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통일한 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 통일을 하기 직전까지갔지만 측근의 배신으로 꿈이 좌절되고 마는데요
노부나가를 대신해 전국시대의 혼란했던 일본을 통일한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죠
오늘은 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는 1537년 3월 17일, 오와리국의 하급무사인 기노시타 야에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죠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이름은 훗날 지어진 이름이고 처음에는 기노시타 도키치로라는 이름을 사용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야에몬이 부상을 입자 무사에서 백성으로 전락해버렸고 그렇게 배고프고 가난한 백성이 되어 힘든 어린시절을 보냈죠
아버지가 사망 후 그는 무사가 되기로 결심해 스루가 국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마쓰시타 유키쓰나의 부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히데요시의 특출난 일솜씨와 말주변으로 인해 주변 동료들이 시기를 하고 그를 괴롭히자 결국 참지못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오다 노부나가의 부하가 되기로 결심했죠
그러던 어느날 오다 노부나가가 밖으로 나갈때 히데요시는 옷을 벗은채로 노부나가의 수레앞에 누워있었습니다
그러자 노부나가의 부하들이 그를 죽이려고했는데 그를 범상치 않게 본 오다 노부나가가 부하들을 제지하더니 히데요시를 불러 소원을 말하라고 하는것이었죠
그러자 히데요시는 가난해서 도저히 살아가기가 힘들다고하니 이에 노부나가는 그에게 변소지기 일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찌나 변소를 깨끗히 청소하는지 냄새가 나거나 티 하나 없었다고 하죠
또한 히데요시는 겨울에 노부나가의 신발을 품안에 안고 미리 따뜻하게 데워 놓았다는 설이 있을정도로 그는 노부나가의 눈에 들어 출세를 하기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노부나가는 히데요시에게 원숭이라고 부르며 그를 천시했음에도 그는 꾸준히 충성을 다했다고 하죠
그리고 1561년 8월 그는 스기하라 사다토시의 딸 고다이인과 결혼을 했습니다
이후 히데요시는 꾸준히 노부나가의 신임을 얻은 결과 일반 병사에서 장수로 진급할수 있었죠
노부나가는 개인의 역량과 실력을 중시했기 때문에 히데요시는 비록 미천한 신분이었지만 자신의 뛰어난 능력 덕택에 계속 승승장구 할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1568년 노부나가가 교토에 입성할 때 이미 오다 가문의 중요한 가신이 되어있었죠
그리고 주군이던 노부나가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교토에서 쫓아내 무로마치 막부를 사실상 멸망 시켰을 무렵 그는 성을 하시바로 바꿨습니다
오다 노부나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손잡고 동쪽에 반대파 세력이던 다케다 가쓰요리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다음 이제는 서쪽에 반대파인 모리 가문과의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죠
모리 가문이 통치하던 주고쿠 지방을 평정하면 전국통일을 눈앞에 두게 되는 굉장히 중요한 전쟁이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는 이 중요한 전쟁의 지휘관으로 하시바 히데요시로 정했죠
그렇게 1577년 10월, 히데요시는 주고쿠를 평정하기위해 출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중간에 위치해있던 하리마국과 다지마국도 먼저 공략했고 고즈키성도 차지하는 전공을 세웠죠
게다가 모리가문과 연계해 반란을 일으킨 벳쇼 나가하루의 반란도 진압하면서 명성을 떨쳤으며 큰 싸움없이 돗토리성을 쉽게 함락시키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다음 히데요시는 다음 공격 목표인 빗추 다카마쓰성으로 출발했죠
그런데 이 성은 늪지대의 한 가운데 있던 성으로 수비에 최적화된 천혜의 요새였는데요
빗추 다카마쓰성을 공략하기에 힘에 부치자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에게 지원군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는 동시에 그는 군사인 구로다 요시타카의 책략을 받아들여 한가지 작전을 세웠죠

바로 전 병력을 동원해 성을 포위한 다음 성 주변에 둑을 쌓아 강을 막았습니다
약 12일만에 높이 8m에, 길이가 약 3km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의 제방을 완성했죠
바로 저지대에 위치한 다카마쓰성을 수몰시키기위해 제방을 쌓았던 것입니다
이후 제방이 완성되고 장마철이 되자 순식간에 성은 물에 잠기게 된것이죠
그렇게 히데요시는 그곳에서 압승을 거두게 됩니다
그런데 6월 2일에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지는데요
바로 아케치 미쓰히데의 배신으로 주군이던 오다 노부나가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었죠
그 소식을 듣자마자 재빨리 회군을 하기 시작한 히데요시는 불과 11일만에 돌아 올수 있었고 모리 가문과 전쟁중인 히데요시가 이렇게 빨리 돌아올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한 아케치 미쓰히데는 그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히데요시와 맞붙게 된 미쓰히데는 결국 패배하고 말았죠
그리고 미쓰히데가 사카모토로 도망가던 중에 지역 농민들 손에 최후를 맞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교토를 장악한 히데요시는 주군 노부나가의 복수를 자신이 했다는 점을 내세워 더 강한 권력을 가지려 노력했죠
그리고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를 정해야 했는데 첫째 아들 오다 노부타다는 아케치와의 싸움에서 전사했고 그렇게 후계자 후보는 둘째아들 노부카쓰, 셋째 아들 노부타카, 그리고 전사한 노부타다의 아들 히데노부로 좁혀졌습니다
이중에 도요토미는 고작 3살밖에 되지 않는 히데노부를 밀기 시작했죠
아이가 어릴수록 자기 마음대로 휘두를수 있기 때문에서 였습니다
하지만 당연히 삼남 노부타카는 이 결정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했는데 자신을 지지하던 시바타 가쓰이에와 손을잡고 반기를 들었지만 결국 실패했으며 가쓰이에와 노부타카는 할복으로 생을 마감했죠
그리고 둘째 아들 오다 노부카쓰는 교토에서 내쫓아버렸습니다
하지만 1584년 노부카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손잡고 히데요시에 저항했는데요
그렇게 히데노부를 지지하는 히데요시와 노부카쓰를 등에 업은 이에야스로 진영이 나뉘게 되었고 결국 오와리의 북부지방에서 전투가 치뤄졌죠
히데요시의 군대는 처음엔 이에야스의 군대에 패배를 거듭해 그렇게 겨우 잡을수있었던 히데요시의 모든 패권이 이에야스에게 넘어가나 했지만 히데요시는 또 다시 꾀를 내어 노부카쓰와 접촉해 화해를 해버린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이에야스도 더이상 싸울 명분을 잃어버리게 되면서 12월엔 그도 히데요시와 화해 할수밖에 없었고 노부카쓰의 반란은 막을 내리게 되었죠
그렇게 그는 일본의 최고 권력자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1585년 7월에는 관백이 되었고 이듬해인 1586년에는 천황을 독촉해 도요토미란 성을 하사받아 도요토미라는 성씨를 사용하기 시작했죠

그렇게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기존세력까지 규합해 나머지 평정하지 못했던 지역을 하나하나 평정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큐슈 지역과 시코쿠 지역까지 평정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원래 통치하고 있던 지역에서 에도로 근거지를 옮기도록 강요한 뒤 1587년 그는 반대세력을 모두 굴복시켰으며 마침내 130여년간의 전국시대의 마침표를 찍고 일본을 통일하게 되었죠
그리고 그는 자신의 본거지인 오사카에 큰 성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오사카를 동남아시아를 비롯해 여러 나라들과 물자를 거래하는 도시로 성장시켜 무역을 장악하는 거점지로 만들려고 한것이죠
그리고 그는 어처구니없는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요
바로 명나라를 정복하려는 생각을 가졌던 것입니다
당시 명나라의 황제는 만력제였는데 그는 30년이 넘는시간 동안 조정의 일은 하나도 하지 않은채 주색에만 빠져 흥청망청 놀기만 했던 황제였기 때문에 명나라의 상태가 굉장히 위태로웠던걸 히데요시도 알고 있었던 것이죠
또한 오랜기간 평화가 이어져 오던 조선 역시 전쟁에 대한 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고 일본에 대해서도 완전히 방심하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일본의 군대는 이제 막 전국통일을 하고 군대의 사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기 때문에 한번 해볼만 하겠다 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히데요시는 조선 조정에 서신을 보내 명나라를 치려고 하니 조선은 길을 내어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외에도 그가 전쟁을 일으키려는 이유가 따로 있었는데요
바로 토지 몰수로 인해 영주들의 불만을 해외로 돌리는것과 동시에 영주들에게 나눠줄 땅이 필요 했으며 징집을 통해 영주들의 권력을 약화시킬 생각도 있었던 것이죠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6년전부터 엄청난 양의 배를 만들기 시작해 전쟁이 나기 직전에는 1천여척의 병선을 확보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산보다 더 성능이 좋은 유럽산 화승총과 실탄, 그리고 화약을 대량으로 구매했으며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조선과 최단거리에 위치했던 현재 사가현 가라쓰시에 히젠 나고야성을 축조해 그곳을 전진기지로 삼았죠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전쟁에 참여하라고 압박을 가했지만 이에야스는 관동일대의 반란진압을 핑계로 참여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히데요시가 함부로 할수 없을만큼 이에야스의 세력도 컸기 때문에 그의 군사 지원을 받는것을 포기했죠
모든 준비가 끝나고 나서 1592년 5월 23일, 20만명이 넘는 병력을 이끌고 부산포를 공격하였고 한양과 평양까지 파죽지세로 몰아부쳤습니다

그리고 일본이 빠르게 승기를 잡을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화승총의 위력 덕분이었는데요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3년전에 조선에도 화승총이 들어왔었지만 당시 조선은 장기간 지속된 평화속에 전쟁이나 화승총, 신무기 등에 무관심했던 것이죠
그러다보니 임진왜란 초기에는 화승총에 대한 정보조차 부족했고 그렇게 속절없이 당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얼마안가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강력한 조선수군이 바다에서 연승을 거두기 시작했고 조선이 제해권을 장악하면서 전세가 뒤집히기 시작했죠
일본은 수로를 통한 보급로가 막혀 빠른 조선 정복을 실패하고 말았고 심지어 명나라가 10만의 지원군까지 보내줘 이제 일본군은 후퇴를 거듭하게 되면서 전쟁도 교착상태에 빠졌습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병사와 물자를 내줬던 영주들의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고 히데요시의 건강도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죠
그러자 일본에서도 강화조약을 맺고 전쟁을 마무리 짓고 싶어했습니다
하지만 일본과 명나라의 입장차이가 좁혀지지 않았고 결국 히데요시는 1597년 협상 결렬을 알리며 조선에 2차로 병력을 출진시키면서 정유재란이 발발했죠
하지만 임진왜란때와는 전혀 다르게 일본은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오히려 국력만 소모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죠
그리고 히데요시 자신의 신상에도 문제가 생겼는데요
히데요시는 과거에 낳았던 아들 쓰루마쓰가 일찍 요절해 버린 이후 친자식을 갖는것에 기대를 전혀 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조카인 히데쓰구를 정식 후계자로 삼았고 도요토미 가문을 물려준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1594년 8월에 측실인 요도도노가 자신의 친아들 히데요리를 낳았던 것이죠
이로인해 히데쓰구와의 사이에 갈등이 생겨나고 말았고 결국 1595년 7월, 히데요시는 히데쓰구를 모반죄로 몰아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은 결국 훗날 도요토미 정권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낳고말았죠
어쨌든 1598년 어렵게 전쟁을 이어가던 일본군은 갑자기 철수하기 시작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유재란 중 후시미성에서 갑자기 세상을 뜨고 만것이죠
그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해 여러 이야기들이 있지만 아직까지 그의 사망 이유에 대해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7년에 걸친 전쟁이 막을 내리게 되었죠
히데요시가 죽기전 최고 직책의 부하들에게 아들 히데요리를 부탁한다고 유언을 남겼는데 그 자리에 있었던 인물 중 한명이 도쿠가와 이에야스 였습니다
이에야스 역시 히데요리를 지키겠다 약속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 제패에 대한 야망을 드러내기 시작했죠
미천한 신분에서 일본을 통일하기까지한 대단한 인물이지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으킨 희대의 악당이자 원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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