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처선은 조선 초 7명의 임금을 모신 내시이면서 충신이었습니다.
연산군의 폭정에 충심을 담아 간언하다 참혹하게 세상을 떠난 내시 김처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연산군 11년인 1505년, 조선왕조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 일어납니다.
바로 왕이 내시를 죽인 사건이었죠.
1505년 4월 1일. 연산군은 내시 김처선을 겨냥해 활시위를 당겼고 화살은 정확히 김처선의 가슴 쪽에 박히고 말았습니다.
사실 김처선은 역모를 꾀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연산군을 해하려던 것도 아니었죠.
그는 어쩌다 왕에게 죽임을 당한 내시가 되었을까요?
조선 초 세종부터 연산군까지 총 7명의 왕을 모신 내시가 있었는데요.
그는 바로 판내시부사와 상선을 지냈던 내시 '김처선' 이죠.
그는 세종시대에 어린 나이로 내시가 되어 입궁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방자하고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자 문종은 그를 경상도 영해로 유배를 보내버렸죠.
시간이 흘러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유배 중이던 김처선은 다행히 풀려나게 되었고 직첩을 돌려받아 내시부로 복귀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고작 2년 후 다시 유배를 가게 되는데요.
금성대군의 옥사에 연루되어 관직을 삭탈 당하고 관노가 되어 버렸죠.
하지만 그의 명줄은 길고 질겼습니다.
어린 단종을 끌어내리고 수양대군이 왕이 되자 그는 다시 내시부로 돌아올 수 있었죠.
그렇게 시간이 흘러 세조 6년 김처선은 원종공신 3등에 추록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불성실한 태도와 왕의 행차에 늦기도 해서 곤장을 맞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그가 젊을 때까지만 해도 근면 성실하지 못했고 여러 사람의 미움을 받기 일쑤였죠.
시간이 흘러 성종이 왕이 되었을 때 비로소 그는 능력을 인정받게 됩니다.
상서내시까지 승진했던 것이죠.
하지만 김처선에게 앞으로는 없을 절호의 기회가 찾아오게 되는데요.
바로 인수대비가 병들어 눕게 되었는데 내의원 의원들과 어의까지 모두 달라붙어 좋은 약도 쓰고 침도 쓰고 했지만 전혀 병세가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김처선은 정성스럽게 약을 달이고 밤낮으로 지극한 간호를 하자 하늘이 그 뜻을 알아준 것인지 인수대비의 병이 차차 낫기 시작했죠.
이후 인수대비의 병세는 많이 호전되었고 그러자 성종은 그의 공을 인정해 정2품 자헌대부의 품계를 내려줬습니다.
당시 내시가 오를 수 있었던 가장 높은 관직은 종2품 상선이었는데 한 단계 더 높은 품계인 정2품 자헌대부까지 오른 것이죠.
시간이 지나 성종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연산군을 대신해 김처선은 3년간 성종의 능에서 시릉내시로 시묘살이를 했죠.
당시 대신 시묘살이를 맡은 신하는 왕이 가장 신임하던 신하였는데 그 일을 김처선이 한 것이었습니다.
훗날 시묘살이가 끝났을 때는 연산군이 하사한 말을 타고 궁으로 돌아왔을 정도였죠.
궁으로 다시 돌아온 김처선은 공석으로 남아있었던 상선이 되었습니다.
상선내시는 왕의 수라를 감독하는 직이었는데요.
왕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왕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는 것이 상선내시였고 이는 아무나 오를 수 없는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던 내시였죠.
항상 왕들은 독살의 위협을 받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이 절대적으로 믿는 내시를 내시부 최고 자리인 상선에 앉혔고 그런 자리를 김처선이 도맡아 했던 것입니다.
이때 김처선은 더 이상 젊은 시절과 같이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던 그런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나이가 든 만큼 더 성숙해졌고 올곧은 성품을 지니게 되었죠.
그는 연산군이 이상한 짓을 할 때마다 직언을 아끼지 않았는데요.
연산군 또한 화를 내긴 했지만 김처선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일 때도 많았습니다.
갑자사화의 피바람이 온 조정을 뒤덮었을 때 김처선 역시 성종 때에도 상선으로써 연산군의 어머니였던 폐비윤씨의 죽음에 연관이 있을 거라 생각한 연산군이 그를 옥에 가두라고 명령했는데요.
하지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옥에 가두라 한 지시를 거두며 곤장 100대에 처하는 감형을 해주고 풀어주었죠.
많은 역사학자들은 수라를 담당하는 상선의 자리를 맡을 사람으로 김처선 말고는 믿을만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 감형의 사유였을 거라고 합니다.
이후로 연산군은 무지막지한 권력을 휘두르며 점점 향락에 빠져들었습니다.
양반의 딸이든 백성의 딸이든 기생이든 수많은 여자들을 궁으로 강제로 끌고 와 그들을 흥청이라 부르며 날마다 잔치를 벌였죠.
신하들에게는 신원패라는것을 목에 걸고 다니게 해 함부로 말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신원패에는 '입은 화를 부르는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 라는 글을 적어놓았죠.
궁 근처의 민가는 흥청의 숙소로 쓰는 건물을 짓기 위해 헐어버렸습니다.
이렇게 연산군이 폭정을 일삼으면 일삼을수록 상선이었던 김처선의 고민은 깊어져갔죠.
왕의 바로 옆에서 보필하는 상선내시로써 왕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직언을 해야 하나 아니면 나와 가족들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그냥 침묵으로 일관해야 하나 그것이 문제였죠.
그렇게 시간이 흘러 1505년 4월 1일. 김처선은 드디어 마지막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출근하기 전 그는 가족들을 불러 유언을 남기며
이 한 목숨 바쳐 주상전하의 마음을 잡을 수만 있다면 내 오늘 반드시 죽을 것이다.
출처 입력
라는 말을 한 뒤 궁으로 발걸음을 옮겼죠.
이후에 나오는 김처선이 연산군에게 한 간언 내용은 모두 야사의 내용입니다.
실록에서는 김처선이 술을 먹고 왕을 꾸짖었다고만 기록되어 있죠.
야사에서 전해지는 내용을 보면 김처선이 궁에 도착했을 때 이미 궁은 난장판이었습니다.
연산군은 음란한 춤인 '처용희'를 추며 술에 취해 방탕하게 놀고 있었던 것이죠.
그는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더니 갑자기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왕의 앞에 나가서 말했습니다.
전하, 이 늙은 신(臣)이 여태껏 네 분의 임금을 섬겼고 경서와 사서를 대충이라도 통하였지만 고금을 돌이켜봐도 전하처럼 이토록 음란한 왕도 없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백성들을 생각하시어 바른 정치를 펼치시옵소서.
출처 입력
라는 말을 한 것이죠.
그러자 일순간 주위는 조용해졌습니다.
자신이 믿고 있던 김처선의 직언에 연산군은 격분했죠.
눈 돌아간 연산군은 직접 활을 들어 김처선을 겨누며 다시 한번 말해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죽음을 결심한 김처선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조정에 대신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늙어빠진 내시인 제가 어찌 감히 죽음을 아끼겠사옵니까.
다만 전하께서 오랫동안 보위에 계시지 못할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출처 입력
라고 말하니 분노한 연산군의 활을 떠난 화살은 정확히 김처선의 가슴에 박히고 말았죠.
가슴에 화살을 맞은 김처선이 계속해서 충언을 올리자 연산군은 칼을 빼어들어 김처선의 다리를 베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연산군은 김처선에게 "일어나서 걸어라! 어명이다!" 라고 했죠.
그러자 김처선은 "전하께서는 다리가 부러져도 걸음을 걸으시옵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연산군은 또다시 분노에 휩싸여 김처선의 혀를 잘라버렸죠.
그렇게 김처선은 망가져가던 연산군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 충성을 보인 뒤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야사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직언을 한 김처선의 충성심에 감복한 후세 사람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만든 것 아닌가 싶네요.
그런데 실록에는 '연산군이 김처선을 죽였다' 정도로 아주 간략하게 기록이 되어있다고 하죠.
어쨌든 연산군의 분노는 이걸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김처선의 양자인 이공신(李公信)과 김처선의 7촌까지 멸하였으며 부인 서씨와 며느리는 노비로 만들어 버렸죠.
또한 김처선의 본관인 '전의'를 없애버림과 동시에 전의 김씨의 집성촌이던 충남 연기군 전의면도 화를 피할 순 없었습니다.
또한 김처선의 부모의 묘까지 파헤쳐졌으며 김처선이 태어났던 집터를 파내어 연못으로 만들어 버렸죠.
연산군의 뒤끝을 보여주는 최고는 바로 처(處)와 선(善), 이 두 글자의 사용을 금지 시킨 것이었는데요.
모든 문서와 생활 속에서도 이 두 글자는 써서는 안되었고 이름에 이 두 글자가 있는 사람은 이름을 바꿨어야 했습니다.
24절기 중 하나인 '처서(處暑)'는 '조서'로 바꾸게 했고 '처용무(處容舞)'는 '풍두무(豊頭舞)'로 이름을 바꾸었죠.
더 어이없는 경우도 있는데요.
'권벌'이라는 사람은 과거시험에서 처(處)라는 글자를 썼다는 이유로 과거시험에 합격한 것을 취소해버린 경우도 있었으며 '성몽정'이라는 사람은 공문서에 처(處)자를 썼다가 고문을 당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는데 천만다행이었던 점은 그 공문서를 쓴 날짜가 처(處)자를 쓰지 못하게 한 날보다 전에 쓰여진 문서라서 고문을 더 이상 받지 않고 풀려난 경우도 있죠.
연산군은 왕위에 오른 후 수많은 신하들을 죽였지만 유독 김처선에 대한 처우만 이렇게 심한 이유는 평소에 믿고 의지하던 김처선에게 배신 당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고 다른 신하들은 자신을 두려워했지만 김처선은 두려워하는 기색은 하나도 없이 하고 싶은 말을 다했고 무력을 사용했을 때에도 전혀 기죽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죠.
연산군도 깜짝 놀랐을 것이고 한편으론 두려움마저 느꼈을 수도 있겠네요.
김처선이 죽고 난 후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그의 신원은 다시 회복되긴 했지만 중종은 김처선을 좋게 보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김처선이 연산군 앞에서 술 처먹고 주정 부리다가 죽은 걸로 치부해 버린 것이죠.
중종 입장에서는 연산군이 아무리 폭군이긴 했지만 일개 내시가 감히 한 나라의 지존인 왕에게 폭언을 일삼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어쨌든 김처선은 이후 폭군이 되어가는 왕을 바로잡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은 충신이라고 재평가가 이루어졌으며 영조는 그의 고향에 공적을 기리는 정문(旌門)을 세워줬다고 하죠.
연산군은 그의 이름에 쓰인 글자를 사람들이 쓰지 못하게 하면서까지 그의 흔적을 지우려 했지만 지워지지 않았고 오히려 훗날 더 김처선의 이름을 드높이는 행동이 되었습니다.
내시들은 대개 왕 옆에 구부정하게 서서 시키는 것만 하는 사람으로 보았는데 목숨을 걸고 충심을 다해 간언한 내시도 있었다는게 새롭긴 하네요.
조선시대 7명의 왕을 섬겼으며 마지막은 충심을 다했던 내시 김처선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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