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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순종. 나라가 망해가는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조선 마지막 황제이자 마지막 왕

by 사탐과탐 2021.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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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더러운 야욕에 의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나라가 일본에 삼켜지는걸 보고만 있어야 했던 비운의 마지막 황제 순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지난번에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푸이는 이리치이고 저리치이면서 비극적인 삶을 살다 세상을 떠나고 말죠.

그런데 어느 나라든 마찬가지로, 마지막 왕이나 황제는 비극으로 끝나는데요.

 

오늘 이야기할 이 인물의 마지막 역시 비극이었죠.

자신이 황제가 되기 전부터 이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이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황위를 이어 받아서 그런지 그 역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일본에 의해 앉혀진 허수아비 황제일 뿐이었죠.

오늘 이야기할 인물은 바로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 이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순종 이척은 1874년 2월 8일날 고종과 민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고종과 민비 사이에는 4남 1녀의 자식이 있었지만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고 성인이 된 자식은 오로지 순종이 유일했죠.

 

그렇다보니 고종과 민비에게는 순종이 너무나도 소중한 존재였지만 하필 순종은 몸이 굉장히 허약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고종과 민비는 무당이던 진령군에게 큰 돈을 주며 순종의 건강을 비는 기도를 드릴 정도였죠.

 

그가 태어나고 1년 후인 1875년 2월, 순종은 왕세자에 책봉되었습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독서를 굉장히 좋아했죠.

심지어 다른 가문의 족보를 달달 외우기까지 했는데 이름만 들어도 어느 가문에 몇 대손인지 알아맞힐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으로 인해 어머니 민비를 잃는 슬픔을 겪었고 2년 후인 1897년 10월 13일에는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황태자로 격상되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그에게는 목숨을 잃을뻔한 큰 사건이 발생하는데요.

 

(고종과 순종-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고종의 47세 생일인 1898년 9월 12일, 러시아어 역관이던 김홍륙은 궁내에서 일하던 공홍식과 김종화에게 고종과 순종의 커피에 엄청나게 많은 양의 아편을 넣도록 시켰습니다.

평소 커피를 즐겨마시던 고종은 아편을 넣은 커피를 마시자마자 맛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마시려던 커피를 뱉어버렸지만 순종은 이 사실을 모르고 커피를 다 마셔버린 것이죠.

 

그러자 곧바로 피를 토하며 기절한 순종은 즉시 옮겨져 치료를 받았지만 워낙 강력했던 아편의 독성으로 인해 많은 수의 치아가 빠져버렸고 혈변을 자주 누는 등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던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버렸습니다.

 

범인이던 김홍륙은 얼마 안 가 붙잡혀 교수형에 처해졌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틀니를 끼고 살아야 했고 틀니를 낀 탓에 하관이 커 보이자 인상마저 변해 좀 멍청해 보이는 외모가 되었고 그러다보니 순종이 바보가 되어버렸다는 소문이 전국에 퍼져버렸죠.

 

그렇게 순종의 이미지는 바보로 박혀버려 많은 사람들에게 신뢰를 잃어버렸고 그러자 '그가 황제가 되어도 허울뿐이겠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순종은 아편 커피 사건의 부작용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많은 음식이 차려 져있어도 물에 밥만 말아 겨우 먹어서 나인들이 쩔쩔맬 때가 많았으며 부실한 치아 때문에 딱딱한 음식을 먹기 어려워해 깍두기도 무를 삶은 뒤 만들었다고 하죠.

 

게다가 사람들이 아편 커피 때문이라고 의심하는 부작용이 또 있었는데 그건 바로 '그가 성불구자가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순종이 성불구였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순종에겐 자식이 없다는 것이 이런 소문을 만들어 내기엔 충분했던 것 같네요.

 

(순정효황후와 순종-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러던 중 1904년에는 그의 아내 민씨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고 3년 후에 순정효황후 윤씨와 혼인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일본이 조선 침략 야욕을 드러내자 고종은 일본 강압에 의한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알리고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했지만 일본의 방해에 의해 실패하고 말았죠.

 

이 사실을 안 일본은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에게 협박과 함께 퇴위를 강요하였고 그러자 결국 고종은 황태자에게 섭정을 맡긴다는 조칙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이는 황제 자리를 양위한다는건 아니었고 황태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다는 것이었죠.

 

그러자 순종 역시 아버지 고종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대리청정 명령을 거두어 달라고 했는데요.

하지만 일본은 이를 이용해 순종의 즉위식을 밀어붙이려 하고 있었죠.

그렇게 일본의 강압에 의해 양위식이 진행되었는데 이에 대한 반발로 고종과 순종 모두 양위식에는 불참을 해버렸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고종과 순종의 대역을 써 권정례로 양위식을 올려버렸죠.

권정례란 황제가 참석해야할 행사에 황제가 나오지 못할 경우에 황제가 없이 거행되던 방식인데요.

이날에는 황제도 없거니와 황태자도 없는 상황에서 누군지 알 수도 없는 사람 두 명을 대역으로 쓴 뒤 행사를 진행해버린 것이죠.

 

그렇게 7월 19일 고종은 강제로 제위에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양위식이 끝난 후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외무차관과 일본 수상에게 덕수궁 중화전에서 양위식을 거행했다는 내용의 외교 전보를 보냈죠.

그러자 일본 관리들 사이에서 고종이 대리청정을 명했는데 무슨 양위냐고 난리가 났지만 총리대신 이완용이 먼저 나서서 이것은 대리청정이 아니라 양위라고 밝혔죠.

 

그러자 백성들은 장난치냐며 분노하기 시작했습니다.

분노에 가득 찬 백성들은 이완용의 집에 불을 질러 버렸고 일본에 굽신대던 친일파 대신들 역시 성난 백성들이 무서워 집에 돌아가지 못할 정도였죠.

이 난리가 난 상황인데도 모든 실권을 가지고 있던 이완용과 송병준은 일본에 대한제국 국권을 넘겨주기 위한 일을 착착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광무였던 연호도 융희로 바꿔버렸으며 1907년 8월 27일을 즉위식 날짜로 정해 덕수궁 돈덕전에서 황제의 즉위식을 거행했고 마침내 대한제국 2대 황제로 순종이 즉위했죠.

당시 일본은 러일전쟁을 승리하고 나서 한반도에서 러시아 세력을 몰아낸 뒤 대한제국의 후견국을 자처하면서 대한제국을 병탄하기 위해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은 대한제국 내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임명했으며 1907년 7월 24일, 정미7조약인 한일신협약을 체결하면서 대한제국의 입법권, 인사권, 경찰권 등을 빼앗아 왔죠.

거기다가 8월 1일에는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해 버리자 이 조치에 반발하여 대한제국의 해산 군인들과 일본군 간의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후엔 신문지법을 제정해, 반일 성향의 대한매일신보를 포함한 여러 언론들을 통제하고 탄압하기 시작했죠.

이러한 일본의 만행에도 불구하고 순종은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일본에게 빼앗기고 있었죠.

 

(순종-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순종이 황제로 즉위하고 1년 후인 1908년에는 일본의 더러운 야욕이 더 드러나게 되는데요.

바로 대한제국의 땅과 자원을 수탈하고 경제권 침탈을 하기 위해 동양척식회사를 만들어 착실히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1909년 7월에는 이토 히로부미 다음 통감으로 부임한 소네 아라스케는 행정권과 사법권을 박탈해버렸으며 9월에는 의병들을 대대적으로 토벌해버리기까지 했죠.

우울한 나날이 계속되던 가운데 그나마 좀 좋은 소식이 한 가지 있었는데요.

그것은 바로 이해 10월 26일, 독립운동가 안중근에 의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사살된 것입니다.

 

그리고 각지에서 의병활동이 일어나고, '애국계몽운동', '실력양성운동' 등 여러 운동들도 일어났지만 악랄한 일본의 침탈 야욕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죠.

순종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내부대신 송병준 그리고 일본의 엄청난 압력으로 인해 한 번도 반항하지 못하고 나라의 국권을 하나하나 일본에 넘겨주게 되었는데요.

 

소네 아라스케의 뒤를 이어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3번째 통감으로 부임했고 그렇게 대한제국의 정치, 경제, 행정, 사법, 외교, 인사, 군사 등 모든 부분을 빼앗은 일본은 비로소 대한제국을 병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일본은 순종에게 한일 병합 조약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지만 순종은 이 말도 안 되는 조약에 끝까지 동의하거나 서명하지 않았죠.

 

그러나 8월 22일, 당시 총리대신이던 이완용이 대신 서명하였고 일본은 모든 절차와 형식은 개무시한 채 그냥 강제로 대한제국을 병합하고 말았습니다.

거기다가 '강제로 빼앗었다' 보다는 '넘겨주었다'가 보기가 좋으니 순종이 일본 천황에게 합병을 청원하는 방식으로 진행시켰는데요.

 

그 청원 내용을 좀 간략히 하면 '나 순종은 한국의 통치권을 믿고 의지하던 이웃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할테니 백성들은 번거롭게 소란 일으키지 말고 일본제국의 문명한 새 정치에 복종하여 행복을 함께 받으라' 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렇게 1910년 8월 29일, 비로소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것이죠.

이를 우리는 '경술년에 나라가 겪은 치욕'이라는 뜻의 '경술국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후 순종은 모든 권한을 잃고 조선령 왕공족으로써 이왕(李王)이라는 직위를 받게 되었습니다.

일본 황족보다는 낮고 일본 귀족들보다는 높은 위치였죠.

그리고 창덕궁에 살면서 쇼토쿠큐(昌德宮:창덕궁) 이왕이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그는 한일 강제 병탄 이후 당구를 치며 세월을 보냈다고 하죠.

또 순종은 독특한 행보를 보이기도 했는데요.

최초로 창경궁을 개방해 백성들에게 공개했으며 황실 유물들도 공개해 구경하도록 했고 이는 한국 최초의 박물관으로 인정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일본의 협박과 강요로 인해 1917년 6월에는 강제로 도쿄로 가서 일본 천황을 알현하기도 했죠.

시간이 흘러 1919년 1월, 고종이 세상을 떠나게 되고 순종은 고종의 장례식 때 양복이나 일본식 복장을 갖춘 문상객이 오면 등을 돌리고 절을 받지 않았으며 그래서 일본인 고관대작들은 한복을 구해 입고 문상을 왔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순종-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는 1926년 4월 25일, 심장마비로 창덕궁에서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죠.

순종의 국장 때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나긴 했지만 3.1운동처럼 전국적으로 번지지는 않았습니다.

순종은 사망하기 전에 유언을 남겼는데 주된 내용은 한일 병합 조약의 조인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 자행되었으며 자신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내용이었죠.

 

이는 궁내부 관리였던 조정구라는 인물에게 전해져 미국의 한인신문인 신한민보에 기재되었는데 이 유언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증명할 수 없다고 합니다.

순종은 대한제국의 황제로써 일본에 대항해 무언가를 하려고 했던게 전혀 없었고 친일파와 일본에 의해 휘둘리기만 했으며 대한제국 멸망 후에는 이왕이라는 직위에 만족하며 창덕궁에서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이유로 엄청난 비판을 받았죠.

 

하지만 그가 황제가 되기 전부터 이미 나라는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기 때문에 순종이 나라를 망쳤고 다시 일으켜 보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그에게 모두 전가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이미 할 수 있는 모든 저항은 고종이 해봤었고 다 실패했죠.

그리고 아버지도 일본에 의해 독살이 당했을 수도 있는 의문이 있고 어머니도 일본 낭인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했으니 그도 사람이기에 무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담으로 궁녀가 순종에게 여러 이야기를 읽어준 적이 있다고 하는데요.

이날도 어떤 이야기를 읽어주다가, 나라가 망한 부분을 읽자 순종은 그 궁녀의 뺨을 때리며 자신을 능멸했다면서 화를 냈다고 하죠.

이 이야기는 비록 야사이지만 순종 역시 나라가 얼마 안 가 망할 것이라는 걸 느끼고 있었던 걸로 보이네요.

 

조선 말기, 너무나도 암울한 시대에 태어나 황제로 즉위해 일본에 의해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하다 망해가던 나라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지켜만 봐야 했던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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