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 정승은 고려 말부터 관직에 올라 조선이 건국된 이후 무려 5명의 왕을 모셨던 최장수 최고령 영의정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의 복수극?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은퇴를 안 시켜줘서 진짜 죽을 때까지 일만 했었죠.
은퇴하려는 황희와 일 시키려는 세종대왕의 이야기입니다.
조선왕조 500년을 통틀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인 영의정을 가장 오래 역임한 인물이 누군지 아시나요?
그 인물은 바로 18년 동안 영의정을 지낸 황희입니다.
그 외에도 황희에게는 엄청난 기록들이 많은데요.
그가 처음 관직을 시작한 건 고려 말이었습니다.
고려의 우왕, 창왕, 공양왕을 모셨던 신하이기도 하고 새로 조선이 건국되고 나서는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까지 섬겼던 신하이죠.
또한 6판서와 3정승직 또한 모두 다 역임했던 어마어마한 인물입니다.
이것만 보아도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알 수 있는데요.
역대 최장기간 영의정이라는 대기록을 세울 수 있었던 것도 다 세종대왕 덕택(?)이기도 하죠.
이유는 황희가 죽기 3년 전까지 세종이 사직을 받아주지 않아서 죽어라 일만 해야 했기 때문인데요.
세종이 2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을 당시 황희의 나이는 56세에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였습니다.
그 둘의 약 20여 년간의 치열한 창과 방패의 싸움은 비로소 시작된 것이죠.
때는 1427년 5월, 황희의 나이가 65세가 되어 관직에 오른지도 수십 년이 지나자 남은 여생을 편하게 살다 죽으려는 생각에 은퇴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심각한 가뭄이 들었고, 이는 영의정인 자신 탓이라며 파면시켜달라고 세종에게 부탁했지만 세종은 신하들이 누가 자기 직분을 다하겠냐며 그의 사직을 받아들이지 않았죠.
이때까지만 해도 황희는 그러려니 했을겁니다.
오랫동안 성심성의껏 일했으니 전하께서도 놓아주기 힘들것이다 여겼겠죠.
그렇게 첫 사직서가 반려되고 다음 해인 1428년이 되자 황희는 두 번째 사직서를 냈지만 세종은 쿨하게 거절하죠.
뭔가 어리둥절한 마음이 있었지만 그는 어쩔 수 없이 계속 영의정으로써 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나 그의 나이 71세가 되자 이젠 진짜 은퇴를 해야겠다 생각하고 사직서를 또다시 써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엎드려 비 옵니다, 제가 너무 늙었으니 불쌍히 여기시어 조용하고 한산한 곳에 던져 주셔서 쇠약한 몸을 수양하게 해주시옵소서" 라고 간곡하게 세종을 설득한 것이었죠.
하지만 돌아온 세종의 대답은 "노"였습니다.
황희가 아직 죽을 만큼 쇠약하지도 않고 병도 깊지 않으며 오히려 기력도 좋아 얼마든지 국정수행 가능하겠다면서 만약 깊은 병에 걸리면 치료하면 되잖아? 라며 거절한 것이죠.
그러자 황희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다음 해인 1432년 4월, 또 사직서를 냈죠.
이번에는 더 강하게 사직서를 썼습니다.
"소신, 귀도 멀고, 눈도 안 보이고, 허리도 아파서 거동도 힘듭니다. 다리에는 힘도 없어서 몇 걸음 못 걷고 쓰러지기 일쑤입니다. 부디 사직서를 수리해 주세요." 라는 내용의 사직서였죠.
그러자 그의 사직서를 본 세종은 그에게 비답을 내리는데요.
그건 바로 "사직하려고 하면 당연히 윤허하지 않을 것이다" 였죠.
황희가 낸 사직서는 당연히 반려라는 것입니다.
이미 황희의 나이가 70세가 넘었지만 세종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고 황희 또한 은퇴를 포기할 수 없었죠.
불과 8개월 후인 1432년 12월, 그는 나이가 들어 듣지도 보지도 못하고 온몸이 아프다며 다시 한번 사직을 윤허해 달라고 청했지만 세종은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사직서가 반려당하자 황희는 이러다 평생 일만 하다 죽겠구나 싶었죠.
그런데 또, 맡은 임무는 착실히 잘 수행했고 그렇게 3년의 시간이 흘러 1435년 3월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진짜 퇴직해야겠다 생각한 황희는 절박한 마음을 담아 사직서를 썼는데요.
"허리가 아프고, 다리도 아파 걷지도 못하고 걸을 때마다 쓰러집니다. 신은 이제 죽을 때가 다 되었으니 부디 파직시켜주시옵소서." 라는 사직서를 세종에게 올렸죠.
그러자 세종은 사직서는 봤는지 못 봤는지도 모르겠고 어쨌든 대답은 '불허' 였습니다.
황희도 이제는 오기로 사직서를 쓰기 시작했는지 다음 해인 1436년 6월에는 '종기 때문에 피가 철철 흐르고 빈혈 때문에 계속 어지럽기도 하고 생각하는 것도 흐리멍텅해지니 신의 사직을 윤허해 주시옵소서.'라고 사직서를 또 제출했고 세종대왕의 대답은 여느 때와 같은 대답이었죠.
황희는 생각했습니다.
늙었다, 아프다 하면 어차피 받아주지 않겠구나라고 깨달은 것이죠.
그렇게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1438년 2월 드디어 기회가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헌부에서 "황희는 권력을 잡아 마구 휘두르는 권신이다!" 라며 그를 탄핵한 것이죠.
그러자 황희는 곧장 사직서를 쓰기 시작했는데 내가 생각해도 사헌부의 주장이 맞다고 맞장구치며 자신의 죄를 물어 파직시켜달라고 한 것입니다.
이에 세종은 이젠 대답도 안 해주고 황희의 사직서를 쌩까버렸죠.
그러자 그는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무슨 일만 생기면 무조건 그 이유를 빌어 사직서를 써버리는데요.
여느 때와 다르게 천둥과 번개가 치는 날이 잦자 11월 19일엔 천둥 번개가 심한 이유는 자기 때문인 것 같다며 제발 파직시켜 달라 했지만 세종은 싱긋 웃으며 날씨가 이런 건 내 탓이니 걱정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하라며 또 그의 사직서를 반려 시켰죠.
그렇게 매년 사직서를 올리다 보니 어느덧 1439년, 그의 나이 77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세종과는 대화가 안 통하니 도승지이던 김돈에게 매달리기 시작하는데요.
'자신에게는 하혈병이 있고 병 때문에 일도 못할 지경이다. 귀와 눈은 어두워진지 오래고 일찍이 낙향해야 할 나이에 벼슬에 머물면서 나라 세금이나 축내고 있으니 니 생각에도 나 빨리 사직해야 할 거 같지?' 라며 이야기 한 것이죠.
그러자 김돈은 황희에게 들은 이야기를 세종에게 소상히 아뢰었는데 세종은 그러면 모든 업무를 집에서 보고 한 달에 두 번만 조회에 참석하라고 하명했습니다.
그렇게 황희는 재택근무를 시작했지만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세종은 그를 궁으로 불렀고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궁에 불려가기 일쑤였습니다.
이제 재택근무 마저도 지긋지긋해지자 1440년과 1443년 두 번에 걸쳐 또다시 파직시켜 달라고 애걸복걸하지만 세종은 아예 듣지도 않고 힘들면 누워서 일하고 직원들 시키라는 대답만 돌아왔죠.
그는 이제 80세가 넘었습니다.
황희는 이제 포기했는지 6년간 조용히 영의정 임무를 계속 수행해오다 1449년 87세의 나이로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에 세종에게 사직을 청했고 이제 연로해진 세종은 드디어 황희의 사직서를 받아주었습니다.
그렇게 약 20년간의 치열했던 두 사람의 사직/반려 사건은 마무리된 것이죠.
그리고 불과 약 4개월 후인 1450년 2월, 세종은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요.
진짜 세종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황희를 제대로 부려먹은 셈이었습니다.
너무 늙은 나이에 드디어 은퇴를 해낸 황희는 은퇴를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고 3년 뒤인 1452년 2월, 90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되었죠.
그렇게 황희는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영의정을 역임한 인물이 되었고 정승 또는 재상하면 황희가 떠오르듯 정승의 대명사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현재 사람들이 재미로 하는 이야기 중 하나는 세종이 충녕대군 시절 태종이 양녕대군을 세자 자리에서 폐하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올리려 할 때 절대 안 된다며 극렬히 반대하던 인물이 황희였는데 이에 앙심을 품고 죽기 직전까지 일을 시키며 복수한 세종의 복수극이다 라는 이야기도 있죠.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라고 일컬어지는 세종이 복수극을 했을리는 만무하고 또한 70~80대의 노인을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일을 시켰다고도 믿기지 않네요.
아마도 황희도 일하는 걸 좋아하고 세종도 일 중독이다 보니 서로 밀당을 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황희 정승과 세종대왕의 치열했던 사직/반려 사건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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