명문가였지만 전혀 힘이 없었던 민씨가문의 명성황후를 고른 것 또한 이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리고 선조도 당시 권력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던 김제남의 딸인 인목왕후를 아내로 삼은 것도 같은 맥락이죠.

 

하지만 결국에는 이런 정치적인 요인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고 오히려 크게 작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왕의 입장에서는 왕비나 세자빈 자리에 힘이 있는 유력인사의 딸을 앉히면 그 집안과 정치 파트너가 되어 그만큼 반대파를 견제할 수 있기도 했고 신하들 입장에서는 어쨌든 자신의 딸이나 자신이 속해있는 당파의 사람의 딸이 왕비나 세자빈이 되면 권력을 거저 얻는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나중에는 각 당파에서 미는 후보들 간에 치열한 경쟁이 될 수밖에 없었죠.

 

오죽하면 조선 후기 노론의 제1 당론이 '국혼을 놓치지 않는다' 였을 만큼 왕실과의 결혼을 통한 권력 유지는 불가피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실제로 조선 후기의 거의 모든 왕비는 노론 집안의 딸이었고 나중에는 간택이 형식적이게 되어버렸으며 세도가의 딸을 왕비로 선택하는 지경에 이르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철종의 왕비를 뽑을 때 순원왕후가 노론, 소론 가릴 거 없이 다 후보자를 내고 그리고나서 제대로 간택을 하자고 이야기했지만 결국에는 안동김씨 가문의 철인왕후 김씨가 중전이 되었습니다.

순조의 아내였던 순원왕후 김씨, 헌종의 아내였던 효현왕후 김씨에 이어서 철종의 아내도 안동김씨 가문에서 왕비를 배출한 것이죠.

 

그런데 간택에서 떨어진 처자들은 다른 곳에 시집을 갈수 없었고 평생을 처녀로 살아야 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이건 사실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처녀단자를 올린 처자들 30여 명 모두 대단한 가문의 딸 들이었고 간택에 떨어졌다고 해서 처녀로 살았어야 한다면 그 누구도 처녀단자를 올리려 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 가문들 역시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간택에 참여했던 처녀들 또한 다른 집에 시집가서 아들딸 낳고 잘 먹고 잘 살았다고 하죠.

 

왕실의 위엄 때문에 실시했던 간택이지만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세도가들의 권력 유지를 위한 도구로 사용되고 유명무실해진 것을 보면 한편으론 참 아쉬운 제도이긴 했던 것 같네요.

 

조선시대, 왕자, 공주들의 배우자를 찾기 위한 제도였지만 나중에는 권력가들이 다 해쳐먹기 위해서 이용하기 딱 좋았던 제도 간택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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