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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정주영. 대한민국 1세대 기업인으로 현재의 현대그룹을 만든 일명 왕회장이라 불린 인물의 기적에 가까운 이야기들

by 사탐과탐 2021.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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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회장은 현재의 현대 그룹을 만든 일명 왕회장이라 불렸었는데요.
대한민국 1세대 기업인으로서 많은 역경을 헤쳐나가면서 일어난 수많은 기적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오늘은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인, 현대그룹의 창업자 일명 왕회장 이라고 불렸던 인물이자

"이봐, 채금자(책임자). 해보기나 했어?"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등의 명언을 만들어낸 명언 제조기 이기도 한 인물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이렇게 많은 어록과 별명을 가진 그는, 바로 정주영 회장이죠.

 

초등학교만 나와서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을 일군 정주영 회장은 인생 자체가 한편의 드라마나 영화 같은데요.

그에 대한 흥미롭고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해볼까 합니다.

 

(정주영 회장 -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정주영 회장이 어릴 적, 집을 떠나 서울로 가는 길에 강을 건너야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뱃값을 낼 돈이 없었죠.

그래서 어떡하지 망설이다가 그냥 돈도 없이 배를 타버렸는데 목적지에 도착해서야 그가 돈이 없는걸 알게 된 뱃사공이 정주영 회장의 따귀를 때리며 "후회되지?"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정주영 회장은 "네, 후회되네요, 따귀로 뱃삯을 치를 수 있는 줄 알았다면 망설이지 말고 탈 걸 그랬어요" 라고 받아쳤다고 하죠.

그만큼 배포가 남달랐던 정주영 회장이었는데요.

 

그가 현대 그룹을 하기 전에 자동차 수리 공장을 한 적이 있는데 공장이 화재로 다 타버리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잠시 외출했다가 돌아와보니 자신의 전 재산이었던 공장이 불타고 있는 것을 본 정주영은 깊은 탄식이 나왔지만 곧 마음을 가다듬고 직원들에게 "야 괜찮아! 어차피 건물이 낡아서 헐어버리려고 했으니 철거비 굳은 셈이지. 자, 기운차리고 막걸리 파티나 하자고."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나서 오윤근이라는 사람을 찾아갔는데 그는 예전에 정주영 회장이 쌀가게를 할 때 알게 된 후원인이었죠.

또한 오윤근은 사람 보는 눈이 좋아 돈을 빌려주고 떼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빌린 돈으로 만든 공장이 불로 다 타버리자 정주영 회장은 그를 다시 찾아가 "여기서 내게 빌려준 돈을 떼이면 당신의 이력에도 흠이 생기지만 돈을 더 빌려주면 그 돈으로 또 재기해서 갚아주겠다" 라고 말했죠.

 

이 말에 후원인인 오윤근도 돈을 떼인 적이 없는 기록이 깨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돈을 더 빌려줬고, 정주영 회장은 훗날 약속대로 돈을 다 갚았다고 합니다.

둘 다 참 대단한 사람이죠.

 

(정주영 회장 -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정주영 회장은 훗날 현대토건사라는 건설회사를 차렸습니다.

어느 날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한국에 방문을 하는 일정이 잡혔는데 그때 UN묘지에서 행사를 하게 되었죠.

 

그래서 미군에서는 UN묘지의 잔디 심는 일을 맡기려고 했는데 그때가 한겨울이다 보니 잔디를 구하지 못했고 어떤 업체도 그 일을 맡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정주영 회장은 그 일을 받아들였고 트럭 30여 대를 동원해 초록색 보리싹을 사다가 UN묘지에 심었죠.

 

그렇게 아무 문제 없이 행사를 무사히 마치게 되었습니다.

이후 겨울이 지나고 나서 보리를 전부 뽑은 뒤 다시 잔디를 심어 마무리했고 이 일로 인해 미군에게 신뢰를 얻게 되었으며 이후 미군은 정주영 회장에게 많은 일을 맡기는 계기가 되었죠.

 

어느 날 박정희 대통령은 정주영 회장을 불러 조선소를 만들라고 지시했습니다.

정주영 회장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했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불같이 화내며 무조건 해내라고 했다고 하죠.

그러자 정주영 회장은 미포만 해변 사진과 지도, 유조선 설계도를 가지고 조선소를 만들기 위한 돈을 빌리려 유럽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게 되었습니다.

 

여러 군데에서 퇴짜를 맞은 정주영 회장은 선박 컨설턴트회사의 회장 롱바텀을 찾아갔죠.

그리고 그에게 500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을 보여주며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이나 앞서서 철갑선을 만들었다. 우리는 할 수 있으니 믿어달라"라고 설득해서 결국 그의 추천서를 받아냈고 바클레이스 은행에서 돈을 빌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은행에서는 "배를 구매하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돈을 빌려주겠다" 라는 대답이 돌아왔는데 천신만고 끝에 결국 배를 살 사람을 찾았고 돈을 빌려 조선소를 만들 수 있게 되었죠.

그 배를 살 사람은 리바노스라는 사람이었는데 정주영 회장이 배를 만들지 못하면 계약금에 이자를 얹어주고 만약 배에 하자가 있으면 배도 고쳐주며 뱃값도 돌려주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고 그렇게 리바노스는 계약을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정주영 회장의 말만 듣고 조선소도 없는 사람에게 배를 만들어달라고 한 것이었는데요.

애초에 조선소가 없는데 선박 수주 계약을 받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었고 그렇게 불가능한 것을 은행에서 주문했던 것인데 그 말도 안되는걸 정주영 회장이 해낸 것이죠.

 

(현대 조선 -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렇게 1972년 울산 조선소 건설이 시작되었는데 조선소를 만들면서 배도 동시에 만드는 믿기지 않는 일을 해내기도 했습니다.

조선소가 완공되니 곧바로 유조선이 만들어져 나왔다고 하죠.

 

정주영 회장은 대한민국 최고의 부자가 되었음에도 평생을 검소한 삶을 살며 많은 국민들의 존경을 받았는데요.

구멍 난 양말을 기워서 신고 다니기도 했고 평생 담배도 피우지 않았습니다.

"배도 안 부른데 뭐하러 그 연기 뻑뻑 피워서 돈을 쓰냐?"라고 말했다고 하죠.

 

현대그룹의 회장으로 있던 어느 날 자신의 집에 도둑이 든 적이 있었습니다.

근데 도둑은 돈이 될만한 물건이 없어서 아무것도 훔쳐 가지 않고 "에이~ 왕회장 집이 뭐 이래?"라고 말한 뒤 그냥 가버렸다고 하죠.

 

그렇지만 건강에 관해서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그는 건강을 위해 평소에 산삼을 즐겨 먹었다고 합니다.

1980년 강원도 인제에서 600년 넘은 1m 30cm의 천연 산삼이 나왔다는 말에 얼른 그곳으로 찾아가 거금 7,800만 원을 주고 산삼을 샀고 그 자리에서 전부 먹었다고 하죠.

 

1980년 정부에서는 서산 간척지 사업을 통해 서해안의 바다를 메워 국토 개발을 실시하기로 했는데요.

수지타산이 전혀 맞지 않는 사업이었기 때문에 이일에 나서는 기업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때 정주영 회장이 나서서 서산 간척지 사업을 하기로 한 것이죠.

간척지 사업은 방조제를 쌓아 바닷물을 가두고 그 물을 빼고 메우고 해서 육지로 만드는 것인데요.

 

먼저 해야 할 일은 방조제를 만들어 물을 막는 것, 이를 ‘물막이 공사’라고 하죠.

그런데 착공 5년째 되던 1984년에 한 최종 물막이 공사는 쉽지 않았습니다.

총 길이 6400미터 중 마지막 270미터를 도저히 쌓을 수가 없었던 것이죠.

그곳에는 초속 8미터의 급류가 흘렀는데요.

아무리 큰 돌을 넣고, 덤프트럭들이 끊임없이 돌을 날라도 전부다 빠른 물살에 휩쓸려 가버렸기 때문이었죠.

 

(정주영 회장 -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남은 270미터를 어떻게 막지 하고 고민하던 차에 정주영 회장은 어처구니없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습니다.

그것은 바로 23만 톤 급 폐유조선을 그곳에 가라앉혀서 둑으로 이용하자는 아이디어였죠.

 

모두가 그런 어이없는 생각에 반대를 하고 나섰지만 정주영 회장은 그 결정을 강행해버렸고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그렇게 골치를 썩히던 물막이 공사는 단 이틀 만에 끝이 나버렸죠.

 

이 폐유조선 공법으로 인해 공사비를 290억 원이나 절감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이 공법은 정주영 공법으로 불리며 미국 타임지에도 소개되었고 영국에서는 템즈강 하류 방조제 공사를 맡은 회사에서 유조선 공법에 대해 문의를 해온 적도 있다고 하죠.

이 공법은 나중에 방조제 막바지 공사를 할 때나 홍수 시 긴급하게 제방을 만들 때도 유용하게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중동에는 오일쇼크로 인해 전 세계의 많은 돈이 엄청나게 몰려있었는데요.

그래서 한국의 건설사들도 중동 시장에 진출했는데 수많은 한국 기업들 중 현대건설이 선두에 있었죠.

중동의 여러 공사들의 입찰에서 다른 나라 건설사들은 합리적인 가격인 100만 달러를 입찰할 때 현대건설은 30~40만 달러를 입찰하는 방식으로 수많은 공사를 따냈습니다.

 

정주영 회장은 공사비를 아끼고, 공사기간도 단축하기 위해 한국에서 모든 기자재들을 준비해 바지선에 실은 뒤 중동으로 옮기기로 했죠.

하지만 태풍이 잦은 바다인 필리핀 해협이나 인도양, 걸프만 등에서 자재를 실은 바지선이 난파 될 가능성이 너무나도 높은 위험한 방법이었지만 결국에 이 계획은 성공하게 되었고 모든 공사들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죠.

 

(정주영 회장 -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런 아무나 할 수 없는 정주영 회장만의 방식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현대그룹 역시 승승장구할 수 있었습니다.

 

여담으로 아내인 변중석 여사 또한 정말 대단한 분이신데요.

그녀는 조용한 내조로 유명합니다.

그러한 내조의 방식 또한 며느리들에게 전수하고 있는데요.

며느리들에게 '남의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마라' 라고 가르쳤다고 하죠.

 

변중석 여사 역시 정주영 회장과 닮았는지 결혼 이후에도 계속 검소한 생활을 했으며 "재봉틀 하나와 아끼는 장독대가 내 재산의 전부"라고 말해왔다고 합니다.

정주영 회장이 사준 자동차는 사용하지도 않고 장을 보거나 필요한 물품을 살 때는 도매시장으로 갔는데 구매한 물품들은 용달차에 싣고 왔다고 하죠.

 

게다가 집에서는 언제나 편한 몸빼바지 차림이어서 집에 찾아온 손님들은 변중석 여사를 일하는 아주머니로 착각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장남 정몽필 사망과 관련된 일화를 보면 변중석 여사는 정말 대단한 인물임을 알 수 있는데요.

그녀가 시집왔을 때 이미 장남 정몽필이 있었다고 합니다.

 

정주영 회장과 변중석 여사의 사이에서 난 자식은 차남 정몽구부터 장녀 정경희까지 4명이었고 또한 오남 정몽헌부터 삼녀 정정임까지 6명의 자식은 모두 외부에서 데리고 온 자식들이었죠.

자식들의 생모가 각자 다르지만 태어나자마자 모두 호적에 올려주었고 첩의 자식이라는 차별도 일체 없었으며 설움 또한 전혀 받지 않게 키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용한 성격의 변중석 여사가 정주영 회장을 향해 소리를 지른 적이 딱 한 번 있었는데요.

장남 정몽필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날, 정주영 회장은 바로 집으로 달려오지 않고 모든 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하죠.

 

아들의 사망 소식을 듣고 통곡 중인 변중석 여사는 뒤늦게 집에 들어오는 정주영 회장을 보자마자 "사업 하느라 애들 다 죽인다" 라며 소리를 쳤다고 합니다.

자신이 직접 낳은 자식이 아니었지만 첫째 정몽필을 집안의 진정한 장남이자 자식으로 여겼던 것이죠.

 

정주영 회장이나 아내 변중석 여사 둘 다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던 것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입니다.

정주영 회장이 했던 여러 일들을 보면 확실히 될놈될이라는 말이 맞는거 같기도 하네요.

 

현대그룹의 창업주, 대한민국의 경제를 일으킨 1세대 기업가 정주영 회장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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