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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왕의 사위이자 공주 또는 옹주의 남편인 '부마'의 억눌린 삶에 대한 이야기

by 사탐과탐 2021.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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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사위이자 공주 또는 옹주의 남편인 부마는 결혼 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억눌린 삶을 살았는데요.
평생을 감시당하며 몸조심해야 했던 부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부마도위(駙馬都尉)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과거에 왕이나 황제들은 항상 암살의 위협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황제가 어디론가 행차를 할 때 같은 마차를 여러 개 준비해 어느 마차에 황제가 타고 있는지 모르게 했었는데요.

이 황제의 마차들을 끄는 말을 부마(駙馬) 라고 불렀고 부마들을 관리하던 직책을 부마도위 라고 했었죠.

 

이렇게 보면 별거 아닌 직책처럼 보이지만 황제가 어느 마차에 타고 있는지는 극비사항이었고 이 사실을 혼자만 알고 있는 직책이다 보니 부마도위로 임명되는 신하는 황제가 가장 믿고 있는 신하이기도 했습니다.

 

오나라를 정벌하고 중국 삼국지의 끝을 맺은 사마염이 이 부마도위에 사위를 임명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황제들도 계속해서 사위를 부마도위로 임명하면서 부마도위는 황제 또는 왕의 사위라는 인식이 굳어진 것이죠.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부마도위들이 맡았던 역할도 희미해지기 시작했고 부마도위, 즉 부마는 명예직에 가까워졌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오늘은 바로 황제와 왕의 사위, 부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고려시대에 원 간섭기 시절에는 고려의 왕들은 원나라 황제의 딸들과 결혼을 해 부마국으로 불릴 때도 있었죠.

이때 고려로 시집온 원나라 공주들은 강력한 친정의 힘을 등에 업고 고려에서 온갖 횡포를 부렸으며 남편인 고려왕들 조차 업신여길 정도였습니다.

 

시간이 지나 조선시대에는 예의를 갖춘 손님이라는 의미로 부마를 '의빈(儀賓)'이라고 부르기도 했죠.

부마는 왕의 사위이자 공주의 남편이 되는 것이니 그냥 생각해 보면 정말 대단한 권력을 얻거나 높은 벼슬에 오를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부마가 되는걸 꺼려 할 정도였죠.

 

부마는 왕실의 일원으로써 대군이나 군들처럼 항상 감시를 받으며 살았고 과거에 응시는 커녕 높은 관직에는 오르지 못했으며 주어진 관직은 명예직 정도의 실권이 없는 벼슬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왕의 명을 받아 공문서를 작성하거나 아니면 중국에 갈 사신단을 꾸릴 때 사신단의 수장을 부마나 왕족이 맡는 경우가 많았는데 실권은 전혀 없고 사신단의 격을 높여주는 상징 정도로 따라가는 것이었죠.

그런데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좋지 않은 결말을 맺기도 했는데요.

 

이성계의 셋째 딸인 경순공주와 결혼한 부마 '이제'는 이방원이 일으킨 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 일파로 몰려 죽임을 당했고 경순공주는 비구니가 된 경우도 있죠.

그리고 경혜공주의 남편인 정종은 단종 복위와 관련되어 역모로 몰려 유배를 당했다가 훗날 거열형을 받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외에도 감히 공주나 옹주인 아내를 구타하거나 개무시하는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 바람을 피우다가 왕에게 걸려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는데요.

중종의 딸인 효정옹주의 남편이었던 조의정은 옹주의 여종이던 풍가이와 바람이 나버렸고 이에 효정옹주를 홀대하다가 옹주가 세상을 떠나자 격분한 중종에 의해 장 100대를 맞았고 유배를 가게 되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조선 초까지만 해도 추천이나 중매로 부마를 뽑았었죠.

하지만 태종 때에 큰일이 한번 있은 후부터 간택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태종이 신빈신씨의 소생인 정신옹주를 시집 보내려고 지화라는 점쟁이를 시켜 궁합이 잘 맞는 남자를 찾아보라 명했죠.

 

그렇게 지화는 여러 양반집을 돌며 부마가 될만한 남자를 찾았는데요.

춘천 군수를 지냈던 '이속'의 집에 갔는데 이속은 지화에게 "내 아들을 여종의 딸에게 장가보낼 순 없다. 내 아들은 죽었다. 근데 상대가 정혜옹주라면 살아있을 수도 있다."

라고 말하며 지화를 쫓아내 버렸습니다.

 

사실 정신옹주의 어머니인 신빈신씨는 원경왕후 민씨를 모시던 여종이었고 정혜옹주의 어머니인 의빈권씨는 간택까지 받아 후궁이 된 양반집 규수 출신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천한 신분의 소생인 정신옹주에게는 우리 귀한 아들을 장가 보내지 않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에 개빡친 태종은 자존심도 상했을뿐더러 왕실을 기만한 죄로 이속을 잡아 곤장 100대를 때린 후 전 재산을 몰수했으며 그를 노비로 삼아버렸죠.

또한 이속의 아들은 평생 혼인하지 못하게 하는 벌을 내렸습니다.

이일이 있은 후부터 부마는 간택령에 의해 선택되었고 부마로 간택이 되면 좋든 싫든 무조건 왕의 사위가 되었어야 했죠.

 

자신의 아들이 부마가 되면 그 부모들은 며느리를 모시고 살기 시작했는데요.

공주든 옹주든 신분 자체가 넘사벽이라 며느리에게 깍듯이 존댓말을 했어야 했고 시집살이는 커녕 며느리 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당시 효도가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였지만 공주나 옹주는 시부모에게 절을 안 해도 괜찮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또한 부마는 재혼도 하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첩도 둘 수 없었죠.

설사 아내인 공주나 옹주가 일찍 사망해도 재혼할 수 없었고 아내를 내쫓는 7가지 상황을 말하는 '칠거지악'에 해당 되더라도 아내를 내쫓거나 이혼은 불가능했습니다.

 

또한 혹시 아내가 아들을 못 낳고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도 재혼은 하지 못하고 대를 이으려면 양자를 들이는 수밖에 없었죠.

세조의 딸 의숙공주는 정인지의 아들 정현조와 결혼을 했는데요.

하지만 의숙공주는 후사를 남기지 않고 일찍 사망을 해버렸죠.

 

부마인 정현조는 대를 잇기 위해 당시 명문가였던 이징의 딸과 재혼을 했습니다.

하지만 부마는 재혼을 할 수 없다는 법에 따라 이징의 딸은 정식 부인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첩이 돼버렸으며 자식들은 모두 서자로 신분이 강등되었죠.

 

심지어 당시 왕이었던 성종은 부마가 몰래 재혼한 것에 대해 처벌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 좋지 않은 경우도 있었는데요.

부마 작위는 결혼을 하기 전에 받았었기 때문에 혹시나 결혼식을 올리기도 전에 공주가 죽으면 결혼도 못 하고 재혼도 못하며 평생을 혼자 살았어야 하는 경우도 있었죠.

 

효종의 딸인 숙녕옹주는 박필성과 결혼하고 2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 이후 박필성은 80년이라는 긴 세월을 혼자 살다가 96세의 나이로 사망을 했습니다.

또한 조선후기에 결혼하고 3개월 만에 홀아비가 된 부마도 있었는데요.

바로 영혜옹주의 남편이었던 박영효가 그랬죠.

 

(박영효 가족사진 -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영혜옹주는 철종의 딸이었는데요.

1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고 그렇게 박영효는 고종의 허락하에 첩을 들이긴 했지만 정실부인을 들이지는 못했으며 사망하고 나서는 영혜옹주와 같은 묘에 묻혔습니다.

 

자신이 과거를 보고 출세를 해서 높은 관직에 오르려던 야망이 있는 인물들이 부마로 간택이 되어버리면 이 사태에 대해 엄청나게 실망을 해 아내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술에만 빠져 허송세월을 보내버리기도 했죠.

그렇다 보니 양반 가문에서는 장남이나 장손이 부마가 되는 것을 반기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부마는 주로 아들이 많은 집안의 막내가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원치 않는 부마가 된 남자들은 상심해서 기방을 들락날락 거리거나 기생과 잠자리를 가지는 경우도 허다했는데 부마의 억눌러져 있는 상황을 참작해서인지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고 하죠.

그런데 부마가 되는 것이 무조건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는데요.

 

왕실과 사돈지간이 된다는 것 자체가 가문의 영광이었고 바로 당대 최고의 명문가로 집안이 급부상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죠.

또한 부마가 된 본인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지만 부마의 형제나 부모, 친척들은 출세에 있어서 많은 혜택을 받기도 했습니다.

또한 자식들은 왕실의 외손자라는 이유로 높은 벼슬에 올랐죠.

 

거기다가 공주들이 시집오면서 가져오는 지참금의 규모가 일반 양반 집안의 딸들이 가져오는 것과는 레벨이 달라서 그 돈으로 집안 자체를 일으키는 경우도 굉장히 많았습니다.

별다른 야망 없이 얇고 긴 삶을 살길 원하는 남자가 부마가 된다면 그보다 좋은 조건은 없었을 것 같지만 권력의 끝을 보고 싶어 하는 강한 야망을 가진 남자들에게는 이보다 최악의 결혼생활은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오늘날 남자들에게 부마 같은 상황이 주어진다면 이보다 꿀 빠는 결혼생활은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긴 하네요.

왕의 사위가 되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평생을 놀고 먹는 수밖에 없었던 부마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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