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역사 탐구

내시. 엘리트 집단이었던 내시는 비록 거세하긴 했지만 남들이 할 건 다 했었다!!

by 사탐과탐 2021. 9. 21.
반응형
내시의 이미지는 호리호리하고 연약하기만 할 것 같은데요.
하지만 의외로 건장한 남성 못지않게 할 건 다 했었다 합니다.
과거 내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과거 삼국시대부터 왕에게는 항상 착 달라붙어있는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환관이었죠.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함께하며 왕이 잘때 마저도 문 앞을 지키고 있었는데요.

그래서 환관 또는 내시들을 왕의 남자라고도 불렀습니다.

 

많은 분들이 환관과 내시가 같은 거라고 생각하시는데요.

사실 이 둘은 다른 직책이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환관도 있고 내시도 있었죠.

 

환관은 거세를 해서 궁내의 여러 일을 도맡아 해온 직책이기도 하고 궁내의 모든 여자는 왕의 여자이기 때문에 왕의 여자들과 부적절한 관계가 애초에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고자였던 환관으로 하여금 궁궐 내의 잡무를 보게 한 것이었죠.

 

 

고려시대의 내시는 거세를 한 환관이 아니었고 하나의 직책이었는데요.

명문가 출신의 학식이 높고 재능이 뛰어난 엘리트 문관들 중에서 왕이 직접 선발한 인물들이 왕의 제일 가까운 곳에서 보필하며 관직명 앞에 '내시(內侍)'를 붙여 사용했던 것이죠.

 

무신정권 시대에는 무신이 내시직이 되기도 했을 정도로 선망의 대상인 관직이었습니다.

이 내시직들은 '내시원' 이라는 곳에서 근무를 했는데 훗날 공민왕 대에서 '내시부'가 만들어졌죠.

그런데 조선시대에 들어서 환관들이 내시부를 맡게 되면서 환관은 내시와 의미가 같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내시들은 궁 내의 살림을 도맡아 했으며 내시의 최고위직인 상선은 종2품의 높은 관직이었고 왕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중요한 일을 했죠.

조선이 건국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까지만 해도 내시 중에서는 거세를 하지 않은 사람도 있긴 했는데요.

태조 이성계 시대에 세자빈 유씨가 내시였던 '이만'이라는 자와 간통을 한 것을 계기로 거세한 사람들만 내시가 되기 시작하며 환관과 내시의 차이가 없어졌죠.

 

아무튼 이런 내시는 상당한 파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궁내의 수많은 업무들 중 내시를 통하지 않는 업무가 없을 정도였기 때문에 그들은 보는 것도 많았고 듣는 것도 많았었죠.

그러다 보니 내시들은 조정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왕이 될 사람이 어릴 적 시절부터 함께 지내오던 내시들이 훗날 왕이 된 후에도 그 왕을 모시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왕과 굉장히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다 보니 이에 따른 영향력도 무시 못 했죠.

그렇다 보니 궁내의 왕의 여자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애초에 차단하기 위해서 거세를 시켰던 이유도 있었지만 왕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하는 내시들이 자식들을 낳아 계속 왕과 친하게 지내면서 권력이 세습되는걸 막으려고 양반들의 강력한 견제로 인해 거세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그렇다 보니 반드시 거세가 된 자만 내시가 될 수 있었는데요.

무슨 사정이 있거나 불의의 사고로 성 불구가 되었던지 아니면 선천적인 이유에서 고자인 경우에도 내시가 될 수 있었죠.

그리고 스스로 거세를 하거나 아니면 남이 자른 경우에도 내시가 될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당시에 의료기술은 좋지 않아서 거세를 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웬만큼 건강이나 체력이 좋지 않은 이상 죽을 수도 있는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죠.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내시들은 다들 여리여리한 몸을 가지고 있는데 사실 건장한 남자들이 거세를 해도 죽지 않고 몸이 버텨줬기 때문에 여리여리한 남자들보다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들이 더 많이 내시가 되었다고 하죠.

그리고 그나마 다행인건 조선에서는 고환만 잘랐는데 중국에서는 음경과 고환을 다 잘랐다고 합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유계(兪棨)'는 독특한 거세 방법을 기록해 놓았는데요.

명주실로 어린아이의 고환을 칭칭 감아 묶어서 피가 통하지 않게 만든 후 결국 썩어서 떨어지게 하는 방법도 있고 고환을 계속 주물러서 성기능을 파괴하는 방법도 있었다고 하죠.

아니면 내시 시술소가 있었는데 고환을 제거할 때 지르는 비명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천둥 번개가 치는 날만 시술을 했다고 하죠.

 

당연히 마취는 없었기 때문에 고통을 덜기 위해 시술을 당하는 사람은 술을 엄청 마시거나 아편을 피우는 등의 노력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잘린 고환은 잘 말린 후 '양물단지' 라는 작은 항아리에 넣어 보관했는데요.

내시가 죽으면 자신의 고환을 다시 몸에 붙이고 장례를 치렀죠.

그래야 다시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렇다 보니 내시들은 자신의 양물단지를 신줏단지 모시듯 소중히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내시가 되기 위해 거세를 하다 죽는 사람도 많이 생겨나고 유교 사회였던 조선에서는 부모님께 받은 신체를 훼손하는 것은 불효막심한 행동이었기 때문에 세종대왕은 민간에서 사사로이 거세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 시키기 시작하면서 선천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있거나 사고로 인해 고자가 된 남자아이를 내시로 썼다고 하죠.

그러다 보니 내시가 되고 싶었던 사람들은 스스로 자른 뒤 사고로 잃었다고 뻥을 치기도 했습니다.

 

근데 여기서 드는 의문은 거기를 잘라서까지 심지어 목숨을 걸면서까지 왜 내시가 되려고 했던 것일까요?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한데요.

바로 출세를 하려는 이유에서 였죠.

당시 조선 백성들의 삶은 너무나도 피폐했었습니다.

 

그런 지옥 같은 삶을 그나마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신분이 올라가는 것 밖에 없었고 그나마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방법은 거세를 하고 내시가 되어 궁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죠.

 

 

또한 굶어죽기 직전의 백성들은 아들을 거세시킨 뒤 내시로 만들어버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내시는 궁내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궁 밖에 집도 있고 부인도 있으며 자식도 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런 내시들은 출퇴근을 하는 내시였는데요.

 

밖에서 사는 내시들은 돈도 많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시집오고 싶어 하는 여자들은 수두룩했죠.

또한 고환만 없을 뿐 음경은 있었기 때문에 아내와 성관계도 가능했습니다.

고환은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을 만드는데요.

일부 사람들은 고환을 자르게 되면 남성호르몬을 만들어내지 못해 성욕감퇴와 발기부전이 올 수도 있지만 대다수의 경우에는 발기가 가능했고 성관계 역시 가능했었죠.

 

그러나 사정이 안되는 바람에 너무 괴로운 나머지 아내의 목덜미나 어깨를 깨물기도 했다고 합니다.

어쨌든 내시들은 아내를 임신 시킬 수는 없었는데요.

내시들의 자식들은 양자를 들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당시 기득권이었던 양반들은 내시가 아내를 두는 것 또한 못마땅했는지 내시가 혼인을 하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고 왕에게 상소를 꾸준히 올렸는데요.

왕들은 이 상소들을 다 물리치고 내시들이 결혼도 하고 양자도 들일 수 있도록 해주었다고 하죠.

 

내시들은 거세 되었기 때문에 호르몬의 영향으로 수염도 잘 자라지 않았고 목소리도 얇아졌다고 하는데요.

실제로 호르몬의 영향으로 다들 꽤 오래 사는 편이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내시, 환관제도는 1894년 갑오개혁 때 '내시사'로 바뀌었다가 1908년에 완전 폐지되며 내시들 또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죠.

사극을 보면 정말 중요한 역할로 내시들이 많이 나오는데요.

거의 주인공 급의 내시들도 많았고 내시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드라마도 있었죠.

 

그만큼 별 볼일 없어 보이던 내시들은 알고 보면 없어서는 안 될 굉장히 큰 역할을 했던 것 같네요.

생각보다 훨씬 대단했던 환관, 내시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