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사극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여인들을 보면 무겁고 불편해 보이는 가체를 쓰고 있습니다.
가체는 조선시대 여인들의 부와 계급을 상징했으며 그 어떤 사치품보다 월등히 비쌌다고 하네요.
요즘의 명품백과는 비교 조차 안되는 사치품의 끝판왕 가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참 사극을 좋아하는데요.
허준이나 태조왕건, 대장금, 이산 같은 드라마는 정말 수십 번 봤을 정도이죠.
다만 드라마끼리 좀 달랐던 점은 왕실 여인들이 허준과 대장금에서는 엄청 큰 가체를 쓰고 나왔고 이산에서는 가체를 쓰고 나오지 않았던 것인데요.
볼 때는 별생각 없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 알 것 같네요.
가체는 영조시대의 승정원 일기에 고려시대 때 몽골에서 온 머리형태에서 유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하지만 고구려 고분벽화의 귀부인 모습에서 이 가체를 이용한 머리장식을 볼 수 있기도 하고 신라 문무왕이 당나라의 소정방에게 하사한 여러 선물들 목록 중에는 '다리'라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고 하죠.
다리란 가체 인데요.
다래, 월이, 월내, 달비 등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가체는 조선의 특산품으로, 중국 사신에게 내린 하사품에도 포함되어 있었고 명나라나 청나라에 보낼 조공품에도 반드시 포함되어 있었다고 하죠.
오늘은 이 가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요즘에 명품가방이나 명품지갑 같은 거 하나씩은 가지고 있을 텐데요.
당연하겠지만 워낙 가격이 비싸다 보니 하나 사려면 큰맘 먹고 한번 질러야 하죠.
조선시대에도 명품 또는 사치품으로 최고로 치는 것이 바로 가체였습니다.
여자들은 머리 위에 가체를 얹어 머리카락을 더욱 풍성하게 보이도록 했는데요.
궁중의 가례(家禮)와 길례(吉禮)에도 가체를 이용한 머리장식이 사용되었죠.
16세기 중종 때의 기록에는 가체를 판매하는 다리전이 한양에 있었다는 기록도 있었는데요.
문제는 조선시대 때는 머리카락을 함부로 자를 수 없었고 당시에는 당연히 인조모발도 없었기 때문에 모든 가체는 실제 사람의 머리카락으로 만들어졌다 보니 엄청나게 비쌌습니다.
가체가 크고 길수록 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라갔으며 그렇다보니 처음에는 왕족이나 지체 높은 양반집의 여인들 또는 부잣집 여인들이 즐겨 사용했죠.
나중에는 기녀들도 가체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평민 여성들은 그나마 값이 싸고 짧은 가체 여러 개를 이어서 사용했다고 합니다.
조선 후기에는 농업과 상업이 발달하면서 중인들이나 평민들 중에서도 경제력이 괜찮아진 부류도 있었기에 왕족이나 양반들 외에 평민들도 가체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가체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뛰기 시작했습니다.
영조 대에 쌀 한가마의 가격은 3냥이었는데 가체는 약 70냥 정도까지 할 정도였고 시간이 더 지나 정조 때에는 400~500냥을 줘도 가체를 구하기 힘들어지니 나중에는 가체 하나에 800냥에서 1000냥에 육박했다고 하죠.
당시에 한양의 기와집 한채가 400냥 정도였으니 가체 하나가 기와집 두채 값과 맞먹는 가격이었던 것입니다.
오죽하면 여선덕이라는 인물은 정조에게 '가체의 가격이 100냥을 넘는 것도 지나치다 하여 사치스럽다 하였는데 지금은 4, 5백 냥도 부족하여 1000냥까지 이르렀다' 라는 상소문을 올리기까지 했다고 하죠.
그렇다보니 가체를 하나 사기 위해 논밭을 팔고 가산을 탕진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비싸고 불편한 가체를 여성들이 고통을 참아가며 사용한 이유는 이 가체크기로 자신의 계급이나 부를 과시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여성의 외모만 돋보이게 했던 장식에 불과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가체는 더 크고 높을수록 그 집안의 재산, 그 집 주인의 권력, 관직, 그리고 부를 나타냈죠.
그리고 가체로 서로 간의 급을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보니 돈 많은 사람들은 점점 더 큰 가체를 사용했고 짧은 가체는 여러 개를 엮어서 사용했죠.
그렇다보니 무게가 엄청났는데요.
워낙 값비싼 물건이다 보니 가체는 양반 가문끼리 결혼식을 할 때도 혼수품으로 주거나 받거나 하기도 했는데 당시엔 10대에 결혼을 했었다 보니 어린 신부가 이 가체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기절하는 일도 있었고 13세의 어린 새색시가 방에 혼자 있다가 갑자기 시아버지가 방에 들어왔는데 깜짝 놀라며 일어서다 가체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해 목이 부러져 사망한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영조 때 기록에 의하면 궁녀들 또한 가체 때문에 목이 꺾여 사망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하며 항상 가체를 사용하던 왕실의 여인들이나 지체 높은 대갓집 여인들은 항상 목과 어깨 통증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 사회는 검소함과 절제를 강조하던 성리학이 지배하는 시대였는데요.
여인들 사이에서는 사치품이던 가체가 유행했다는 것이 독특한 점이죠.
당시 양반들은 오직 금전적 이익만 추구하는 상인들을 업신여기며 천시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돈을 만지는 것조차도 불결한척하기도 했지만 여성들이 그 비싼 가체를 사용해 자신의 신분과 사회적 지위, 권력, 경제력 등을 과시하던 것을 검소함과 절제를 부르짖던 남자들은 아무 말 안 하고 묵인했다는 것이 아이러니한 점이죠.
남자들은 아닌척하면서 자신의 부와 급을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것에 동조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조선 중기 이후부터 너무나도 비싼 가체 가격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유행을 하자 이는 사회 문제로까지 대두되기 시작했죠.
그러자 영조는 사치 금지령을 발표하며 가체를 사용하는걸 금지시켰고 그 대신 족두리를 사용하도록 했지만 오히려 가체 가격만 더 올려버리는 결과로 이어졌으며 심지어 족두리에 장식을 값비싼 보석들로 하면서 가체의 사치스러운 성격을 족두리가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권위를 알려주던 가체를 하루아침에 족두리로 대신하기는 어려웠고
그만큼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것 또한 쉽지 않았죠.
결국 영조는 7년만에 가체를 금지하던 명을 거두었습니다.
어쨌든 영조는 가체를 금지 시키기는 했던 덕인지 TV에서 사극을 보면 영조 이전 대에는 가체가 크고 화려한 반면 영조 이후의 배경인 사극은 족두리나 쪽머리를 사용한 것을 볼 수 있죠.
이후 정조 때에도 계속해서 가체 사용을 금지시키자 몰래 가체를 한 여자가 있기도 했고 가체를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머리카락만으로 위로 올려 가체처럼 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흘러 19세기 순조 때에 이르자 쪽머리가 정착하면서 가체는 사라지게 되었죠.
다만 기생들은 계속해서 가체를 사용했고 왕실의 행사나 가례가 있을 때도 가체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가체가 완전이 없어지지는 않았는데요.
일제강점기 때도 시골에서 행사가 있을 때는 노인들이 가체를 이용해 치장하기도 했다고 하죠.
마치 가체는 현대 여성들이 불편한 하이힐을 신거나, 과거에 있었던 미니스커트 입은 여자를 자로 재면서까지 단속했지만 도망 다니면서까지 입고 다니거나 했던걸 생각해 보면 예나 지금이나 여자들의 아름다워지고 싶어 하는 본능은 왕도 막을 수 없었던 것 같네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비싼 가격의 사치품이었던 가체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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