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대제라고 불릴만큼 전세계적으로 최고의 성군으로 일컬어지는 황제 천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최고의 성군 강희제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과거에는 수많은 성군들이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의 세종대왕이나 정조,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한나라의 광무제, 당나라 태종, 수나라 문제 등 셀수없을 정도로 많았죠
그 중 오늘 이야기할 청나라의 강희제는 천고일제라고 불리며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천고일제 (千古一帝) : 천 년에 한번 나오는 황제)
우리나라에서 세종을 세종대왕이라고 부르듯이 중국에서는 강희제를 강희대제로 부르고 있죠
거기다가 강희제는 청나라의 전성기를 연 황제로 청나라 뿐만아니라 전 세계 역사상 가장 뛰어난 황제 중 한명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강희제는 순치제의 3남으로 태어났는데요
그는 어렸을적부터 책읽는것도 좋아하고 활도 잘쏘는 등 모든 면에서 다재다능했다고 하죠
그런데 그가 7살때인 1660년, 아버지 순치제가 총애하던 현비 동고씨가 그만 천연두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모든 의욕을 상실해버린 순치제는 결국 병에 걸리고 말았고 그 역시 세상을 등지게 되죠
순치제가 죽기전 아담 샬을 불러 황위를 누구에게 물려주면 좋을지 물었는데요
이때 아담 샬은 아이신기오로 히오완예이가 천연두를 한번 앓았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재위가 가능하다며 그를 추천했고 그렇게 히오완예이는 불과 8살의 나이로 청나라의 제 4대 황제 강희제로 즉위하게 되었죠
(※과거 천연두를 앓았었기 때문에 그의 얼굴에는 마마자국이 있다고 한다)
즉위 당시엔 너무 어린나이였기 때문에 보정대신 4명이 섭정을 하게 되었는데 이 넷중 오보이라는 인물이 다른 세명을 제치고 최고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오보이가 청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지자 점점 기고만장해졌는데 다른 보정대신이던 수크사하를 살해하고 황제이던 강희제 앞에서도 굉장히 무례하게 굴 정도였죠
그때 강희제는 14살의 나이에 오보이를 급습해 체포했고 그렇게 오보이는 모든 권력을 잃었으며 이후 16살이 되자 강희제는 직접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주변 정세나 당시 상황에서는 강희제가 선정을 베풀어 나갈수 있는 여건은 전혀 되질 않았죠
위에서는 러시아가 내려오고 있었고 대만에서는 반청복명 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면서 남쪽 지역을 계속 흔들고 있었으며 번왕들의 위세도 나날이 강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강희제가 황제가 되고 난 이후부터는 나라가 망할수도 있을정도의 큰일들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죠
이에 강희제는 먼저 가장 신경쓰이던 곳부터 처리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청나라가 산해관을 넘어 중국대륙을 정복할 당시 청나라에 항복해왔던 한족 인물 오삼계, 경중명, 상가희 세명은 각각 운남, 복건, 광동 지역으로 이동해 왕으로 봉해져 자신들의 왕국을 세웠고 이를 삼번이라 불렀는데요
그들은 그곳에서 착실히 힘을 길러나가 그들이 가진 경제력과 군사력은 청나라 정부에서도 무시할수 없을 정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친정에 나선 강희제는 자신이 직접 강남지역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이 삼번이 문제가 될것이라고 생각하고 다 없애버려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죠
그리고 조용히 기회를 노리고 있는 와중 갑작스럽게 기회가 찾아오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평남왕 상가희가 왕위에서 물러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왔던 것이죠
이에 강희제는 그의 의사를 받아들이며 상가희의 번국을 없애라는 명령을 했습니다
사실 상가희는 나이가 들어 왕국을 아들에게 물려주려고 했던것인데 갑작스런 철번 명령에 당황했지만 어쩔수없이 황명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죠
이 철번소식을 들은 삼번 중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쥐고 있던 오삼계는 강희제를 떠보기 위해 상가희와 똑같은 주청을 올렸는데 같은 대답이 돌아오자 오삼계는 화를 내며 1673년 11월 반란을 일으켜버렸습니다
여기에 경중명의 번왕자리를 이어받았던 경정충이 합세하고 상가희의 행동에 불만을 품은 장남 상지신이 아버지 상가희를 몰아내고 오삼계의 반란에 가담하면서 난의 규모는 엄청나게 커져버렸으며 이로인해 자칫 잘못하면 세워진지 얼마안된 청나라가 멸망해버릴 위기에 처한것이죠
이에 강희제는 "오삼계 네놈은 명에서도 반란군, 청에서도 반란군이며 아무런 대의도 없다" 라고 하며 직접 모든 전략을 총괄하면서 반란군에 맞섰고 반란군은 처음엔 여러 지역을 장악하며 승승장구 했지만 3년후인 1676년엔 경정충이 항복하고 이듬해인 1677년엔 상지신도 항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오삼계는 국호를 주(周)로 바꾼뒤 1678년에 황제의 자리에 올랐지만 불과 5개월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버렸으며 그가 죽자 반란군의 유대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순식간에 무너져버렸죠
그리고 1681년엔 오삼계의 근거지였던 곤명이 함락되고 오삼계 일족이 몰살 되면서 삼번의 난은 종결 되었습니다
이로써 드디어 청나라가 중국 전역의 직접 통치권을 가지게 된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이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삼번의 난이 한창일때 북쪽에 있던 러시아 왕조에서 파견보낸 탐험가들이 시베리아를 지나 청나라 영토였던 만주와 내몽골 지역으로 내려온것이었죠
이후 러시아는 아무르 강까지 군사를 보내 청나라에 직접적인 도발을 해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르바진이라는 지역까지 러시아가 장악을 해버렸죠
하지만 당시 삼번의 난이 더욱 심각한 상태였기 때문에 러시아의 도발을 그냥 지켜보는수밖에 없었는데 1681년 삼번의 난이 진압되면서 드디어 러시아를 신경 쓸 여력이 생긴것입니다
하지만 완전히 러시아와 전면전을 하기엔 또 다른 문제가 있었는데요
청나라를 피해 대만에서 반청복명(反清復明)운동을 전개하던 정성공이 대만에 정씨 왕국(명정)을 세웠고 삼번의 난에도 가세할 정도로 무시못할 세력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강희제는 남쪽에서 큰 위협을 끼치던 이 대만을 평정해야 비로소 집중해서 북쪽 러시아를 상대할수 있을거라 판단했던 것이죠
그렇게 강희제는 1683년 대만 정복과 남쪽의 반란 위협을 모두 제거하기 위해 움직였고 결국 대만을 항복시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강희제는 항복한 대만인들을 탄압하는 대신 후하게 대접해줬는데 어떻게보면 반란군 대장급이던 정성공에게 오히려 끝까지 충절을 지켰다면서 충절이라는 시호까지 내려줬죠
강희제가 현명하게 대만을 복속시켰던 덕분에 대만도 청나라의 영토로 편입되면서 남방이 완전히 안정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강희제는 북쪽 러시아와의 대결에 나서게 되었죠
강희제는 러시아가 장악하고 있던 아르바진을 포위해 압도적인 힘으로 러시아 군을 밀어버리면서 아르바진을 초토화 시켜버렸습니다
그런데 다시 군대를 청나라로 물리면 또 다시 러시아가 아르바진으로 군사를 보냈고 이를 또 물리치기 위해 청나라에서 출병해 러시아군을 쓸어버리고 철수하면 또 다시 러시아군이 내려오고, 이짓을 몇번 하게되자 강희제는 계속 남하하려는 러시아를 완전히 막아낼려면 이들의 의지를 완전히 꺾어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청나라군은 또 내려와 아르바진을 점령한 러시아군을 포위했고 주위에 큰 해자를 파 아무것도 하지 않은채 그대로 러시아군 말려죽이기 전술을 사용했습니다
결국 아르바진에 고립된채로 서서히 말라죽어가던 러시아군은 해자를 건너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오히려 나간 병사들은 다 죽임당하고 해자를 건너가지도 못했죠
강희제는 이제 상황을 마무리 하기 위해 아사 직전에 빠진 러시아군에 항복 서신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군의 답변을 들은 뒤, 청나라군은 다시 군사들을 물렸는데 러시아군은 계속되는 패배와 당시 혼란스러웠던 국내 사정 때문에 더이상 만주와 외몽골 지역의 영토확장을 포기했고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으며 서로간에 상업활동 허가와 국경 확정에 합의를 하게 되었죠
이로써 청나라는 흑룡강 북쪽지역까지 영토를 확보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 네르친스크 조약: 한자가 아닌 러시아어, 만주어, 그리고 라틴어로 문서가 작성된
매우 획기적인 유럽식의 대등 - 평등 조약)
그렇게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 시킬수 있었던 강희제는 이제 유목 제국이던 준가르를 토벌하기 위해 군사들을 출진시켰죠
준가르의 갈단 칸은 외몽골을 통합하고 티베트와 연합해 청나라를 공격할 계획을 꾸미고 있었기에 그냥 가만히 두면 두고두고 후환이 될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원정에 나선 청군은 전면전에서 패하기도 하고 강희제 본인도 병에 걸려 앓아 눕는 등 매우 고전하긴 했지만 3번째 원정에서 당시 서양에서 들여온 화포 덕에 마침내 준가르 군을 섬멸했고 1697년 갈단 칸도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그렇게 강희제는 외몽골 지역까지 제패하게 되었죠
또한 티베트 지역까지 복속시키면서 강희제는 7대 달라이 라마까지 자신의 손으로 세웠습니다
강희제는 그렇게 엄청난 영토를 청나라의 영토로 편입시키는 위대한 업적을 남기게 되었죠.
모든 전쟁을 마친 강희제는 전력을 다해 내정에 힘쏟기 시작했는데요
그는 수많은 한족 지식인들을 포섭하려 노력했으며 그러기 위해선 자신도 유학과 여러 학문들을 공부하면서 나중에는 신하들과의 대화에서도 밀리지 않을정도로 방대한 지식을 쌓았습니다
심지어 그는 세종대왕처럼 책벌레이기도 했는데 그가 아파서 병들어 누워있는 와중에도 책을 봤다고 하죠
강희제는 만주족과 한족을 차별하지 않았는데 심지어 순행중에 주원장의 효릉을 찾아가 3번의 절을 올리며 존경심도 표현하고 한족을 포섭하기 위한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엄청난 호기심의 소유자였기에 여러 서양 선교사들로부터 역사나 기하학, 수학, 역법, 천문학 광학 의학 화학 물리학 등 수많은 학문들을 두루 섭렵했으며 심지어 라틴어까지 배웠을 정도였죠
그는 저녁을 먹은 후에 서양 선교사들과 함께 수학계산을 하며 자신이 푼 문제가 맞으면 굉장히 기뻐하는게 일상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당시 강희제를 만났던 유럽인들은 그의 지식과 교양에 감탄하며 "카톨릭을 믿지 않는점만 빼면 최고의 군주"라고 칭송할 정도였죠
그렇게 과학지식을 쌓다보니 강희제에게 도사들이 찾아와 불로장생이니 신선이니 하는 소리를 해대면 불같이 화를 내며 내쫓아버렸다고 합니다
또한 굉장히 검소하게 생활했는데 명나라때 수만명이나 되던 환관과 궁녀들의 수를 400여명으로 대폭 줄였으며 될수 있으면 황제인 자신의 옷마저 꿰매 입었을 정도였죠
당시 선교사이던 조아킴 부베는 루이 14세에게 보낸 보고서에 "강희제는 세상에서 제일 부유한 군주인데도 그런 군주답지 않게 매우 검소하다
이는 전례가 없는 일이다" 라고 기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죄인들의 인권을 생각하던 군주이기도 했는데요
강희제가 어린시절 죄를 지은 관리가 허리가 잘려서 죽는 참혹한 형벌에 처해지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던 강희제는 이후 왠만해선 사형에 처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사형에 대한 보고가 올라오면 여러번 읽어본 뒤 죄인의 사정을 살펴 처벌을 감해주거나 심지어는 사면해주기도 했죠
그리고 감옥에 있는 죄인들이 여름에는 덥지 않도록 시원하게 해주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주었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위생을 위해 청소도 해주었고 병에 걸린 죄인은 치료를 받을수 있도록 해주었으며 관리가 죄인들의 사정을 모른척하면 오히려 관리를 처벌했을 정도였다고 하죠
또한 인구조사를 통해 세금을 동결시키면서 백성 1인당 조세부담을 줄여줬던 덕에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줄수 있었는데요
당시 유럽과의 무역에서 상당한 흑자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 재정상황이 풍족해 지다보니 할수 있었던 정책이라고 하죠
가뭄이나 홍수의 피해를 받으면 세금을 감면해주기도 했는데 심지어 가뭄이나 홍수가 없어서 꼬박꼬박 세금을 다 냈던 지역이 있으면 그 지역만 세금 감면을 못받은것이 억울할테니 그 해 조세를 면제해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만큼 백성들이 먹고살만해지니 인구도 폭발적으로 증가했죠
또한 강희제는 책을 워낙 사랑하다보니 당시 중국에 존재하던 모든 기록이나 책들을 모아 영구 보존을 하기 위해, 다 새로 만드는 작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명나라 역사인 '명사(明史)'를 만들었는데 이때 최대한 사실적으로 기록해 명나라 황제들의 배울점은 배워야 한다며 과도하게 명나라 황제들을 비난하는 기록에는 주의를 주기도 했죠
그리고 백과사전이던 '도서집성'과 중국 최초로 위도를 사용한 지도인 '황여전람도'를 만들었습니다
강희제가 만든 여러 책들 중 가장 최고는 바로 '강희자전(康熙字典') 인데요
강희자전은 수십명의 학자들과 대신들이 오랜기간 연구하여 만든 한자사전인데 글자수가 무려 47,000여 자에 달한다고 하죠
이 강희자전은 훗날 부수별 한자사전의 본보기가 되었고 최근의 한자사전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친 사전이라고 합니다
그는 클래식도 즐겨들었으며 심지어 작곡도 했다고 하죠
또한 폭식도 하지 않고 신선한 채소 위주로 음식을 먹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틈틈히 고기도 먹으면서 골고루 영양소를 흡수할수 있었고 술 담배도 하지 않았다고 하죠
한마디로 자기관리의 끝판왕이었던 것입니다
그 덕인지 몰라도 그는 중화권 역사상 가장 긴 62년이라는 세월동안 청나라를 통치했는데 청나라의 역사가 296년 이니 청나라 역사의 5분의 1 정도가 강희제 시대 였던 셈이죠
또한 직접 전쟁을 지휘하고 원정을 떠난걸 보면 그는 문무를 겸비한 최강의 군주였습니다
하지만 말년엔 좀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는데요
바로 자식들이 다음 황위를 노리고 암투를 벌였던 것이죠
그는 적자이던 윤잉을 황태자로 정하고 매우 총애 했는데 워낙 오랫동안 황제를 해먹다보니 20대 까지만해도 자신을 잘따르던 황태자 윤잉이 30대를 넘어서면서 서서히 헤이해지기 시작했고 주색잡기에 빠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또한 만주족 특성상 적장자에 상관없이 가장 능력있던 아들이 다음 황제자리에 올랐던 전통 때문에 황태자 윤잉 외에도 황장자 윤제, 4황자 윤진, 8황자 윤사가 황제자리를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였죠
이런 어이없는 상황에 강희제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지 퇴직하는 대신에게 "신하는 사직하고 물러날수 있지만 천자인 짐은 그럴수도 없다" 라며 한탄했다고 하죠
결국 황태자 윤잉이 강희제의 후궁을 건드리는 등 여러 사고를 치다가 끝내 반역을 일으키려다가 걸려서 폐위되고 말았습니다
강희제는 이후 황태자를 두고 있지 않다가 죽기 직전에 다음 황제로 4황자 윤진을 지명했는데 그가 바로 옹정제 이죠
그리고 1722년 12월 20일, 향년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후 옹정제는 강희제가 마련해놓은 청나라의 전성기를 잘 이어나갔고 옹정제의 4남인 건륭제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이어 '강건성세'로 알려진 청나라의 전성기를 이끌게 되었죠
외치로보나 내치로보나 어느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명실상부 최고의 성군이긴 한것 같네요
지금까지 천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최고의 성군으로 일컬어지는 강희제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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