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왕들은 왕후 뿐만 아니라 수많은 후궁들을 두었었죠.
후궁들의 출신은 당연히 왕족이나 양반집 딸 또는 최소 궁녀들이었어야 했을텐데요.
조선시대 유일하게 가희아는 기생출신으로써 태종의 눈에 들어 후궁까지 된 여인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궁에서 하는 연회에 불려가 춤을 추고 흥을 돋구는 기생이 있었습니다.
일패기생이 그렇고 또한 예전에 소개해드린 초요갱도 그런 기생이었죠.
오늘 소개해 드릴 인물도 궁으로 가서 춤을 추던 그런 기생입니다.
근데 정말 특이한 점은 그는 나중에 옹주가 되는데요.
옹주라는 호칭은 왕의 후궁이 낳은 딸을 이렇게 부른다고 알고 있었는데 고려시대에는 왕의 후궁이나 왕녀에게 주는 봉작이기도 했다고 하죠.
고려시대의 호칭이 조선 초기로 이어져 왕실 여인을 궁주나 옹주라는 호칭으로 부르다가 이후 궁주 라는 호칭은 사라졌고 조선 중기 이후부터 옹주는 왕과 후궁 사이의 딸을 지칭하는 단어로 굳어졌다고 합니다.
오늘 이야기할 시기가 바로 조선 초의 일이라 아직까지는 고려시대의 영향이 좀 있었나 봅니다.
아무튼 기생으로 시작해 옹주가 된 이 여인은 바로 '가희아' 라는 여인이었죠.
그녀는 보천이라는 곳의 기생 출신이었습니다. (보천甫川: 현 경상북도 예천군)
성은 홍씨인데 실제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고 가희아란 이름은 기생 관명이었죠.
독특한 점은 그녀가 언제 태어났고 언제 사망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이런 점을 보면 일반 백성의 딸로 태어났을 확률이 높죠.
아무튼 그녀는 가무에 특출한 재능이 있다 보니 궁에서 연회가 있는 날이면 항상 불러들이던 기생이었다고 합니다.
뛰어난 미모에 황홀한 춤으로 여러 왕실 종친들과 대신들을 홀리던 그녀는 당연히 남정네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고 하죠.
그러다보니 그녀로 인해 어처구니없는 사건도 발생했는데요.
태종 7년인 1407년,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을 할 때도 참여했던 인물인 조선의 개국공신 황희석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금 말할 인물은 황희석의 아들 '황상'이라는 사람이죠.
그는 당시 무신이었는데요.
대호군이었던 황상이 가희아를 첩으로 삼게 되었죠.
그러나 가희아를 첩으로 삼고 싶어 하던 인물이 또 하나 있었으니 그는 바로 '김우'라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방원이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을 때 그를 도와 공을 세워 공신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었죠.
김우는 가희아가 황상의 첩이 되기 전에 그녀와 몇 번 관계를 맺은 적이 있었는데요.
김우는 그런 가희아를 잊지 못하고 있던 것입니다.
어느 날 궁의 연회에 불려간 가희아는 연회가 끝나고 나서 황상의 집으로 돌아갔죠.
그러자 김우는 기병과 보병 30여 명을 이끌고 황상의 집으로가 그 집을 포위하고 집안으로 들이닥쳤습니다.
바로 가희아를 납치해 가려는 목적이었죠.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집안을 샅샅히 뒤져도 가희아를 찾을 수 없었고 아쉬운 대로 가희아의 옷가지들만 챙겨서 돌아왔습니다.
이조차도 말이 안 되고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지만 더 큰일은 다음날에 일어났죠.
다음날 낮에 가희아가 말을 타고 저잣거리를 지나가는 도중이었습니다.
그녀의 위치를 파악한 김우는 자신의 종들을 보내 가희아를 납치해버렸죠.
이 소식을 들은 황상은 너무 격분한 나머지 20여 명의 군사들에게 몽둥이를 쥐어주고 말을 몰아 납치한 자들을 뒤쫓기 시작했습니다.
김우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죠.
그는 30여 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나섰고 이 두 무리는 저잣거리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서로 몽둥이를 휘두르며 패싸움을 시작했는데요.
기생 한 명 때문에 군사들을 동원해 대낮에 쌈박질을 한 대참사가 발생한 것이었죠.
이 어처구니없는 일은 얼마 안 가 태종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태종은 이 일에 주동자인 황상을 파직시켜버렸고 가희아에게는 곤장 80대를 선고했죠.
하지만 곤장을 맞지는 않았고 벌금을 내는 것으로 대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싸움질을 한 군사들은 모두 멀리 있는 수군으로 보내버리는 처벌을 내렸죠.
다만 김우는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는데요.
이유는 바로 공신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대낮에 일어난 패싸움은 일단락되는듯 했지만 가희아에 대한 기록은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또다시 태종실록에 등장하는데요.
어느 날 태종이 한 신하에게
궁의 연회 때마다 와서 춤추던 기생이 요새 안 보이던데
분명히 어느 대신이 첩으로 데리고 살면서 나가지 못하게 하는거 같으니 그 기생이 어딨는지 한번 찾아보거라.
이에 얼마 안 가 그녀를 찾아내게 되었고 태종은 가희아를 불러들여 그녀를 후궁으로 삼게 되었죠.
사실 예전부터 태종도 그녀를 눈여겨보고 있었고 결국 그녀를 쟁취하게 된 최종 승자는 태종 이방원이었던 것입니다.
기생이 후궁이 된 건 조선시대에는 이 일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는데요.
조선 초까지만 해도 고려 때와 마찬가지로 기생이 얼마든지 후궁이 될 수 있었다고 하죠.
하지만 태종 이후에는 기생이 후궁이 되는 일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시간이 지난 태종 14년 태종은 가희아를 혜선옹주로 책봉했죠.
천한 신분인 기생이 옹주가 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일이었는데요.
그녀는 가희아라는 관명을 따라 가이옹주라고 불리기도 했고 그녀의 성을 붙여 홍혜선옹주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가희아는 태종과의 사이에 자녀를 두지는 못했다고 하죠.
가희아는 후궁이 된 후에 뇌물을 받았다는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 그녀에 대한 기록은 없고 어떻게 살았는지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는 현재 아무도 모르죠.
어쨌든 당시 천한 신분이던 기생에서 왕의 후궁이 되었을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긴 한 것 같네요.
초요갱이라던지 황진이, 가희아 같은 이런 이름있는 기생들은 실제 어떻게 생겼고 어떤 춤을 어떻게 췄길래 이렇게 역사에 이름을 남겼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기생에서 옹주까지 신분 상승이 되었던 조선 초, 최고의 기생 가희아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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