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역사 탐구

인목왕후. 광해군 때문에 아비와 8살의 핏덩어리 아들을 잃었어야 했던 진짜 비운의 어머니

by 사탐과탐 2021. 11. 26.
반응형
어린나이에 인목왕후는선조의 간택을 받아 왕후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너무 어리고 처세술이 없어 비참한 인생을 살았어야 했는데요 광해군 때문에 아비와 8살 핏덩어리 아들인 영창대군을 잃게 되었던 것이죠.

 

클릭하시면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1600년, 선조의 정비이던 의인왕후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선조는 2년 후인 1602년 새로운 왕비를 들이게 되었습니다.

당시 선조는 51세였고 새로들인 왕비는 19세로 김제남과 그의 부인이던 노씨의 딸 인목왕후였죠.

법적으로는 아들이었던 광해군보다 9살이나 어린 새어머니였습니다.

 

보통 왕비 간택을 하면 13세에서 15세 정도의 어린 여자가 간택이 되었고 양반집의 딸들도 대부분 저 정도 나이에서, 늦어도 17~18세에는 시집을 다 갔었기 때문에 인목왕후가 왕비로 간택되었을 때는 이미 상당히 늦은 나이였죠.

하지만 이때 선조의 나이가 51세였고 하루라도 빨리 적자를 보아야 하는 나이였기 때문에 이미 월경이 시작되었고 바로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여성을 골랐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또한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은 당파싸움에도 별 관심이 없는 인물이었고 연안 김씨 가문 자체도 완전히 힘을 잃어 몰락해가는 가문이었기 때문에 외척이 된다고 해도 크게 세도를 부리거나 하지 않을 확률이 높았기에 인목대비를 간택하는데에 선조의 의중이 많이 작용했다고 하죠.

당시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 분조를 맡겨놓았던 선조는 왕위에서 밀려날까 불안해 했는데 그로 인해 엄청 자주 양위 소동을 벌이기도 했었죠.

그렇게 아들인 광해군을 견제하던 선조와 인목왕후와의 사이에서 적자인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광해군과의 관계는 걷잡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대부분의 조정 당파들은 광해군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세자 자리를 위협받지는 않았으며 영창대군의 나이가 너무 어렸고 선조가 영창대군을 세자로 올려야 하나 하고 잠깐 방황하긴 했지만 선조가 죽기 며칠 전 광해군이 정식 후계자라는 교지까지 영의정 유영경에게 건네기도 했죠.

 

아무튼 19세의 나이에 왕비가 된 인목대비는 눈치 없는 행동을 자주 보였는데요.

선조가 죽기 전 영창대군을 낳고 나서 선조에게 왕자를 세자로 부를 건지 대군으로 부를 건지 물어보기도 했으며 영창대군의 옷을 마치 세자처럼 입히는 무시무시한 과오도 저질렀죠.

 

또한 광해군 처소를 담당하던 100여 명의 궁녀를 빼내와 자신의 처소에서 시중을 드는 궁녀로 만들어 버렸고 중궁전 소속 나인들은 인목왕후가 입궁한지 얼마 되지 않아 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는 걸 이용해 온갖 행패를 부리기도 했으며 심지어 선조가 영창대군을 예뻐하고 광해군을 미워하는 태도를 보이자 광해군 앞에서 오만방자한 행동을 하는데도 이를 벌하거나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거기다가 친정아버지 김제남과 함께 재산을 축적하는데 온 힘을 다했는데 인목왕후는 자신의 재산뿐만 아니라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의 재산, 제안대군의 재산까지 영창대군이 물려받으면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재산을 모았죠.

그 정도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인목왕후가 모은 재산이 나라에 모인 것보다 더 많았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재산을 모으는데 열과 성을 다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선조가 쓰러지고 죽을 때가 되어오자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라는 지시를 내렸는데 영창대군을 세자 또는 왕위로 올리려던 영의정 유영경은 선조의 이 명령에 극렬히 반대를 하면서 선조의 교지를 숨기기까지 하지만 인목왕후는 선조의 전교를 따라야 한다고 하면서 이 일을 마무리 지어버렸습니다.

결국 선조가 세상을 떠나고 바로 다음날 광해군을 즉위시켜버리기까지 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사실 당시 이미 정해져있던 세자를 다른 사람으로 교체한다는 것에 대해 신하들이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은 자칫하면 역모로 비춰질수 있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는데 유영경이 이런 일에 대해 말을 꺼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세자를 광해군에서 영창대군으로 교체하려던 선조의 확실한 움직임이 있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걸 알 수 있죠.

 

심지어 광해군도 자신의 친아들인데 명나라의 고명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미 정해놓았고 많은 신하들의 지지도 받던 세자 자리를 뒤흔들었을 뿐만 아니라 고작 2살 밖에 안된 영창대군을 세자로 앉힐려고 한 것도 말이 안 되었으며 이런 어처구니없는 짓을 한 것도 선조가 유일하고 그만큼 사태가 심각했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 선조에게 엄청난 견제를 받고 2살밖에 되지 않았던 영창대군도 신경 쓰이던 광해군은 결국 왕이 되었는데요.

그렇게 어머니뻘이던 인목왕후는 소성대비가 되었죠.

눈치가 지지리도 없던 인목왕후는 대비가 된 이후에도 왕이었던 광해군의 심기를 건드리는 행동을 많이 했는데요.

 

사실 영창대군은 아직 너무 어려 대군으로 책봉 받지 못하고 있던 상태였죠.

광해군이 왕이 된 지 3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영창대군으로 봉해졌습니다.

이때 광해군은 영창이라는 군호가 전국 옥새에 들어간 글자이니 군호를 고쳐야 한다고 했지만 대비이던 인목왕후는 선조의 뜻이라며 격렬히 반대를 했고 그렇게 결국 영창대군이 된 것이죠.

 

거기다가 계속해서 영창대군의 옷을 세자처럼 입히고 행동거지도 마치 세자처럼 시키기도 하는 등 광해군이 보기에는 선 넘는 행동을 지속적으로 해댄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1613년 집권세력이던 대북파는 광해군에게 위협적인 반대세력을 하나하나 제거해나가기 시작했는데요.

제일 먼저 소북파의 영수이던 유영경을 제거했고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까지 죽임을 당했으며 그리고 영창대군 마저 유배에 처해지고 말았습니다. (계축옥사)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인목왕후는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로 왕대비가 되다 보니 정치적 영향력은 굉장히 미비했는데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아버지가 죽임당하고 아들이 유배 가는 걸 손놓고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죠.

거기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자신의 폐모론까지 돌게 되었는데 다행히도 폐위 교지까지는 내려지지 않았지만 대비자리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딸 정명공주와 함께 서궁에 강제로 감금된 채 살게 되었습니다.

 

광해군에 의해 아버지는 죽임을 당하고 아들도 유배 갔다가 끔찍하게 죽임을 당했으며 어머니는 제주 관아의 노비가 되어버렸으니 인목왕후가 광해군에게 가진 증오심은 엄청나게 커져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죠.

인목왕후와 정명공주는 서궁에서 너무나도 비참하게 살았는데요.

생필품이나 음식물 등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해 의식주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또한 지속적으로 감시를 받으면서 살았는데 한 궁녀가 외부와 연락을 했다는 이유로 형벌을 받기도 했을 정도로 궁녀들과 상궁들이 위협을 당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암살당할 뻔한 적도 있었죠.

그만큼 인목왕후는 바람 앞에 촛불과 같이 언제 죽임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굉장히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능양군이 인조반정을 성공시키며 서궁에서 드디어 빠져나올 수 있었는데요.

반정군을 본 인목왕후는 광해군이 딸인 정명공주마저 죽이기 위해 보낸 군사인 줄 알고 공주는 이미 죽어서 없다 라고 말했다고 하죠.

그러나 능양군이 모습을 보이자 그제서야 반정이 사실인걸 믿었고 그렇게 다시 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인조반정으로 인해 광해군은 인목왕후 앞에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폐위 교지를 받았고 왕위에서 폐위되고 말았죠.

이 교지를 보면 광해군에 대한 인목왕후의 증오심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는데요.

광해군을 폐주(廢主)라고 부르지도 말라고 하면서 폐인(廢人)이라 불렀고 이혼(광해군의 이름)과 아들 이지의 머리를 잘라 가져오라고 하며 그 머리의 살점을 씹으면서 전교를 내리겠다고 말했을 정도이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렇게 해도 분이 안 풀렸는지 자신이 직접 가서 그들 부자의 목을 베어 원수를 갚겠다고 하면서 자신이 서궁이 유폐되고 나서도 끝까지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오늘을 위해서다 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결국 광해군은 유배를 가게 되었는데요.

인목왕후는 제발 먼 곳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죠.

 

훗날 광해군의 아들이던 폐세자 이지가 유배지에서 도망치다 붙잡히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인목왕후가 강력하게 이지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삼사와 논의를 거쳐 결국 이지에게 자결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인조반정이 있고 3일 만에 더 이상 혼사를 늦출 수 없었던 딸 정명공주를 21살의 늦은 나이에 시집보냈고 인조 2년인 1624년에는 대왕대비가 되었죠.

그로부터 8년 후인 1632년 8월, 인목왕후는 47세의 나이로 그렇게 증오하고 죽이고 싶어 하던 광해군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왕비가 되어 친정 집안도 힘이 없었던 탓에 왕비일 때도 대비가 된 이후에도 힘이 없었던 인목왕후는 눈치도 없고 처세술도 미흡한 탓에 결국 집안이 멸문을 당하고 자식도 끔찍하게 죽게 되는 엄청난 비극이 초래되고 말았죠.

애초에 선조가 영창대군을 광해군 견제 수단으로 사용하고 세자를 바꾸니마니 하지만 않았어도 그냥 왕실 어른으로서 대접받으며 편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한편으론 안타깝기도 하네요.

 

왕비로써 거친 권력 다툼을 싸워나가기에는 너무나도 평범했던 왕비 인목왕후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