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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조선의 폭군 연산군과 광해군의 아들들인 세자 이황, 이지의 비참한 최후

by 사탐과탐 2021.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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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폭군 연산군과 광해군에게도 당연히 아들들도 있었고 세자도 있었습니다.
반정 이후 왕과 세자 자리에서 폐위되고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데요.
연산군의 세자 이황과 광해군의 세자 이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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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반정으로 인해 왕위에서 강제로 끌어내려져 실록에도 왕으로 기록되지 않은 두 임금이 있었죠.

그들은 바로 연산군과 광해군입니다.

 

이들에게도 아들은 있었고 세자도 있었는데요.

연산군의 세자는 바로 폐세자 이황이고 광해군의 세자는 폐세자 이지입니다.

이 두 사람은 아버지 한번 잘못 만나서 이른 나이에 일찍 요절했는데요.

두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연산군의 아들인 이황은 연산군과 폐비 신씨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당시에는 왕자들을 궁 밖에서 키우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황은 어린 시절부터 궁 밖에서 지냈는데요.

 

연산군은 어릴 적 어머니였던 폐비 윤씨가 사사된 후 성종의 친형이던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의 손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인지 연산군은 폭정을 일삼을 때도 박씨는 굉장히 후하게 대했었죠.

 

그런 좋은 기억이 남아있어서인지 아들인 이황도 이 승평부대부인 박씨에게 양육을 맡겼습니다.

이후 1502년 5살이 되자 세자가 되었으며 어릴 적부터 남달라 할아버지 성종의 기상과 풍모를 닮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또한 그는 어릴 적부터 성품이 어질고 차분하며 총명했기 때문에 많은 신하들은 '세자가 다음 왕이 될 때까지만 버티자'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황은 공부도 좋아해서 연산군의 폭정에 고생하던 신하들의 기대를 한 몸에 다 받고 있었죠.

 

야사에 따르면 중종반정을 기획하고 있던 박원종이 중전이던 신씨의 오빠인 신수근에게 반정 참여 여부를 물으니 신수근은 "세자가 총명하니 조금만 더 참고 세자에게 기대를 걸어봅시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 정세명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들여 신랑집에서 신부집으로 예물을 보내 결혼이 성립되었다는 예식인 납징까지 하게 되었죠.

하지만 결혼식을 하기 전에 중종반정이 일어나게 되면서 정식 세자빈까지는 되지 않았고 그녀는 훗날 강희신의 아들과 결혼했습니다.

 

아무튼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연산군은 왕위에서 폐위되었고 세자였던 이황도 폐세자 되었으며 아버지 연산군은 강화도로 자신은 강원도 정선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죠.

그때 이황의 나이는 고작 10살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강화도와 교동도는 왕과 왕족의 유배지로 안성맞춤이었는데요.

그 이유는 바로 한양과 가까워 감시하기가 쉬웠고 섬이다 보니 격리하기도 편했기 때문이죠.

연산군은 훗날 여기서 역질에 걸려 죽게 됩니다.

 

어쨌든 연산군 다음 왕이 된 중종은 조카였던 폐세자 이황의 처분을 유배 정도로 끝내고 목숨은 살려주려 했지만 반정 공신들은 폐주 연산군의 아들들을 살려두면 위험하다며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죠.

 

그러자 중종은 조카들이 모두 어리고 힘도 없으니 차마 죽이지 못하겠다며 대신들의 주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끝 모르는 대신들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결국 조카였던 이황을 비롯해 연산군의 아들들을 모조리 죽이게 됩니다.

폐세자 이황과 창녕대군 이성, 양평군 이인과 이돈수 등은 모두 유배 갔다가 대신들의 강요에 의해 사사되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아무 죄도 없는 어린아이들이 어른들의 싸움에 휘말려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죠.

중종은 이렇게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은 조카들을 안타깝게 여겨 장례라도 성대하게 치러주려고 했지만 반정 공신들의 태도는 냉담했습니다.

신하들은 그들에게 후한 대우를 해줄 필요 없다고 말하며 정해주고 싶으면 관이나 하나 내려주라고 했죠.

 

이 일로 중종은 박원종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고 훗날 박원종이 죽고 난 뒤 그의 하나뿐인 아들이었던 박운이 벼슬을 청탁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그를 외지로 유배를 보내버렸는데 대신들이 공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니 선처해달라고 했지만 매몰차게 거절하여 박운은 결국 유배지에서 사망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아버지가 왕이었지만 폐출되어 자신도 쫓겨난 뒤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왕세자가 또 있었으니 그는 바로 폐세자 이지(李祬)이죠.

이지는 광해군의 장남으로 1598년에 태어났습니다.

그 이후 광해군이 왕으로 즉위한 뒤에 세자가 되었죠.

 

하지만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게 되면서 폐세자 되어 아버지 광해군과 아내였던 세자빈 박씨와 함께 교동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건 인조가 광해군과 폐세자 이지를 죽이지는 않았다는 것인데요.

하지만 그들의 유배지의 거처에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로 담을 친 뒤 그 안에서만 살게 하는 위리안치를 해버린 것이죠.

 

그렇게 감시를 받으며 감금되어 살다가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 등이 일어났을 때 광해군이 다시 왕이 될 것을 염려한 인조는 광해군만 제주도로 유배지를 바꿔 버렸습니다.

이에 이지는 세자빈과 함께 목을 매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지만 다행히 여종이 발견해 살아나게 되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후 그는 가위와 인두를 이용해 땅굴을 파기 시작했는데요.

이지가 직접 땅굴을 파고 세자빈 박씨는 흙을 자루에 담아 방으로 퍼날랐는데 둘이서 그렇게 26일간 파낸 땅굴의 길이가 약 21m 길이에 달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늦은 밤 땅굴을 통해 유배지에서 빠져나온 이지는 미리 사람을 통해 준비해놓았던 배를 찾았지만 찾지 못했고 그렇게 길을 잃고 헤매다 결국 고작 3일 만에 병사들에 의해 다시 붙잡히고 말았죠.

세자빈 박씨는 남편 이지가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습니다.

 

죄인인 이지가 유배지를 이탈해 도망갔다가 잡혔다는 소식에 조정은 발칵 뒤집어졌는데요.

영의정이던 이원익과 인열왕후는 이지를 죽여선 안된다고 극구 반대했지만 눈 돌아간 인목대비는 삼사와 논의를 거쳐 이지에게 자결하라는 명을 내리기로 결정했죠.

 

인목대비가 완전 눈 돌아가서 폐세자 이지를 죽여야 한다고 강경하게 나온 이유는 사실 그녀의 아들인 영창대군이 광해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아버지도 죽었으며, 어머니는 제주 관아의 노비가 되는 등, 집안이 완전 풍비박산 나버렸기 때문이었죠.

그러니 광해군의 아들인 이지를 가만히 둘 순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의금부 도사는 이지를 찾아가 자결을 하라는 명을 전했고 이지는 목욕을 하고 의관을 정비한 뒤 손톱과 발톱을 깎으려 했지만 의금부 도사가 허락하지 않자 나중에 죽은 후에 깎아달라는 말을 남긴 채 방에 들어가 스스로 목을 매 25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현재 폐세자 이지의 묘지가 어디 있는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그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발견되기도 했죠.

이렇게 왕이었지만 폐출된 아버지들 때문에 자식인 이황, 이지 역시도 불행한 삶을 살다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만 것입니다.

 

둘 다 아버지가 폭군이었다는 죄 말고는 그들에게 별다른 죄는 없었을 것인데요.

다만 승자의 기록인 역사에 패자가 되어버린 것이 가장 큰 죄가 아닐까 싶습니다.

조선시대 폭군으로 일컬어지던 연산군과 광해군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폐세자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은, 이황과 이지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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