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친혼, 동성애, 원나잇 등 현재보다 훨씬 더 파격적이고 개방적이었던 고려시대의 성문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란 말은 남녀가 7살 이후부터는 같이 있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유교사상과 문화의 시대였던 조선시대에는 이 정도로 남녀 간의 사이의 사랑을 감춰야 하고 부끄러워해야 하는 등 아주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가 많았죠.
그러나 그전 시대인 고려시대에는 어땠을까요?
지금보면 참 대단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많이 개방적이었습니다.
여성의 권리 또한 굉장히 높았고 성에 대해 편견도 없었죠.
태조 왕건은 고려를 건국할 때 각 지방의 유력한 호족들과 혼인관계를 통해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와 왕권 강화 및 안정을 도모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태조 왕건의 자식들은 무려 아들 25명 딸 9명에 달했죠.
태조 왕건은 왕실 혈통의 순수성을 유지하고 왕권의 안정을 위해 족내혼, 즉 근친혼을 시켰는데요.
고려의 3대 왕 정종은 견훤의 외손녀들과 결혼을 했는데 그녀들은 아버지 왕건의 17대 부인 박씨의 동생들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정종은 이모들과 결혼을 한 셈이었죠.
또한 4대 왕 광종 또한 이복 여동생 황보씨와 결혼했습니다.
거기다 왕건의 손자인 성종은 백부였던 광종의 딸 문덕왕후 유씨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원래 친척인 덕원군 왕규와 결혼을 했었습니다.
유씨는 왕규와 함께 낳은 자식까지 있었는데 왕규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성종과 다시 재혼해서 왕후가 되었던 것이죠.
이렇듯 고려시대에는 여성들의 재혼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송나라의 휘종이 고려에 보낸 사신의 일행 중 '서긍'이라고 하는 사람이 쓴 '고려도경'에 의하면 고려에서는 여름철에 시냇물에서 남녀 구분 없이 옷을 벗고 같이 목욕을 했다는 대목도 나오죠.
또한 '경합이리(輕合易離)'라고 가볍게 만나고 쉽게 헤어졌다는 뜻의 기록도 있는데요.
고려의 젊은 남녀는 그야말로 가벼운 연애를 즐겼다고 합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원나잇 스탠드' 정도 되지 않을까 싶네요.
그런데 이런 원나잇에 대한 고려시대 개방적인 성문화는 고려가요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충렬왕 때 만들어진 '쌍화점' 이라는 고려가요 내용이 그러한데요.
이 쌍화점은 한 여성이 여러 남자들과 잠자리를 했다는 굉장히 뜨거운 맛의 내용이죠.
쌍화(만두)를 사러 갔더니 회회아비(아라비아 상인)가 손목을 잡아 끌며 수작을 부렸다.
삼장사라는 절에 갔더니 절의 주지도 손목을 잡으며 연애를 하자고 했다.
우물에 물을 길러 갔더니 용이 나타나 강제로 범했다.
라는 내용이었죠.
'손목을 잡는다'라는 것은 성관계의 은유적 표현이라고 하고 우물은 궁을 뜻하며 용은 왕이나 귀족을 뜻한다고 합니다.
예부터 이런 노래에는 시대상이 많이 반영되어 있었는데요.
쌍화점의 세 문장에서만 벌써 아라비아 남자, 승려, 귀족이나 왕과 잠자리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렇듯 상대방 남자의 신분은 전혀 개의치 않았을 정도로 성은 개방적이었고 자유로웠으며 당시 고려의 성풍속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기도 했죠.
이 작품은 당연히 조선시대에 와서는 '음사(淫辭)'라 하며 배척을 받았지만 사라지지 않고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것 보면 쌍화점 보다 더 음란하고 성에 대해 더 적나라한 표현을 했던 고려가요는 더욱 많았지만 조선시대에 다 사라져버렸을 것이라는 추정도 되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쌍화점에서는 절에 갔다가 승려와 뜨거운 연애를 했던 내용도 실려 있는데요.
조선 초에 만들어진 고려 역사책 '고려사'를 보면 여러 대목에서 '여자들이 절에 가서 음주가무를 즐겼다' 라는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고 실제로 고려시대 때의 절은 매춘과 연애질의 온상이 되었다고 하죠.
또한 조선 초에는 당시 절의 풍기문란함을 지적하는 기록도 자주 나올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사실 고려에서는 동성애를 장려하거나 공공연히 즐기지는 않았지만 고려의 왕들은 동성애를 하기도 했습니다.
동성애를 즐겼던 왕들은 바로 목종과 충선왕 그리고 공민왕이었는데요.
공민왕은 미소년들의 집단인 '자제위'를 만들었습니다.
공민왕은 왕권 강화를 도모하고 자신의 신변을 호위할 인재를 양성하는 동시에 자제위의 미소년들과 동성애를 즐기기도 했죠.
심지어 공민왕의 침실에서 집단으로 동성애를 하기도 했으며 자제위 미소년들에게 자신의 후궁들을 겁탈하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고려시대가 성적으로 개방되었고 자유로웠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한 명의 남자가 여러 여자와 결혼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충렬왕의 통치 시기에 신하 중 '박유'라는 사람이 충렬왕에게 일부다처제를 권한적이 있는데요.
어느 날 박유가 왕을 호위해서 연등회를 가던 도중 한 할머니가 "저 늙은이가 축첩을 청한 자다!"라고 소리쳤습니다.
이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박유에게 손가락질하며 욕지껄이를 해댔는데 이후 박유와 충렬왕이 가는 곳마다 모든 여자들이 뛰쳐나와서 손가락질하고 욕을 하다 보니 결국에 충렬왕도 여성들의 반발을 이기지 못하고 일부다처제는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죠.
그 정도로 신분이 높고 낮음을 떠나서 일부일처제는 잘 지켜지고 있었고 여성의 상속도 인정 받았으며 여성이 제사에도 참여할 정도로 여성들의 권리 또한 인정받았죠.
고려사에는 '귀한 사람이나 비천한 사람이나 부인을 하나만 거느리고 아들이 없는 자도 감히 첩을 두지 않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첩을 두지 않았다는 것이 실제 사실인지 아닌지는 논란이 있고 실제로는 암암리에 첩을 거느리는 귀족들도 많았겠지만 고려는 조선보다는 여성의 인권이 높아 남녀 간 권리의 균형이 어느 정도 맞는 사회였음은 틀림이 없어 보이죠.
그러나 고려 말기 안향이 주자학을 들여오고 조선시대로 넘어오며 숭유억불정책에 따라 유교사상이 자리를 잡으면서 급속도로 남성 중심주의로 바뀌게 됩니다.
더불어 성에 대해서도 굉장히 보수적으로 변하기 시작했죠.
이렇게 성적으로 보수적이게 변한 사회는 결국 '힘과 권력이 있는 남성' 에게만 온갖 문란한 성적 행위를 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힘과 권력이 있는 남자'는 여러 명의 여자를 거느렸고 부인 외에도 수많은 첩과, 기생, 그리고 여자 노비 등을 이용해 마음껏 성욕을 채웠으며 고려에 비해 여성의 인권은 바닥을 치기 시작해 결국 여성들은 권력가 남자들의 희생양이 되었죠.
지금 봐도 굉장하다 싶을 정도이고 심지어 지금보다 더 개방돼있던 고려시대의 성문화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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