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덕술은 일제도 혀를 내두를 만큼 친일 고문경찰이었는데 그 당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잡아서 고문했었습니다.
해방 이후에 숙청당하기는 커녕 오히려 치안기술자로 인정받아 더욱더 악질적인 고문경찰로 승승장구하는데 심지어 훈장 3개나 받게 되었죠.
고문귀신 노덕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이야기할 인물은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고 고문하고 살해까지한 '마쓰우라 히로' 라는 인물입니다.
그는 숨은 독립운동가들을 색출해 내던 색출왕이자 독립운동가들에게 잔혹한 고문을 가하던 고문왕이기도 했죠.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사실은 마쓰우라 히로는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이었습니다.
그의 한글이름은 바로 노덕술이죠.
오늘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수립 후 경찰 간부가 되어 수많은 독립운동가들과 죄 없는 사람들을 체포하고 고문했으며 심지어 고문하다 살해까지한 악질 친일 반민족 행위자 노덕술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노덕술은 1899년 6월 1일 울산 장생포에서 태어났습니다.
중학교를 채 마치지 못하고 일본인이 운영하는 잡화점에서 일하다 돈을 더 벌기 위해 별안간 일본 홋카이도로 가서 일을 했죠.
그리고 그가 20살이 되던 해 다시 돌아와 경찰이 되기 위해 경남 순사 교습소를 졸업하고 일본제국의 순사로 경찰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노덕술은 중학교도 2년 만에 자퇴를 했고 심지어 조선인 일본경찰이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승진에는 불리한 조건이었지만 경찰이 된 이후부터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는데요.
그 이유는 일본인 경찰들도 학을 뗄 정도로 잔혹했던 독립운동가 고문 때문이었죠.
불령선인으로 찍힌 여러 인물들을 체포한 뒤 없는 죄마저 불때까지 잔혹한 고문을 했고 심지어는 고문을 받다가 사망한 사람까지 나왔으며 그렇게 고문으로 받아낸 자백으로 어마어마한 건수를 올렸던 것입니다.
고문 귀신이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였던 그는 여태껏 없던 고문까지 스스로 개발하여 사용하기까지 했는데요.
좁은 상자에 사람을 넣고 밖에서 긴 못을 박는 고문이나 혀를 잡아 빼거나 머리카락을 뽑는 고문 그리고 두 손 두 발을 뒤로 묶은 뒤 천장에 매달아놓고 구타하거나 코와 입에 물을 부어버리는 물고문을 하는 등 수많은 새로운 고문들을 개발했죠.
일설에 따르면 일제경찰이 전국의 고문 기술을 총정리 했던 것이 있는데 그 고문 기술 중 약 70%에 달하는 고문 방법들이 노덕술이 만든 기술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그는 순사가 되고 나서 불과 3년 만인 1921년에는 순사부장이 되었고 26년에는 거창 경찰서 경부보, 33년에는 경부(경감)가 되었는데 당시 조선인 경부가 86명밖에 되지 않았던걸 감안하면 그야말로 초고속 승진이었습니다.
또한 1943년 9월에는 경시(총경급)에 까지 올랐는데요.
조선인 가운데 일제의 경찰이 되어 경시에 오른 사람은 36년 일제강점기 동안 고작 21명밖에 되지 않았었고 그중에 노덕술이 이름을 올린 것이었죠.
노덕술을 제외하고 경시가 된 조선인들은 대한제국 시절부터 경찰이었거나 대학까지 졸업한 엘리트가 대부분이었는데 중학교 중퇴를 한 노덕술이 경시가 된 것만 보면 그가 얼마나 악랄하게 사람들을 괴롭혔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던 1929년 10월 30일, 광주 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일본인 학교 학생들이 통학 열차 안에서 충돌한 사건이 벌어졌는데 그 사건이 계기가 되어 전국적인 학생운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그러자 부산에 있던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들도 그 소식을 듣고 같이 동맹휴학을 하게 되었는데요.
이에 노덕술은 학생들을 죄다 잡아와 모진 고문을 가했죠.
그러다 우연히 동맹휴학 배후에 혁조회라는 반일단체가 있는걸 알아내게 되었고 노덕술은 혁조회의 회장 김규직과 유진홍, 양정욱 등 9명을 곧장 잡아들여 잔혹한 고문을 가했으며 그들은 고문 후유증으로 감옥 내에서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엄청나게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고문, 살해했으며 같은 조선인끼리 어쩜 저리 가혹하게 대할 수 있는지 일본경찰들 마저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하죠.
노덕술은 일제의 눈에 들어 더 빠른 승진을 하기 위해 일본이 중국 침략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을 때는 군수물자를 수송하는 업무를 도맡아 하기도 했고 동시에 일제 침략은 정당하다는 선전활동을 하면서 일본에 눈에 들기 위해 온갖 짓거리들을 해댔습니다.
그 결과로 일제로부터 1940년에는 공로상, 1941년에는 훈8등 서훈을 받았고 1943년에는 경시로 승진하게 되었죠.
그러다 2년 후인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면서 비로소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고 당시 노덕술은 평양 경찰서장에 있다가 소련군에게 친일인사로 지목되어 구금당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구금에서 벗어나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러던 1945년 말, 경찰 내부에서는 한참 의견이 분분했었는데요.
수도경찰청장이던 장택상과 경무부장(경찰청장급) 조병옥은 친일 경찰들을 다시 등용해 경찰 임무를 맡기자는 입장이었고 경무부 수사국장 최능진은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반대했지만 결국 친일 경찰들의 재등용이 결정되어버리고 말았죠.
그렇게 극악무도한 친일 고문 경찰 노덕술은 수도경찰청의 수사과장에 임명되었습니다.
사태가 얼마나 심각했냐면 당시 수도경찰청의 경찰 간부들은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제 경찰 출신이었고 전국 경위 이상의 경찰들 중 약 82%에 달하는 경찰들이 일제 경찰 출신이었을 정도였죠.
아무튼 한동안 몸을 사리고 있던 노덕술은 반이승만세력 숙청과 좌익분자 검거 등을 주도하면서 다시 고문경찰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정말 비참한 점은 독립운동을 하던 독립투사들이 광복되어 돌아온 한국 땅에서 다시 친일 경찰들에게 체포되어 이제는 빨갱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고문당했던 것인데요.
의열단의 단장이자 조선 의용대장,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지냈던 전설의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 또한 그에게 잡혀 모진 고문을 당했다고 합니다.
사실 이는 김원봉이 직접 증언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동지들이 남긴 회고록을 모아보면 노덕술에 의해 빨갱이로 몰려 고문을 당한 것이 사실로 보인다고 하죠.
1947년 3월 22일. 노덕술은 김원봉을 '빨갱이 두목' 이라고 부르며 그의 따귀를 때리기도 하는 등의 모욕을 주고 체포한 뒤 중부 경찰서에서 조사를 했는데요.
김원봉은 무자비한 고문을 당했고 온갖 수모를 당한 뒤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의열단 동지였던 유석현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풀려난 뒤 의열단 동지들에게 "조국 해방을 위해 일본 놈들과 싸울 때도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았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악질 친일파 경찰 손에 수갑을 차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소"라고 하면서 통곡을 했고 얼마나 억울했는지 꼬박 3일을 통곡했다고 하죠.
평생소원하던 조국이 해방을 맞이했지만 일제강점기 때 온갖 악행을 일삼던 친일 경찰들은 반공투사로 둔갑해 독립운동가들을 빨갱이로 몰아 잡아들이는 모습에 절망을 했던 것인지 김원봉은 그로부터 1년 뒤인 1948년, 북한으로 향했습니다.
그렇게 일제강점기 때도 해방 이후에도 잘 먹고 잘 살던 노덕술은 한 가지 사건을 맡으면서 자신의 경찰 경력이 끝나버리는데요.
바로 1948년 1월,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의 저격용의자였던 25세 청년 박성근이 중부 경찰서 형사실에서 노덕술을 비롯한 여러 형사들에게 물고문을 당하다 그만 죽어버리고 만 것이죠.
그러자 그는 박성근의 시신을 한강에 유기해버렸는데요.
하지만 6개월의 시간이 흐른 뒤, 한강 위로 박성근의 시신이 떠올랐고 이에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면서 고문치사 사건의 주모자로 노덕술이 체포된 것이죠.
이에 장택상은 노덕술 체포에 반대했지만 막지 못하자 수도경찰청 부청장이었던 김태일을 경찰서로 보내 노덕술에게 물어볼게 있으니 잠깐 풀어달라고 하면서 그대로 그를 데리고 도망쳐 숨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숨어지내던 노덕술에게 진짜 더 큰일이 벌어지는데 바로 1948년 10월에 반민족행위 특별 조사위원회가 출범 한 것이죠.
줄여서 반민특위라 불리던 이곳에서는 일제강점기 때 악질 일제경찰이던 노덕술을 그대로 둘리 없었습니다.
그렇게 1949년 1월, 노덕술은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는데 충격적인 사실은 노덕술을 경찰이 얼마나 감싸줬으면 경찰에서 지급한 것으로 추정되는 지프차 한 대와 노덕술을 호위하던 4명의 경찰관들도 있었으며 권총 6자루에 현금 30만 원까지 가지고 있었다고 하죠.
그런데 꼼짝없이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체포되어 죗값을 치를 일만 남았던 노덕술보다 더 큰 충격을 받은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당시 대통령이던 이승만이었습니다.
이승만은 자주 노덕술과 만나 "그대 같은 애국자가 있어서 내가 발 뻗고 잘 수 있다"라고 할 정도로 그를 아꼈는데요.
이승만의 충실한 개가 된 노덕술은 그의 정권 연장에 있어서 가장 많은 일을 해내던 인물이었기 때문이죠.
이승만은 노덕술을 체포한 사람들을 체포하라고 지시를 내리면서 반민특위에 그의 석방을 요구했으며 정부가 보증을 서서라도 석방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라고 지시했습니다.
결국 1949년 4월, 이승만 정권은 정국을 혼란시키려고 했다는 이유로 국회의원 김약수, 노일환, 이문원 등을 체포했고 6월에는 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하면서 사실상 반민특위는 유명무실해졌으며 그렇게 노덕술은 '나라에 요긴하게 쓰일 기술자' 라고 하면서 그 해 7월 풀려나게 되었죠.
그리고나서 육군 헌병대장이 된 노덕술은 한국 전쟁 도중에 화랑무공훈장과 충무무공훈장 등 3개의 훈장을 받았고 이승만 정권이 계속 이어지도록 여러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렇게 이승만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던 노덕술은 그 이후로도 계속 육군 범죄 수사단장, 서울 15 범죄수사대 대장 등 군 고위직을 맡아오다가 뇌물을 받았던걸 걸리고 말았고 그렇게 파면 당하고 말았죠.
그는 고향인 울산으로 내려온 뒤 1960년 7월, 국회의원 선거에도 나갔지만 낙선했고 그 이후로도 계속 다른 기회를 엿보다가 1968년 4월 1일,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정말 어이가 없는 점은 노덕술과 같이 악한 인물이 자신이 저지른 일들에 대한 대가는 전혀 치르지 않았다는 점과 온갖 호사를 다 누리면서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점이죠.
또한 노덕술이 개발한 고문기술들은 훗날 군사 독재정권시대에도 그대로 이용될 정도였습니다.
2014년에 울산광역시에서는 울산을 빛낸 인물 587명을 선정해 '울산의 인물' 이라는 책을 만들었는데요.
여기에 노덕술의 이름이 올라갔었지만 그의 친일 문제가 불거지면서 다시 책에서 노덕술의 이름이 제외되기도 했죠.
현재 그의 이름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어 있는데요.
을사오적, 정미칠적 등만 기억할게 아니라 이런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의 이름도 기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고문귀신으로 일컬어지던 악마도 울고 갈 노덕술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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