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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위선적이고 허세 쩔었던 조선시대 양반들

by 사탐과탐 2021.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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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기득권 세력이었던 양반들은 권위적이고 품격있는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실상은 위선적이고 허세 쩔었던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고도 하죠.
조선시대 신분제도의 갑 오브 갑이었던 양반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392년 7월. 고려의 무관이던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했습니다.

조선 건국의 가장 많은 힘을 보태준 신진사대부들은 조선의 주요 관직을 차지하게 되었죠.

이 신진사대부들은 나중에 양반이라 불리게 되었는데요.

양반이란 문반과 무반을 합쳐 부르는 말이었죠.

 

조선시대 신분제는 양천제로 양반과 중인, 평민이 포함되어 있었던 양인과 노비와 백정, 기생 등이 포함되어 있는 천인으로 구분되었습니다.

법적으로 양인들은 모두 평등하다 했지만 실제로는 완전 천지차이이긴 했죠.

어쨌든 법적으로는 양인들이었으니 범죄자, 재혼한 여자, 서얼 등의 아들이나 손자를 제외하고 모두 과거 시험에 응시해 관직에 진출할 수는 있었습니다.

 

원칙적으로는 농사를 짓는 농민들도 과거를 보고 벼슬을 할 수 있었던 것이죠.

천민만 아니라면 모두가 과거시험을 치뤄 신분 상승이 가능했었는데요.

하지만 애초에 엄청나게 넓은 땅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부자로써 밥 먹고사는데 아무 걱정 없이 공부만 하면 되었던 양반가의 아들들과는 다르게 양인이라 하더라도 새벽에 일어나서 자기 전까지 뼈 빠지게 일만 하며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던 평민들에게 과거시험이라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렇다보니 다른건 제쳐두고 학업에만 매진할 수 있던 양반집 자제들만이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던 것이고 당연히 평민들에 비해 합격률이 월등히 높았던 것이죠.

거기다가 과거로 뽑는 관리는 일 년에 끽해봐야 10여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 책 한 권 살돈 없었던 농민들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또한 지금 양반이라 하더라도 고조할아버지 대까지 4대조 안에 벼슬한 사람이 없으면 양반으로 인정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양반들은 기본적으로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가는 것을 최고로 여겼죠.

그렇게 양반들은 계속해서 권력과 경제력을 독점하며 기득권을 더더욱 움켜쥐게 되었고 양반이라는 말은 점점 지배신분을 의미하는 말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양반들 외에 중인, 평민들은 그야말로 상놈이 되어 버린 것이죠.

그러다보니 지금으로보면 말도 안 되는 폐해가 생기게 되는데 양반이 아닌 사람은 가죽신과 비단옷을 입지 못하게 했죠.

어쩌다 돈이 생긴 평민이 비단옷을 입거나 하면 도둑으로 몰려 양반집에 끌려가 곤혹을 당할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이나 소를 타고 가다가 양반집 앞을 지날 때면 반드시 내린 후 걸어서 지나가야 했는데요.

만약 그냥 탄 채로 지나가다 걸리면 그 집의 하인들에게 두들겨 맞았죠.

또한 길을 가다 양반을 만나면 구석으로 길을 터주고 머리를 조아리며 인사를 올렸어야 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글 깨나 읽은척하는 양반들은 모든 인간을 군자와 소인으로 나눠 명분이니 도덕이니 윤리니 하는 것을 지나치게 내세웠죠.

양반들은 대단한 군자인척 하면서 물질적인 것에는 관심 없는척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데요.

 

군자인 양반들이 소인인 백성들을 지배하고 가르치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면서 오로지 금전적 이익만 추구하는 상인들을 업신여기며 천시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돈을 만지는것 조차도 불결한척 하기도 했지만 실제로 돈을 싫어하는건 당연히 절대 아니었고 오히려 상인들의 뒤를 봐주며 뒷돈을 받는, 더 더러운 짓을 하기도 했죠.

 

이렇게 움켜쥔 기득권은 누구에게도 양보하거나 나눠가지기 싫었던 양반들은 자기네들끼리 모여사는 반촌을 만들기도 하고 자기네들끼리만 결혼을 한 뒤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기도 했으며 과거 시험을 치르지 않고도 관직에 드는 방법을 계속해서 구상하며 양반이라는 지위를 잃지 않으려 여러모로 노력했습니다.

 

또한 양반들은 군역 조차 면제시키며 양반의 특권을 더욱 강화시키는 동시에 양반과 상놈의 구별을 더욱 엄격하게 했죠.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양반에 대한 의미가 점점 퇴색하며 달라지기 시작하는데요.

그 이유는 너도나도 양반이 되어버린 탓이었습니다.

 

왜란과 호란을 겪으며 국가의 재정이 완전히 파탄 나버렸고 무너진 재정을 복구하기 위해 공명첩과 납속첩을 만들어 평민과 천민에게 관직을 팔기 시작했던 것이죠.

그러자 오랜 세월 양반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엄청난 차별을 받아오던 돈 많은 중인들과 서얼들은 적극적으로 이를 받아들여 돈을 주고서라도 양반을 사기 시작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러나 경제적으로 궁핍하던 양반들도 있었는데요.

그들은 잔반이라고 불리기도 했죠.

잔반들은 역시 농사를 짓거나 서당의 훈장을 하며 여러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 살아가기도 하고 관상이나 사주, 풍수 등을 봐주며 먹고 살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잔반들은 일반 평민들과 다를 바 없는 입에 풀칠하기 힘든 삶을 살고 있었고 돈 없는 잔반이나 몰락한 양반들은 돈 많은 상인이나 중인들에게 족보를 팔기도 했으며 또한 부유한 평민들은 궁핍한 양반들과 결혼을 하며 양반이 되기도 했죠.

 

어쨌든 양반이 아닌 이상 돈이 아무리 많아도 지속적으로 핍박을 받자 족보를 사거나 위조하는 중인, 평민들은 계속 늘어났고 그러다보니 조선 초까지만 해도 7% 내외이던 양반의 숫자는 조선 후기가 되자 70~80%에 육박할 정도로 많아지면서 너도 나도 양반이 되어 버렸죠.

 

그러나 나중에는 서울에 일부 양반들만 계속해서 권력과 경제력을 독점했고 지방의 양반들은 차별 대우를 받으며 양반들끼리도 급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이 조선의 갑중의 갑이던 양반들은 1894년 7월 갑오개혁 때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없어졌지만 훗날 대한민국이 수립되기 전까지 계속 남아있었다고 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생각해 보면 이때도 경제력이 되어야 과거를 볼 수 있는 여건이 되었기 때문에 결국엔 돈 때문에 이런 신분이 생긴걸 보면 현재도 돈이 많고 적음으로 인한 눈에 보이지 않는 신분이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은 드네요.

하여튼 돈이 문제입니다.

 

조선시대의 최고의 기득권 세력, 양반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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