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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하판락. 친일파, 민족반역자, 일본제국 경찰이자 노덕술과 함께 고문귀, 고문왕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인물

by 사탐과탐 2021.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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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덕술보다는 인지도 면에서 좀 떨어지지만 당시 독립운동가들이나 조선인들에게 잔인한 고문을 가했던 고문귀, 고문왕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인물입니다.

 

 

지난번에 친일 경찰 노덕술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죠.

오늘은 노덕술 보다는 인지도에서 떨어지지만 당시 악명과 잔혹함, 악랄함에서는 그를 훨씬 뛰어넘는 친일 반민족행위자가 또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이름조차 생소한 '하판락'이라는 인물이죠.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의 경찰이던 하판락의 고문기술은 일본 헌병들도 한수 배우고자 했을 정도였습니다.

오죽하면 그의 별명은 '고문귀', '고문왕'이었을 정도였죠.

 

그의 창씨명은 카와모토 한라쿠, 또는 카와모토 마사오 라고 불렸는데요.

오늘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의 개가 되어 온갖 악행을 일삼았던 고문귀,하판락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는 1912년 2월, 경남 진주의 유지였던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남부럽지 않은 유년시절을 보낸 그는 1934년에 일제의 경찰이 되었죠.

 

그 역시 노덕술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눈에 들기 위해 독립운동가들을 색출하고 고문하여 고속 승진을 했는데요.

불과 4년 후에는 부산 수상경찰서의 순사부장과 경부보로 승진하기도 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그가 고문귀라는 별명을 얻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이 있는데요.

그 사건은 바로 1930년대 말에 있었던 기독교인 수십 명을 집단 고문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부터이죠.

 

그는 부산에서 일본의 신사참배를 거부한 기독교인 수십 명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한 뒤 당시 하판락 자신도 조선인이었으면서 고문을 받던 피해자들에게 '조센징'이라고 하며 고문을 가했다고 하죠.

또한 그는 노덕술을 능가하는 최악의 고문왕이 된 이유도 있습니다.

 

1943년 3월에 부산에서는 일제의 침략을 반대하고 조국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친우회'라는 이름의 비밀결사가 만들어졌죠.

친우회는 일제의 군사시설이나 군수품을 만들어 내던 공장 등을 파괴하고 일제의 침탈 행위를 고발하며,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전단지를 만들어 살포하는 등의 굉장히 공격적인 독립활동을 하려고 했던 단체입니다.

 

그들은 '일본은 망한다, 조선독립만세' , '우리가 일제에 핍박받고 있을 수 있느냐' 라는 내용의 전단지 200장을 만든 후 조선방직 기숙사와 부산진시장, 부두 등지에 뿌렸는데 결국 하판락에게 붙잡히게 되었고 이광우, 여경수 등은 모진 고문을 당하는데요.

 

고문을 당한 7~8명의 독립운동가 중 3명이 잔혹한 고문을 참지 못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전부 반신불구가 되어 버렸을 정도로 고문은 혹독했습니다.

거기다가 하판락이 당시 그들에게 행했던 잔인한 행동은 바로 동료가 고문을 당하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지켜보게 한 것인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친우회 소속의 독립운동가 이광우 선생은 당시의 일을 회상하며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더 끔찍했던 일은 다른 이가 고문당하는걸 지켜보면서 내가 고문당할 순서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했죠.

 

또한 하판락이 고문귀라는 별명이 생긴 고문 방법은 바로 '착혈고문' 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체포되어 온 이미경을 고문할 당시 자신이 원하는 진술이 나오지 않았을 경우에 이 착혈고문을 했는데요.

 

이미경의 혈관에 주사기를 꽂아 엄청난 양의 피를 뽑아냈고 그 피를 다시 이미경에게 뿌린 것이죠.

그리고 재차 질문을 했고 또 대답을 거부하거나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으면 다시 피를 뽑은 후 피해자의 몸이나 벽에 그 피를 뿌린 것입니다.

이 잔인해 마지않는 고문이 바로 착혈고문이었죠.

 

또한 여경수가 자백하지 않자 그의 온몸을 불에 달궈진 쇠젓가락으로 지지기도 했고 전기고문에, 물고문에, 다리고문 끝에 여경수, 이미경 등 3명은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고문 후유증에 평생 반신불구의 몸으로 살아야 했죠.

 

오죽하면 하판락의 착혈 고문과 여러가지 고문을 폭로한 이광우 선생의 아들은 아버지의 독립운동을 인정받기 위해 증거 수집을 목적으로 하판락을 만나러 간다고 아버지 이광우 선생에게 말했는데 그러자 이광우 선생은 아들에게 "그를 만나면 죽여버려라, 그는 사람이 아니다, 인두껍을 쓴 짐승이다" 라고 말했을 정도였다고 하죠.

 

이광우 선생의 아들은 하판락을 찾아갔는데 굉장히 부유하고 건강하게 잘 사는 모습을 보고 씁쓸해 했다고 합니다.

어쨌든 친우회의 독립운동가들은 감옥 생활을 해야 했고 하판락은 이 일로 인해 승진까지 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로부터 얼마 안 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 했지만 친일경찰이던 하판락은 오히려 더 잘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해방 후 들어온 미군정은 '일제 관리 재등용 정책'에 따라 수많은 친일경찰들을 그대로 다시 경찰로 등용해 근무하게 했던 것이죠.

 

심지어 그는 미군정 경상남도 제7경찰청 회계실 주임으로 있으면서 일본인들이 남겨놓고 간 주인 없는 재산을 처리하는 업무를 맡았는데 이 과정 중 많은 재산을 착복하여 엄청난 재산을 모았습니다.

 

이후 1946년 6월에는 경남 경찰청 수사과 차석으로 승진하기도 했지만 1949년에 그의 고문에 의해 돌아가신 독립운동가 여경수 선생의 어머니가 하판락을 고발해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죠.

 

당시 고원섭이 쓴 <반민자 죄상기>에 의하면 하판락을 체포한 반민특위가 그를 서울로 데려가려고 하니 부산 시민들이 차를 막아서며 하판락은 우리가 처리하겠으니 맡겨달라고 애원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만큼 부산 시민들은 하판락에 대한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고 하죠.

 

그러나 서울로 압송된 하판락은 차라리 부산 시민들에게 맡기는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결과가 초래됩니다.

그는 반민특위에 체포된 후 조사를 받았지만 자신이 독립운동가들에게 가했던 고문이나 살해 등의 죄상을 끝까지 부인했던 것인데요.

 

그러다 1949년 6월, 당시 대통령이던 이승만의 명령을 받은 친일경찰들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그 이후 반민특위가 사실상 무명무실 해지면서 결국 노덕술이 풀려나고 난 다음 달 하판락 역시 풀려나게 됩니다.

 

(친일 고문경찰 하판락)

 

그는 풀려난 뒤 고향인 진주로 돌아와 1956년, 경남도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하고 말았고 이후 부산시의원에도 출마했으나 이 또한 낙선했죠.

그 이후 그는 부산에서 금융업과 목재업을 시작해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으며 그 돈으로 기부금도 내고 해서 부산시장에게 표창을 받기도 하는 등 과거 친일경찰, 고문귀의 이미지를 싹 씻어내는듯 했습니다.

 

하지만 하판락의 친일 행적은 독립운동가 이광우 선생의 증언으로 다시 한번 그의 정체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는데요.

그러자 전 국민이 그의 죄상과 고문 사실에 대해 비난을 하자 그는 대한매일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일본제국 경찰을 했던 과거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자신으로 인해 피해를 본 분들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빈다고 하며 마지못해 잘못을 시인하게 되었죠.

 

그리고 그는 평생을 떵떵거리며 잘 먹고 잘 살다가 92세의 나이로 2003년 9월, 천수를 누리고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하판락은 2002년에 친일파 708인 명단을 발표할 당시 그 명단에 이름을 올린 사람 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던 인물이기도 하죠.

 

독립운동가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선생은 훗날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된 것은 우리 민족이나 독립운동가가 아니었다. 진짜 해방된 것은 친일파였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친일파는 일제강점기 당시에도 잘 먹고 잘 살았지만 그래도 일본의 지배 아래에 있었는데 해방이 되고 난 이후에는 자신들을 지배하던 사람들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친일파들이 차지했다고 하면서 말이죠.

참 씁쓸한 역사이긴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이기도 한 것 같네요.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고문귀로 이름을 날렸던 원조 친일 민족반역자 하판락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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