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녀들은 조선시대 때 새로 만들어진 직업인데요.
천한 신분이던 관비들이 주로 이 의녀를 했었다 보니 나중에는 기생 취급을 하며 심지어 약방 기생이라고도 불렸죠.
너무나도 힘든 삶을 살았던 의녀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조선 선조 때 애종이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방중술과 가무에 뛰어났고 아름다워서 그런지 많은 연회나 잔치에 불려가 높은 직책의 고관대작들과 어울려 당시 최고의 고급 기생으로 치는 여자였죠.
그런데 선조 33년 6월, 중전이 병에 들어 의술이 특출났던 애종을 불러 진료하고자 했지만 애종이 마치 기생이나 창부와 비슷한 행실을 하고 있으니 궐내에 출입을 시키지 말라는 선조의 어명이 내려왔습니다.
최고의 기생으로 치던 여자에게 기생처럼 하고 다닌다는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하면 이 애종이라는 여인의 직업이 기생 같아 보이지만 사실 그녀의 직업은 의녀였습니다.
그녀는 의학과 의술에도 능통했고 다른 의녀들과는 다르게 부인병에도 특출났던 여인이기도 했던 것이죠.
하지만 결국 그녀는 평소 행실을 트집 잡혀 의녀의 명부에서 마저 제적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의녀였지만 어쩌다 이런 기생 같은 삶을 살았던 것일까요?
오늘은 조선시대 때 유일하게 있었던 '의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신라시대나 고려시대 때는 궁녀에 대한 기록은 있지만 의녀에 기록이 전혀 없는데요.
그 이유는 바로 의녀라는 직업이 조선시대 때 처음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시대 때와는 달리 조선시대에는 남녀들의 접촉 조차 기피하던 시대였기에 남자 의사가 양반집의 부녀자 손목을 잡고 맥을 짚거나 몸을 더듬으며 혈자리를 찾고 거기에 침이나 뜸을 놓는 것도 불가능했으며 거기다가 출산을 돕기 위해선 여성 의사가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그동안 여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양반집 여인들이 병에 걸렸는데도 부끄러움에 남자 의원의 진료를 받지 않다가 결국 사망하기까지 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태종은 허도의 건의에 따라 관비들에게 의술을 가르쳐 여인들이 걱정 말고 진료를 받을 수 있게 만든 것이었죠.
처음엔 어린 관비 중 10명의 아이들을 가르쳐 고작 5명만 의녀가 되었지만 의녀를 찾는 여자들이 워낙 많다 보니 계속해서 추가로 인원을 뽑았고 그때부터 대대적으로 의녀들이 양성되기 시작했죠.
여러 번의 시험을 거쳐 실력이 출중한 의녀들만 내의원에 배치되었고 나머지는 혜민서나 활인서, 전의감, 아니면 지방에 배치되어 병든 여성들을 돌보게 했습니다.
관비들에서 차출해 글을 가르치고 의술을 가르치다 보니 시험에서 낙방하는 사람들도 많았는데요.
이런 경우에는 혜민서의 다모로 쫓겨났다가 여전히 성적이 오르지 않으면 다시 관비로 강등되었죠.
하지만 능력이 뛰어나고 모든 시험을 합격한 의녀들은 내의녀로 임명되어 녹봉을 받으며 궁에서 일할 수 있었습니다.
내의녀들은 궁내의 대비나 왕비, 후궁들의 병을 보살폈고 그중 가장 뛰어난 의녀는 어의녀가 되어 왕을 보살폈습니다.
왕의 남다른 총애를 받았던 어의녀 중에서는 실록에 기록이 남은 인물도 있는데요.
그녀가 바로 중종 때의 어의녀 장금이죠.
이 어의녀 장금은 훗날 중종에게 대장금이라는 칭호를 하사받기도 했습니다.
MBC 드라마 대장금은 허구가 많이 들어가긴 했지만 의녀 장금을 모티브로 만든 드라마였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의녀들의 기본 소임은 바로 병자들을 돌보고 간병하는 것인데요.
그 외에도 의녀들은 엄청나게 많은 일을 했습니다.
이런 것도 했나 싶을 정도로 별의 별짓을 다했죠.
일단 모든 처방은 의원이 했고 의녀가 직접 처방은 할 수 없었지만 높은 신분의 여인들이 병에 걸리면 직접 진맥도 하고 시침도 하는 등 의원 노릇은 기본이었고 임산부가 있을 경우에는 조산원 일도 했습니다.
거기다가 의녀들은 여러 범죄수사에도 동원이 되었는데요.
바로 현재의 여경 역할을 한 것이었죠.
여성이 범죄를 저질렀을 때 남자들이 여자의 방이나 몸을 수색할 수가 없으니 이런 것들을 의녀들이 도맡아 했던 것입니다.
또한 임신 여부까지 확인을 했었는데요.
여성 범죄자가 사형을 당해야 하는데 임신을 했을 땐 아이를 낳을 때까지 형 집행을 중지했었기 때문이죠.
또한 궁녀들이 죄를 지었거나 후궁, 또는 어린 왕자들이 죄를 지었을 때 끌어내는 것 또한 의녀들의 일이었습니다.
특히 궁녀들이나 후궁들은 왕의 여자이니 아무나 함부로 대할 수가 없으니 감옥에 갇힌 궁녀와 후궁들에게 음식을 갖다주고 건강 상태를 확인하는 것 또한 모두 의녀의 몫이었죠.
게다가 왕비의 능을 만들 때나 옮길 때도 남자들이 할 수 없었고 왕비와 후궁의 무덤을 지키는 일 또한 모두 의녀들이 도맡아 했으며 후궁이 죽어 그 제문을 읽는 것도 역시 의녀들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양반집끼리 혼인을 할 때 혼수가 너무 많고 사치스러워지자 의녀를 보내 혼수 물품들을 검사하게 했는데 이때는 아무리 지체 높은 양반집 부인들도 의녀들에게 꼼짝할 수 없었고 의녀들이 혼수 품목으로 사용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가려주는 대로 따르는 수밖에 없었죠.
또한 지방으로 내려간 의녀들은 아무래도 한양보다 열악했던 지방의 의술 체계와 구급 지식을 전파하는데 일등공신이 되었고 여러 의술 방면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의관들이나 의원들이 자문을 받던 의녀가 있을 만큼 조선 의술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주 고객은 여성이었지만 그들의 의학지식은 남자, 여자를 불문하고 백성들의 삶에 엄청나게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이죠.
그만큼 의술에 있어서는 전문가로 발돋움해가던 의녀들이었지만 관비들이었기 때문에 천한 신분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의녀들은 성종 말기부터 연산군대에 이르러서는 각종 연회에 불려나가기 시작하는데요.
연산군은 의녀들에게 음악과 춤을 가르치라 명했고 궁내에서 연회가 있을 때는 기생들과 함께 불려와 대신들의 술을 따르고 춤도 추며 음악도 연주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직업보다 신분이 더 중시되던 사회였기에 의녀들이 하는 일에 대한 존중은 눈곱만큼도 없었던 것이죠.
양반들 눈에는 그저 잔치할 때 옆에 앉아서 술 따르는 천한 의녀 계집 정도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 후 중종대에 들어와서도 의녀를 의기(醫妓)라고 부르며 양반들의 연회에도 계속 불려 나갔었는데요.
이에 중종은 더 이상 양반들이 사사로이 의녀를 잔치나 연회에 부르지 못하도록 명하였는데 이미 의녀들을 기생처럼 불러 데리고 노는 것에 맛 들인 양반들은 계속해서 그녀들을 연회에 불렀습니다.
그런 탓인지 조정의 계속된 노력에도 불구하고 양반들이 의녀를 개인적인 잔치에 불러내는 일은 끝내 근절되지 않았죠.
이후 의녀들은 약방기생(藥方妓生)이라고 불리며 양반들은 의녀들을 기생들 중 최고의 기생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시간이 흐르면서 의녀들은 의술을 익히는 것은 소홀히 하고 양반들과 놀아나며 돈과 술에 찌들어 마치 기생처럼 각종 연회에 참여했으며 고관대작이나 그의 아들들을 꼬셔서 팔자 한번 고쳐보려고 부단히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의녀들은 궁녀들과는 다르게 결혼도 할 수 있었는데요.
그렇다보니 의녀들의 최종 목표는 양반의 첩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죠.
그런데 양반들 사이에서는 돈만 밝히는 기생보다 똑똑한 의녀를 첩으로 들이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의녀를 첩으로 삼으려면 여종 한 명을 관비로 넣어야 했고 그러면 의녀는 관비 신분에서 양인의 신분이 될 수 있었죠.
이후에 그녀가 낳은 자식 또한 천민이 아닌 양인의 신분으로 살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반 평민들과도 결혼을 하긴 했는데요.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시대에 의녀들의 신분은 결국엔 관비였고 심지어 보통의 관비들보다 더 천시되었죠.
그 이유는 의녀들의 직업 특성상 남자들과의 접촉이 잦았고 약방기생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사람들의 인식이 별로 좋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결혼을 하더라도 남편에게 구박도 많이 받고 버림받는 일도 허다했죠.
예전 MBC 드라마 허준이나 대장금을 보면 의녀라는 직업이 좋아 보이지만 그들의 삶은 대체적으로 비참했습니다.
비록 의녀들이 했던 일은 굉장히 전문적이고 글을 쓰고 읽을 줄 알 정도로 지식 또한 풍부했으며 지금으로 보면 대단한 일을 하던 사람들이지만 결국 그들의 신분은 비천한 관비 신분이었고 약방기생이라는 꼬리표가 달린 후부터는 더 천한 대접을 받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래서 결혼도 쉽지 않았으며 그나마 양반집 첩으로 들어가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지만 그마저도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처음에 이야기한 애종이라는 의녀도 모든 일에 특출났던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결국 신분의 높은 벽을 넘지는 못했죠.
그렇게 의녀들은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한 채 조선 후기까지 미천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이후 서양의학이 들어오면서 간호사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해졌지만 의녀가 가지고 있던 부정적인 이미지들로 인해 사람들이 간호사가 되기를 꺼려 하기도 했죠.
지금은 그 누구보다 사회에서 인정받는 의사이자 간호사들이지만 당시 여성들의 인권이 매우 낮았고 신분 또한 가장 천한 천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하고 대단한 일을 하던 의녀들이었지만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지 못한 건 정말 애석할 따름이네요.
조선시대에 사람을 살리는 뛰어난 의사였지만 대접은 가장 천한 기생 취급을 받았던 의녀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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