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경왕후는 태종 이방원의 정실부인이었는데요.
이방원이 세자도 아니었던 시절 그녀의 온 가족이 목숨을 걸고 든든한 후원을 했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왕이 된 이후에는 은인이었던 그녀의 일가족을 멸문시켜버리고 마는데요.
오늘은 이 여인의 집안 전체가 남편을 도와 그를 왕으로 만들었지만 왕이 된 남편에 의해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하게 된 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남편을 왕위에 올릴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지만 집안이 몰락하는 아픔을 겪은 여인은 바로 원경왕후 민씨인데요.
그녀의 남편이 그 유명한 태종 이방원이죠.
민씨는 고려 공민왕 시절인 1365년 7월에 아버지 민제와 어머니 송씨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민제의 가문이었던 여흥민씨는 당시 고려에서 굉장히 대단한 가문 중 하나였는데요.
사실 북방을 지키던 이성계 가문보다도 고려의 중심 권력에 훨씬 가까운 명문가였습니다.
민씨는 어릴 적부터 굉장히 똑똑하고 대담한 성격을 지녔으며 외모도 아름다웠던 모든걸 다 갖춘 여장부 스타일이었죠.
아버지 민제는 당시 예문관 제학이었는데 과거에 급제한 이방원이 성균관에 입학하면서 그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방원의 스승이 된 민제는 그의 명석함과 문무를 겸비한 이방원을 마음에 들어 했고 그렇게 자신의 딸인 민씨를 소개시켜주며 둘은 결혼을 하게 된 것이죠.
그렇게 시간이 흘러 1392년 시아버지였던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게 되면서 남편 이방원은 정안군으로 책봉되었고 자신은 정녕옹주에 봉해졌습니다.
하지만 비극의 시작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남편 이방원의 이복동생이던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면서 벌어지게 되는데요.
신덕왕후와 정도전의 입김에 장성한 여러 왕자들을 제치고 11살 밖에 되지 않은 이방석이 세자가 되자 남편 이방원은 크게 낙심하고 말았죠.
이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민씨도 시아버지의 이러한 판단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조선 건국에 많은 힘을 실었던 신의왕후의 아들들은 크게 반발하면서 이방석을 지지하던 신덕왕후 그리고 정도전 일파와 대립하게 되었죠.
그러던 중 1398년 정도전은 계속 신의왕후의 아들들이 힘을 갖고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사병을 혁파하기로 마음을 먹고 공신과 종친들 그리고 왕자들이 개인적으로 모아두었던 사병과 무기들을 강제로 빼앗으면서 그 이후로는 사병을 모으는 것도 무기를 지니고 있는 것도 금지시켜버렸습니다.
하지만 민씨는 훗날 분명히 큰일이 벌어질 것을 예측하고 나중에 있을 변란에 대비해 많은 무기들을 집안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죠.
시간이 흘러 1398년 8월, 정도전과 그의 무리들은 태조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이유로 왕자들을 궁으로 불러들였는데 뭔가 수상하다고 느낀 민씨는 당시 임신 중이었던 것을 이용해
갑자기 배가 아프다면서 남편 이방원을 집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민씨는 동생 민무구, 민무질과 함께 남편 이방원에게 정도전 일파를 제거해야 한다고 부추기게 되었고 그렇게 처남들과 이방의, 이방간 등 여러 왕자들과 함께 군사를 일으키면서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게 되었죠.
이때 민씨가 숨겨놓았던 많은 무기들이 사용되면서 1차 왕자의 난을 이방원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정도전과 남은, 심효생등을 모조리 도륙해버렸으며 이복동생이던 이방번과 세자 이방석까지 죽여버렸죠.
이에 시아버지 이성계는 자신의 아들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살육을 벌인 것에 너무나도 큰 충격을 받게 되었고 결국 모든걸 포기하면서 둘째 아들인 이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1400년 1월이 되자 정종의 후계자 자리를 두고 남편 이방원과 아주버님이던 이방간이 또다시 결전을 벌이게 되면서 결국 회안군 이방간이 패배하여 토산으로 유배 되었고 그렇게 2차 왕자의 난도 끝이나게 되었죠.
2차 왕자의 난 때는 남편의 말이 홀로 집으로 돌아오자 남편 이방원이 죽은 줄 알고 자신도 창을 들고나가 싸우다 죽겠다고 난리 친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민씨는 여성이었지만 기개도 대단했었죠.
그렇게 2차 왕자의 난도 이겨내면서 남편 이방원은 세자로 책봉되었고 민씨 또한 세자빈에 책봉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결국 정종은 상왕으로 물러나면서 남편 이방원이 조선 3대 왕, 태종으로 즉위하게 되었죠.
그녀가 제때 기지를 발휘한 덕분에 남편이 왕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 것입니다.
또한 자칫 일이 잘못됐으면 민씨의 친정이었던 여흥 민씨 가문도 역모죄로 몰려 몰살될 수도 있었지만 사위였던 이방원을 물심양면으로 도와 결국 그 모든걸 이루어 낸 것이었죠.
하지만 남편이 왕이 된 후부터 둘 사이는 점점 틀어지기 시작하는데요.
태종이 후궁을 들이는 문제로 자주 다투게 된 것입니다.
1401년, 태종이 한 궁녀를 예뻐하자 원경왕후 민씨는 그 궁녀를 따로 불러 온갖 트집을 잡아가며 못살게 굴기도 했고 그녀가 왕비가 되기 전 거느리던 여종이 태종의 아이를 임신하자 그 여종을 감시하는 동시에 그녀의 형제들과 함께 여종의 출산을 방해하고 괴롭히기도 했습니다.
훗날 그 여종은 아들 경녕군을 낳았는데 계속해서 그들을 핍박하며 이 두 모자를 죽이려고까지 했죠.
게다가 태종이 의빈권씨를 새로운 후궁으로 간택하자 원경왕후는 태종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며 "제가 전하와 함께 그 어려운 일들을 같이 헤쳐 나왔는데 저한테 어찌 이러실 수 있으십니까?" 라고 하면서 울고불고 난리 쳤고 심지어 식음을 전폐하고 병석에 드러눕자 결국 태종은 의빈권씨와의 가례식을 중지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태종이 다른 후궁을 들이거나 다른 여자를 예뻐하기라도 하면 난리를 치다보니 태종은 원경왕후 민씨의 질투가 너무 심하다며 폐출까지 시키려고 했죠.
태종은 왕위에 오른 뒤 수많은 후궁과 첩을 두기 시작했고 총 9명의 후궁들 사이에서 12남 17녀의 자식을 얻었습니다.
그러니 원경왕후 민씨와는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겠죠.
그만큼 둘 사이는 잦은 부부싸움으로 인해 점점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좀 아이러니한 점은 태종과 원경왕후는 금슬이 굉장히 좋기는 했는데요.
원경왕후의 나이가 40대가 지난 이후에도 태종과의 사이에서 3명의 자식을 낳았을 정도였죠.
하지만 원경왕후 민씨와 그녀의 가문은 태종 이방원으로 인해 더욱더 잔인하고 무서운 죽음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게 되는데요.
남편 이방원이 왕이 된 후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공신이자 권세가 하늘을 찌르던 원경왕후 민씨의 동생들인 민무구와 민무질을 엄청나게 경계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세자였던 양녕대군과도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본 태종은 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민씨 형제가 외척이 되어 강한 권세를 휘두르면서 나라를 마음대로 쥐락펴락할 것이라 생각했고 아내 민씨의 동생들이었지만 가차 없이 그들을 유배 보내버렸으며 이후 자결하라는 명을 내려 죽여버렸죠.
그러자 그녀의 아버지 민제는 화병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고 거기다가 더 동생이던 민무휼, 민무회 형제 역시 비슷한 이유로 유배를 갔다가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또한 어머니 송씨는 아들 네 명이 사위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걸 모두 지켜보고 남편마저 화병에 사망한걸 본 뒤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남편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헌신하던 모든 친정 가족들이 순식간에 남편에 의해 모조리 죽임을 당한 것이죠.
그리고 그녀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세자 양녕대군이 개망나니짓을 하고 다니자 태종은 그를 폐세자 하고 난 뒤 멀리 유배를 보내려고 했는데 이에 원경왕후는 눈물 흘리며 가까운 곳에 보내달라 청했고 그렇게 결국 경기도 광주로 보내졌습니다.
이후 1418년, 아들 충녕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그녀는 왕대비가 되었고 2년 후인 1420년 7월, 수강궁 별전에서 56세의 나이로 우여곡절 많고 한 많던 생을 마감하게 되었죠.
당시 태종은 원경왕후의 장례를 간소화하여 세종에게 상복을 12일만 입으라고 했지만 세종은 다른 건 태종의 말을 다 따를 수 있지만 그것만큼은 못 따르겠다고 하면서 원경왕후가 선릉에 안장될 때까지 계속 상복을 입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2년 후 남편 태종도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그녀의 무덤 옆에 태종도 묻히게 되었죠.
원경왕후는 신하들 앞에서도 태종 이방원과 싸우기도 하는 등 성격 또한 굉장히 파워풀하고 호쾌한 여장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녀의 총명한 기지로 인해 이방원이 몇 차례의 위기에서도 탈출할 수 있었고 남편을 왕위에 오를 수 있게 했던 킹메이커 역할도 톡톡히 해냈죠.
하지만 그녀의 친정 가문이 몰락해버린 큰 아픔도 있는 불쌍한 여인이기도 합니다.
한편으론 정말 강인하고 위대한 여인이었지만 한편으론 너무나 불쌍하고 불행한 삶을 살았던 원경왕후 민씨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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