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속이라는 신하는 겁대가리 없이 태종 이방원, 그가 가장 총애하던 후궁 신빈신씨 그리고 사랑스런 정신옹주를 뒤에서 능멸해버린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당연하게도 그 대가는 정말 엄청나게 커서 명문가문이 거의 멸문 당해버릴 정도의 죄를 받게 되었죠.
이 모든게 정신옹주와 혼례 문제인 간택 때문이었는데요.
때는 조선시대, 명문가 집안의 한 남자가 일명 킬방원이라 불리는 태종을 개무시하다 집안이 완전 풍비박산 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사실 직접적으로 태종의 면전에서 그런건 아니었지만 태종과, 태종의 후궁, 그리고 옹주까지 모욕을 한 사건이었죠.
목숨이 여러 개라도 부족할 것 같은 이 인물은 바로 '이속' 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명문가이던 연안이씨 가문의 사람인데요.
그런 명문가 집안의 양반 이속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당시 태종에게는 특별히 총애하던 한 후궁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바로 신빈 신씨로 왕비였던 원경왕후를 모셨던 여종이었으나 태종이 첫눈에 반해 후궁이 된 것이죠.
태종과 신빈신씨 사이에서 자식만 2남 7녀를 두었는데 태종의 후궁들 중 가장 많은 자식을 낳은 사람이 바로 신빈신씨였고 태종이 가장 총애하던 후궁이라는 것을 자식 수가 증명해 주고 있는 것 같은데요.
신빈신씨와의 자식들 중 장녀가 바로 '정신옹주' 였죠.
시간이 흘러 정신옹주가 시집갈 시기가 되자 태종은 지화라는 점쟁이에게 정신옹주와 궁합이 잘 맞고 사주가 좋은 남자를 알아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지화는 지체 높은 명문가 집안을 돌아다니며 그 집에 아직 장가를 가지 않은 남자들의 사주를 보면서 정신옹주와 잘 맞을 만한 남자를 찾고 있었죠.
그러다 당시 최고의 명문가이던 이속의 집에도 당도하게 됩니다.
지화는 이속에게 정신옹주의 남편감을 찾으러 왔다고 하니 이속이 갑자기
"내 아들을 몸종의 딸에게 장가보낼 순 없다. 내 아들은 죽었다. 그런데 만약 상대가 정혜옹주라면 살아있을 수도 있다" 라는 말을 한 것이죠.
바로 정신옹주가 원경왕후의 여종이었던 신빈신씨의 소생이라는걸 대놓고 비꼬면서 그런 비천한 몸에서 나온 여자에게 자신의 아들을 장가보낼 수 없다고 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신옹주는 아버지인 태종이 왕이니 아무리 천한 신분인 신씨의 소생이라도 당연히 왕족이었죠.
그리고 이속이 정혜옹주는 괜찮다고 한 이유는 그녀는 태종의 후궁 중 의빈 권씨의 소생이었는데 의빈 권씨의 아버지 권홍은 당시 명문가였던 안동권씨 가문의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속은 춘천의 수령으로 있을 때 태종 이방원에 의해 그가 살짝 억울할 수도 있게 귀양을 간 적이 있었기 때문에 태종에게 좋은 감정이 있지는 않았었죠.
어쨌든 아무리 이속이 태종을 좋지 않게 생각하고 그의 집안이 굳이 왕족과 혼례를 치루지 않아도 전혀 아쉬울 것 없는 당시 최고의 명문가이긴 했더라도 그래도 왕족이고 정중하게 거절해도 될 일을 쓸데없이 킬방원과 그가 사랑하던 신빈김씨 그리고 둘의 사랑의 결실인 정신옹주까지 대놓고 개무시하고 모욕적인 말을 할 필요는 전혀 없었죠.
심지어 당시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고 외척인 처남들까지 모조리 죽인 무시무시한 태종을 상대로 그런 말을 해댄 건 너무나도 무모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보고받은 태종은 격분하며 이속에게 곤장 100대를 때리고 서인으로 강등시켜 버렸습니다.
킬방원 치고는 정말 약한 처벌을 했다 싶을 수도 있는데 사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이속을 제대로 조지기 시작하죠.
태종이 이런 처분을 했다는 소식을 들은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는 이속의 죄에 비해서 처벌이 너무 약하다며 상소를 올렸고 도승지였던 조말생은 이속의 죄는 대역죄에 해당하니 삼족을 멸해야 한다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연이라는 신하는 그자의 목을 베는 것이 합당하다고까지 했지만 인자하고 자비로우신 태종은 그럴 순 없다 하면서 살짝 발을 빼는 것이었죠.
그러자 하연은 그러면 먼 지방으로 귀양을 보내라고 했지만 태종은 여전히 물러서며 또 그럴 순 없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더 큰 죄를 물어야 한다는 신하들의 상소에 결국 이방원은 이속의 전 재산을 몰수했고 먼 곳으로 유배를 보내버렸죠.
하지만 이후에는 의정부와 육조에서 난리가 납니다.
이 처분 또한 너무 가볍다는 것이었죠.
이속이 지은 죄는 왕과 왕실을 모욕한 것뿐만 아니라 왕의 명을 거역했고 왕명을 수행 중인 사람에게 거짓말을 했으며 또 왕녀에게 감히 천한 신분이니 많이 한 것은 대역죄에 해당하니 참수형에 처해야 마땅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자비로운 태종은 그럴 순 없다고 신하들의 상소를 거절했지만 계속 이어진 신하들의 상소에 결국에 태종은 두 손 두발 다 들게 되면서 또 어쩔 수 없이 이속을 관노로 만들어 버렸고 이속의 아들들이 평생 장가를 못 가도록 그들에게 금혼령을 내려버렸죠.
하지만 신하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속이 과거에 한 짓들까지 끄집어내 꼬투리를 잡기 시작했는데요.
그의 5촌 당숙이던 김사문의 집안에 초상이 났을 때 김사문과 이속, 누나의 딸 하옥생 그리고 하옥생의 남편인 유복중 이렇게 넷이서 술을 마신적이 있는데 이를 꼬투리 잡아 김사문과 하옥생이 바람을 피웠다며 누명을 씌운 것이죠.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억지였지만 김사문과 하옥생을 잡아들여 심문을 했습니다.
당연히 두 사람은 넷이서 술 마신게 전부라고 하면서 억울해 했지만 결국 태종은 김사문은 상중에 술을 마셔 불효했다는 이유로 곤장 80대를 그리고 하옥생은 남녀칠세부동석을 어겨 풍기를 문란케한 죄로 곤장 80대를 맞아야 했습니다.
사실 태종 이방원의 성격으로 보아 이속을 곤장 몇대로 처벌하고 끝내려던 것은 아니었을거 같은데요.
당시 왕이 처벌을 내릴 때 먼저 일부러 약한 처벌을 내려 자신이 자비롭고 관대한 왕임을 먼저 선보이고 그리고나서 신하들이 더 큰 벌을 내리라고 상소를 올리고 난리를 치면 그때서야 신하들에게 못 이기는 척하고 큰 형벌을 내리는 것이 왕의 중요한 정치 스킬 중 하나였죠.
태종은 처남인 민씨 4형제를 죽일 때도 이러한 방법을 사용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발 빠르게 움직인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바로 윤향이라는 인물이었죠.
당시 윤향은 병조판서와 호조판서를 역임했던 중신이었지만 왕명을 거역했다는 죄로 유배를 간 상태였는데 정신옹주를 제발 자신의 며느리로 맞게 해달라고 하며 아들 윤계동의 사주단자를 퀵서비스로 태종에게 보낸 것이었습니다.
이속 때문에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났던 태종은 당시 명문가였던 윤향의 태도를 보고 매우 기뻐하며 윤향의 유배를 바로 풀어주었고 그렇게 그는 형조판서로 화려하게 복귀할 수 있었으며 그의 아들 윤계동은 정신옹주와 결혼하며 부마가 되었죠.
태종은 이 정신옹주 결혼 사건을 계기로 간택 제도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이 사건은 마무리되는가 싶었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죠.
태종이 왕위에서 물러나고 세종이 즉위하자 신하들은 또다시 이속의 일로 들고 일어나게 되는데요.
이속이 노비로 사는것도 말도 안된다며 죽여야 한다고 한것입니다.
하지만 세종은 이미 이속은 패가망신한 상태이니 굳이 죽일 필요까지는 없다 생각했고 신하들의 상소를 물리쳤죠.
이후 이속이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죽었는지는 아무 기록도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불행 중 다행히도 이속의 아들에게 처해진 금혼령을 세종의 명으로 풀어주었는데요.
그 이후 이속의 아들들은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아 대가 끊기고 멸문에 처해지는 비극을 당하지는 않았죠.
실록에 따르면 이속은 금수저 출신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성격이 괴팍하고 오만해서 주변에 적이 많았다고 합니다.
만약 그냥 정중히 거절했으면 아무일도 없었고 계속해서 잘먹고 잘살았을텐데 다 그럴만한 사람이 그런거 같네요.
더러운 성깔도 부릴데 부려야지 킬방원한테 부리다 결국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버린 이속과 정신옹주 간택 사건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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