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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양녕대군. 이 여자 저 여자 전부 건드리면서 개망나니 짓을 한 덕분에 세종대왕이 탄생할 수 있었다?

by 사탐과탐 2021.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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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대군은 태종의 장남으로 일찌감치 세자 자리에 올랐었죠.
무탈하게 지냈으면 자동으로 왕이 되었을텐데 이 여자 저 여자 건드리면서 온갖 폐륜짓과 개망나니 짓을 일삼아 폐세자되어 버렸죠.
그 덕분에 충녕대군이 세종대왕이 되면서 오늘날의 한글도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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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앞에서는 아버지고 자식이고 없다' 라는 말이 있는데요.

조선시대와 같이 왕이 나라를 통치하던 시기에는 더욱 심했었죠.

그래서 왕이 된 사람은 자신의 형제들을 무참히 죽일 수밖에 없는 경우도 수두룩했고 뭣도 모르는 어릴 때는 친하게 지냈지만 자라면서 왕위를 물려받기 위해 형제끼리 서로 칼끝을 겨누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야기할 이 인물은 왕이었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동생 복을 타고났는데요.

그는 바로 태종 이방원의 첫째 아들, 양녕대군입니다.

 

태종은 형제들을 죽이고 왕이 된 피도 눈물도 없는 인물이었지만 양녕대군에게는 한없이 무른 아버지였고 어머니 원경왕후는 그가 폐세자가 되기 직전까지 그를 두둔했으며 동생인 세종은 왕위에 오른 후 수많은 신하가 양녕대군을 탄핵하며 죽이라고 했지만 그가 온갖 비행을 저지르고 다녀도 끝까지 눈감아주었죠.

 

오늘은 조선 초 희대의 개망나니이자 한량, 양녕대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는 1394년 태종이 아직 왕위에 오르지 못했던 정안군 시절 군부인 민씨와의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죠.

태종과 원경왕후의 양녕대군에 대한 사랑은 정말로 대단했습니다.

원래 그는 넷째였는데, 위에 형들 세명이 어린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고 그래서인지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살았던 것이죠.

 

그리고 그가 11세가 되던 해인 1404년에 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하지만 양녕대군은 별로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는데요.

스승이던 계성군 이래에게 동생이던 효령대군, 충녕대군과 함께 수업을 들었지만 공부는 하지 않고 바깥 풍경이나 보며 딴생각을 했다고 하죠.

 

또한 공부가 하기 싫어서 계성군과의 수업이 있던 날 개 짖는 시늉을 하면서 미친 척을 했는데 계성군은 그 모습을 보고 놀라며 양녕대군을 잡고 정신 차리라 흔들었지만 계속 개 짖는 소리를 내며 물것처럼 달려들었다가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기도 했습니다.

또 양녕을 잡고 정신 차리라며 흔드니 양녕대군은 그제서야 제정신을 차린듯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척을 했던 것이죠.

 

그리고 그는 동궁 앞 뜰에 새덫을 설치해 놓았는데 새가 덫에 걸리면 수업 중에도 바깥으로 뛰쳐나갔다고 합니다.

이에 계성군은 태종에게 양녕대군에 대한 모든 걸 보고 했는데 태종은 양녕대군을 타이르기도 하고 벌을 내리기도 했지만 고쳐지지 않았죠.

 

그는 점점 자라면서 사냥을 좋아하고 여자를 밝히며 술 먹고 노는 걸 좋아했습니다.

그러자 태종은 공부를 게을리하고 노는 것만 좋아하는 양녕대군을 차마 때리지 못하고 세자궁의 내시이던 '노분'에게 곤장을 때린 적이 있는데 이에 노분은 너무나 억울한 나머지 양녕대군에게 "대체 소인이 누구 때문에 맞아야 합니까" 라고 버럭 한 적도 있다고 하죠.

 

양녕대군은 광대들이나 소인배들, 기생들을 몰래 궁으로 데려와 술 마시고 노는 걸 좋아했는데요.

거기다가 구종수, 구종지, 구종유, 이 삼형제와 궁에 지필을 공급하던 관리인 진포, 악공 이오방, 이법화 등과 가장 친하게 어울려 놀았다고 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들은 밤마다 궁의 담장을 넘고 세자궁에 들어가 밤새도록 노래하고 춤추며 놀았습니다.

어쩔 때는 일반인 복장을 하고 구종수의 집에 가서 밤새 놀았는데 구씨 삼형제는 양녕대군에게 왕이 된 후에도 저희 형제들을 대우해 달라며 대놓고 청탁했다고 하죠.

 

또한 양녕대군의 여성편력은 가히 누구도 쫓아오지 못할 정도인데요.

그가 17살 때 중국 사신을 위한 연회에서 우연히 만난 기생인 봉지련에게 첫눈에 반해 그녀를 궁에 불러들여 뜨밤을 보내기도 했고 평양기생 소앵도 궁으로 불러들여 밤새 놀아나기도 했습니다.

 

이에 태종은 봉지련과 소앵을 내쫓고 관련자들을 모조리 주포해 처벌했지만 아버지에게 삐진 양녕대군은 단식투쟁까지 하면서 반항했다고 하죠.

그런데 이 정도는 태종도 봐줄만 한 정도였지만 훗날 매형인 이백강의 집에서 열린 종친연회에서 끼고 놀았던 기생 때문에 더 큰 문제가 생기는데요.

 

그 기생의 이름은 초궁장으로 양녕대군은 이 초궁장에게도 푹 빠져 몇 달간 뜨겁게 연애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된 점은 바로 초궁장은 사실 상왕이자 큰아버지인 정종이 총애하던 기생이었던 것이죠.

이에 태종은 또다시 양녕대군을 불러 꾸짖었는데 양녕대군은 그 사실을 몰랐다고 했지만 어쨌든 일은 벌어졌고, 큰아버지의 여자를 범한 패륜을 저지른 것이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리고 매형 이백강의 첩이던 기생 칠점생을 궁으로 데려오라 명한 적도 있는데 보다 못한 충녕대군이 형인 양녕대군에게 "친척의 첩을 데려오면 어떡하느냐"라고 말했을 정도였죠.

하지만 별다른 처벌은 없었고 태종에게 심한 꾸중만 들었을 정도였습니다.

 

하루는 양녕대군이 이귀수와 진포라는 소친시에게 (소친시 : 궁중의 잔심부름을 하던 어린 남자아이)

"나에게 바칠 예쁜 여자 어디 없느냐?"라고 묻자 이귀수와 진포는 군기시 관리였던 방유신의 손녀를 추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양녕대군은 방유신의 집을 두 번이나 찾아갔고 결국 그의 손녀를 강제로 겁탈하고 궁으로 돌아왔는데 이 사건 또한 태종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죠.

그러자 분노한 태종은 어린아이였던 이귀수와 진포만 참형에 처했다고 합니다.

양녕대군 때문에 어린아이 둘만 죽어나간 것이죠.

 

하지만 양녕대군이 폐세자 당하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이 된 일은 바로 중추원 부사인 곽선의 첩 어리를 범한 일입니다.

양녕대군과 늘 어울려놀던 악공 이오방이 어느 날 양녕대군에게 "곽선의 첩인 어리의 미모가 엄청 뛰어나답니다" 라고 일러준 것이죠.

 

그러자 양녕대군은 곧장 궁을 뛰쳐나와 곽선의 집으로 향했고 어리는 남편이 있는 몸이라며 양녕대군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했지만 겁을 주며 협박해 결국 궁으로 데려와 그녀를 범했던 것입니다.

 

이에 태종은 구씨 삼형제와 이오방을 참형에 처하고 어리를 궁에서 쫓아내면서 사건을 마무리 지었지만 어리가 너무나 마음에 들었던 양녕대군은 그녀를 장인이던 김한로의 집에 숨겨두고 만남을 계속 이어나갔죠.

그러다 다시 궁으로 불러와 살도록 했는데 결국 어리는 양녕대군의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 사실을 알게 된 태종이 어리를 궁 밖으로 내쫓자 태종에게 열받은 양녕대군은 아버지 태종에게 편지를 썼는데 "아버지께서는 첩을 많이 두시면서 나는 왜 첩을 못 두게 하냐" 라는 식의 편지를 보냈다고 하죠.

 

이에 태종은 세자를 폐위한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고 그렇게 양녕대군은 세자 자리에서 폐위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양녕대군을 유배 보내게 되었는데 세자 시절 쓰던 물품들을 모두 딸려 보냈고 그의 수발을 들 노비들과 풍족하게 살 수 있도록 돈도 많이 줬는데요.

 

이때 신하들은 어리를 참수하라고 태종에게 간했지만 모두 물리치고 양녕대군과 함께 보내주었죠.

하지만 어리는 훗날 양녕대군의 장인인 김한로의 첩과 양녕대군의 유모에게 구타당한 뒤, 스스로 목을 매고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그러나 폐세자가 된 이후에도 양녕대군의 기행은 끝을 몰랐는데요.

그의 아들이었던 이혜는 마치 정신 나간 사람처럼 노비를 죽이기도 하고 여종을 쇠못으로 찌르기도 하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지르다 결국 스스로 목을 매달아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세종실록에 의하면 이혜는 아비에게 애첩을 빼앗긴 뒤 심화병을 얻었다고 기록이 되어있죠.

 

바로 양녕대군이 아들 이혜의 애첩을 빼앗아버린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자신의 며느리를 범해버린 것이죠.

 

그 이후로도 시도 때도 없이 유배지에서 몰래 도망쳐 기생을 끼고 놀기도 하고 온갖 악행과 기행을 저지르는 양녕대군이었지만 세종대왕은 양녕대군이 그런 짓을 한게 하루 이틀이냐며 눈감아주기도 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 이후로도 양녕대군이 사고 칠 때마다 세종은 다 용서해 주었고 형이 아무 불편 없이 살수 있도록 잘 보살펴 주었다고 하죠.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과 세조 역시도 양녕대군의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들어주려고 했으며

관대하게 대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세조가 수양대군이던 시절 계유정난을 일으키자 그는 수양대군의 편을 들어 조카인 안평대군을 죽이라고 했으며 세조 3년이던 1457년 10월에는 단종 복위 운동을 펼치던 조카 금성대군 역시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며 엄중한 처벌을 할 것을 주청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금성대군도 사사되었는데요.

 

금성대군이 사사됐다는 소식을 들은 단종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는데 양녕대군은 온갖 악행에도 항상 자신을 돌봐주고 지켜주던 동생(세종대왕)의 손자가 죽는데 일조한 셈이 되었죠.

어쨌든 그는 69살까지 천수를 누리며 잘 먹고 잘 살다가 1462년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양녕대군이 살면서 잘한 점은 딱 하나 있는데 기행을 저질러 동생 충녕대군이 왕이 되게 한 것이죠.

덕분에 한반도 역사상 최고의 성군 세종대왕이 탄생될 수 있었고 현재도 편히 쓰고 있는 이 한글도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양녕대군이 왕이 되었다면 우리는 현재까지 한자를 썼어야 했을 텐데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요.

한편으로는 역사상 최고로 잘한 일(왕이 되지 않은 것)을 한 인물이자 조선 최고의 개망나니이자 한량, 양녕대군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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