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의 조선시대에는 많은 사건사고가 있었는데요.
그중에서도 온갖 재앙이 한꺼번에 생겨 2년 만에 무려 100만명이 굶어 죽은 '경신대기근'이 발생했습니다.
생지옥이 따로 없던 진짜 헬조선이었는데 심지어 굶주린 백성들은 살기위해 자식까지 잡아먹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네요..
조선시대인 1670년 경술년부터 1671년 신해년까지 2년 동안 조선에서는 역사상 유례없는 지옥이 펼쳐집니다.
조선 팔도에서는 이상 기온 현상으로 인해 당시 조선 인구 약 1300만 명 중 최소 30만 명에서 최대 85만 명에 달하는 사람이 굶어 죽어버린 대사건이었죠.
차라리 왜란이나 호란이 발발했을 때가 더 괜찮았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이 처참한 사건에 휩쓸려 사망한 사람들은 계급이나 위치를 따지지 않았죠.
일반 백성들뿐만 아니라 당시 돈 많고 부자이던 왕족, 사대부 할 것 없이 모두가 굶어 죽어나가는 참혹한 해가 되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그야말로 헬조선이 따로 없었죠.
시간이 흐른 뒤 이 지옥 같았던 2년을 가리켜 경술년과 신해년 두해의 앞 글자를 따서 '경신 대기근' 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17세기 지구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바로 기온이 약 1도 정도 떨어져 버린 소빙하기 기후가 나타난 것이죠.
그러자 인도에서는 데칸 대기근이 일어나 최소 300만에서 최대 700만 명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고 일본에서도 칸에이 대기근과 엔포 대기근이 발생했으며 중국에서도 천진운하가 녹을 시기에 녹지 않았죠.
그리고 조선에서 역시 심상치 않고 불길한 징조가 연이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1670년 음력 1월 1일부터 햇무리가 졌는데 안쪽이 붉은색이고 바깥쪽이 푸른색을 띠고 있었습니다. (본문의 날짜는 모두 음력 날짜입니다)
6일부터는 금성이 낮에도 보였고 1월 9일과 10일에는 유성이 떨어지기도 했으며 한 달 내내 햇무리와 달무리가 매일같이 관측되었죠.
햇무리나 달무리가 관측되면 다음날 비가 올 것으로 예측하는데 이것이 매일 관측된 것은 유례없는 일로 뭔가 심상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전라감사가 보낸 파발이 한양에 당도했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전라도 영암, 영광에서 온 파발은 1월 4일과 5일에 대문과 창문이 흔들릴 정도의 강력한 지진이 발생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곧이어 충청도에서도 급박한 소식이 도착했죠.
그것은 충청감사가 보낸 급보였는데 충청도에서 역병이 발생해 500명 이상이 이미 발병했고 사망자가 30명에 달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어서 전라도에서도 급한 보고가 올라왔는데 이미 역병이 전라도까지 퍼져 600여 명이 역병에 걸렸고 사망자가 43명에 달했다는 보고가 연이어 올라왔죠.
거기다가 1월 13일과 21일에도 유성이 관측되었고 유성이 자주 떨어지자 많은 양의 먼지를 만들어 냈으며 그러다보니 마치 먼지가 내리는 듯 낮에도 하늘이 어두워졌습니다.
먼지가 해를 가리면서 컴컴해진 세상은 기온이 더 떨어졌으며 서늘하고 불길한 기운이 온 나라를 뒤덮었죠.
심상치 않은 일은 연이어 발생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경기도와 경상도에서 급한 파발이 도착했는데 경기도 교동과 통진, 경상도 안음, 거창에서도 지진이 발생했다는 것이었죠.
2월 들어서는 역병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본격적으로 비가 안 오기 시작해 땅이 바짝바짝 마르면서 강한 가뭄이 온 나라를 덮쳤죠.
2월 26일에는 봄이 시작되기 직전이었지만 아침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해서 정오쯤에는 팥만한 크기의 우박이 떨어졌습니다.
3월(양력 4월~5월쯤)에는 경상도에서도 우박이 떨어졌다는 보고가 올라왔고 곧 있으면 모내기를 해야 할 시기가 도래했지만 비가 오지 않아 모내기 조차 할수 없었으며 심지어 우물이나 냇가도 말라가기 시작했죠.
하지만 비는 오지 않았습니다.
계속 우박만 떨어지는 날이 계속되었고 밤이 되면 서리까지 내렸으며 이미 파종을 하기에도 늦어 1년 농사가 죽을 쑤기 일보 직전이었죠.
하지만 얼마 안가 큰비가 쏟아졌지만 너무 늦게 내린 비는 이미 완벽하게 망쳐버린 농사를 되살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비도 이게 끝이었고 그 후부터는 지독한 가뭄으로 이어졌으며 우박만 내리자 곡식들은 모조리 말라 죽어갔고, 우박이 어찌나 컸는지 4살짜리 아이가 우박에 맞아 사망하는 일도 벌어졌죠.
이미 농사는 엄청난 흉작으로 끝난 마당에 또다시 큰 비가 내렸는데 그러자 상황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역병은 사그라들 기색이 없었고 여기다가 이제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메뚜기떼가 창궐하기 시작했는데 메뚜기떼가 휩쓸고 간 자리엔 먹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죠.
전국 거의 대부분의 백성들이 굶주리기 시작했습니다.
몇 날 며칠 동안 굶는 건 흔한 일이었죠.
내리라고 할 때는 내리지 않던 비가 6월에 접어들고 나서부터는 전국적으로 엄청난 양을 쏟아붓기 시작했는데 전라도에서는 길이 냇가가 되었다고 보고가 올라왔고 함경도에서는 홍수와 함께 거의 달걀만 한 우박이 떨어져 사람과 동물들이 우박에 맞아 사망하는 경우도 발생했죠.
비가 얼마나 왔는지 충청도에서는 물에 빠져 죽는 사람이 생겼고 경상도 역시 수해를 입어 산사태에 민가가 휩쓸려가 일가족이 몰살당하는 사고가 터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7월부터는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굶어죽기 시작했는데요.
최초의 아사자가 보고 되면서 조선은 이제 생지옥으로 변모하기 시작하죠.
하필 엄청난 비와 바람을 머금은 강력한 태풍이 전국을 휩쓸어버렸고 또다시 메뚜기떼와 참새떼가 창궐해 모든 음식물을 싹 쓸어버렸으며 도토리나 밤 등도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7월에는 우박과 서리 그리고 눈까지 내리니 조금이나마 남아있었던 추수를 앞둔 벼들이나 작물들도 모두 얼어 죽거나 말라죽었고 귤이나 유자, 소나무, 대나무 역시 바짝 말라 열매들이 다 땅에 떨어져 썩어갔으며 조나 콩 같은 작물들도 모두 말라 열리지조차 않았죠.
이에 현종은 기청제를 지내기도 하고 구휼미를 보내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할 수 있는 일을 했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고 폭우와 강풍을 동반한 초대형 태풍은 이내 제주도와 경상도를 덮쳤습니다.
해일이 제주도를 덮쳐 식물들은 짠 바닷물에 적셔져 말라죽었으며 먹을 음식은 커녕, 풀이나 나무들마저 다 말라 비틀어져 죽었죠.
제주 목사는 정부에 지원 요청을 했지만 태풍 때문에 물길마저 막혀버렸고 제주 목사 노정이란 사람은 백성들과 함께 항구까지 나와 오지 않는 배를 기다리다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더 심각한 사태가 발생하고 마는데 소에게도 역병이 창궐해 7월 한 달에만 소 897마리가 폐사했고 8월에는 약 15,000마리가 죽었을 만큼 심각했죠.
그리고 11월까지 총 22,000여 마리의 소가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8월부터는 본격적으로 아사자가 엄청난 속도로 늘어나기 시작했는데요.
1월부터 시작된 냉해, 가뭄, 지진, 역병, 수해, 풍해, 병충해 그리고 소들까지 떼죽음을 당하면서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흉작이 백성들을 덮쳤고 전국 팔도에서는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해 전국이 울부짖었으며 사람들은 살길을 찾아서 살던 곳을 버리고 떠돌아다니기 시작했죠.
심지어 또다시 영남, 호남, 충청도에서는 강력한 지진이 발생했으며 서서히 가을로 접어들면서 차가운 비까지 내렸습니다.
함경도 쪽에 있던 사람들은 차디찬 비에 우박까지 겹쳐 살기 어려울 정도가 되자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만주 땅으로 먹을 것을 찾아 넘어가기도 했으며 이 일은 청나라와 국경분쟁을 야기하기도 했죠.
8월 중순과 하순에는 폭풍우가 조선의 남부 지방을 강타해 경상도에서는 익사자만 수십 명에 달했고 강풍에 아이가 날아가 추락해 사망하는 사건도 발생했죠.
거의 모든 작물과 식물들은 얼어 죽거나 말라죽었습니다.
각지에서 아사자가 속출했고 기근은 계급을 가리지 않았죠.
영의정 이경석, 우의정 홍중보 등의 재상들과 병조판서, 형조판서 등 당시 최고의 관직에 있던 사람들을 포함해 왕족들과 사대부 양반들 역시 굶어죽거나 병들어 죽었습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조정에서는 금지되었던 소의 도축을 허용했는데 이미 예전부터 소를 무단으로 도축해 잡아먹고 있었고 역병에 걸려 죽어 묻어놓은 소를 다시 파내어 먹는 일도 허다했죠.
당시 제주도의 인구는 42,700여 명이었지만 불과 한 달 만에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백성이 굶어죽어버려 인구가 고작 27,500여 명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윽고 혹독한 겨울이 찾아왔고 먹을 것을 찾아 떠돌아다니던 사람들이 이제는 굶어죽기도 하고 얼어 죽기도 하면서 더 지옥 같은 상황이 펼쳐졌죠.
사람들은 남의 옷을 빼앗거나, 길거리에 많았던 죽은 시신의 옷을 벗겨 입기도 했습니다.
1년 내내, 계속해서 역병은 사그러들지 않아,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죽여나갔고 소들에게 퍼진 역병으로 소들 역시 계속해서 폐사했으며 지진과 해충에, 비와 우박 등, 모든 악재가 겹치며, 점점 조선땅은 살 곳이 못되어 갔죠.
1671년 신해년 새해가 밝았지만 그해 봄, 보리수확은 커녕 상황은 더 악화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조정에는 각지의 보고서가 빗발쳤는데 이미 굶어죽은 사람의 수는 수만 단위를 넘어서고 있었고 어딜 가든 굶어죽은 시체가 길거리에 나뒹굴었죠.
사람들은 떠돌아다니며 너무 굶주렸다 보니 면역력은 극도로 나빠져 있었기에 역병에 걸리면 이내 곧 죽었고 여기저기를 다니며 역병을 퍼트리고 다니다보니 역병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1월에 한양에서는 진휼소를 열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유랑민들은 한양으로 몰려들었고 이에 따라 역병은 빠르게 한양에 퍼져나갔으며 궁을 경비하던 병사들과 궁녀들까지도 역병에 걸려 현종의 안위에도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죠.
심지어 임금의 누이인 숙경공주도 역병에 걸려 사망했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으며 양반들과 왕실 종친들 또한 굶어죽거나 역병에 걸려 죽거나 둘 중 하나였을 만큼 한양도 생지옥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자 관리들은 한양을 떠나기 위해 사직서를 내는 사람이 굉장히 많았고 이로 인해 여러 텅 빈 관청들이 생길 정도로 행정에 공백이 발생하기 시작했죠.
당시 영의정이던 허적은 열네 번이나 사직서를 제출했지만 현종은 그의 사직서만은 수리해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양 시내에도 병사자와 아사자의 시체가 길거리에 가득 차버렸는데 관리들이 수습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버려 결국 승려들까지 동원해 시신 수천구를 한꺼번에 매장한 경우도 있죠.
한양도 이러했으니 이미 각 지방은 아수라장이 되어있었습니다.
오랫동안 계속된 굶주림과 추위로 인해 서로 도둑질을 하기 시작했고 조금의 양식이라도 있는 집에는 어김없이 약탈 당했으며 옷마저도 강도질에 빼앗겼죠.
심지어 무덤을 파 시신이 입고 있던 염의를 훔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전국에선 현재는 물론이고 과거에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잔혹한 패륜 사건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죠.
사람이 사람을 먹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독한 배고픔 앞에서는 가족이고 뭐고 아무것도 필요 없었는데요.
더 이상 가족들을 건사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갓난 아이를 도랑이나 강물에 던져버리기도 했으며 아이를 나무에 묶어두고 가버리는 부모도 있었죠.
어떤 굶주린 남자가, 죽을 나눠주는 곳에서 기다리다 지쳐 쓰러져 죽었는데 그의 아내는 먹던 죽을 다 먹고 나서야 슬퍼했다고 합니다.
늙은 어머니를 엎고 구걸하던 남자는 어머니를 길에다 버리기도 했고 아이를 안고 가던 어머니는 갑자기 돌변해 아이를 바닥에 버리고 가버렸죠.
어떤 부모는 5살 딸과 3살 아들이 병들어 죽자, 죽은 자식들을 삶아 먹었는데 그 부모의 모습은 이미 사람이 아닌 마치 귀신과 같았으며 실성을 한듯한 표정이었다고 하죠.
이 사건은 평소 같으면 나라 전체가 들썩일 정도의 너무나도 참혹한 사건이었지만 이때는 사람을 먹는 일은 흔하디흔한 일이라 조정에서도 "굶주림이 절박했고 진휼이 허술했기에 이런 일까지 벌어졌다" 라고 하면서 넘겼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조정에서는 이렇다 할 대책을 내놓을 수 없었죠.
다 같이 머리를 싸매고 대책을 세우려 해도 모든 자연재앙이 한꺼번에 겹친 격이라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죽고 죽던 1671년도 지나가고 12월이 되었을 즈음 윤경교가 2년간 사망자가 100만 명에 육박한다고 조정에 보고서를 올렸고 실제로 불과 2년의 기간 동안 최소 30만에서 많게는 85만 명까지 사망했다고 보고 있죠.
기근이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을 무렵에는 이미 조선에 모든 지역은 길거리에 시체가 가득한 지옥보다 처참하고 잔혹한 모습이었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라 대기근이 일어나기 전부터 백성들의 삶은 워낙 팍팍했었기 때문에 별로 대비도 되어있지 않은 상황에서 갑자기 여러 재해가 덮치니 조정이든 백성이든 모두가 이를 대처하기가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심지어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왜란이나 호란을 겪었던 노인들은 "이런 끔찍한 상황은 태어난 이후 보지도 듣지도 못한 일로 참혹하게 죽어 나간 것이 임진년의 병화(兵禍)보다도 더하다"라고 했을 정도였죠.
전쟁의 화마가 이때보다 더 나았다고 했을 정도로 참혹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부유했던 양반들이나 심지어 왕족들까지 굶어죽었을 정도면 당시 상황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알 수 있죠.
조선왕조 500년 동안 기근은 흔하게 발생한 일이었지만 이 경신 대기근은 여느 기근과는 차원이 다르게 한반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자연재해가 한꺼번에 전부 발생한 대재앙이나 대참사라고 불러도 부족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역시 자연의 힘은 위대하고 인간이 감히 맞설 수 없는 것 같네요.
조선 현종시대에 있었던 이상기후로 인해 역사상 최악의 아사자가 발생했던 사건, 경신 대기근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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