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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탐구

수부타이. 칭기스칸의 가장 충실한 심복이자 세계 최고의 명장

by 사탐과탐 2022.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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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칸의 가장 충실한 심복이자 세계 최고의 명장 수부타이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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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영국 BBC에서는 세계사 100대 명장을 꼽았는데요

놀라운 사실은 명장 1위로 이름조차 생소한 수부타이라는 인물이 선정되었던 것이죠

 

하지만 수부타이는 알사람은 다 아는 칭기스칸이 가장 신임하는 장수인 사준사구 중 4구의 한명으로 적이었던 중국인들 조차도 그를 '신의와 불변의 장수'라고 칭했던 인물입니다

또한 유럽과 중동에서는 칭기스칸과 거의 동급으로 악명이 높고 두려운 존재였죠

 

오늘은 전세계 역사상 희대의 명장으로 일컬어지는 수부타이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수부타이는 우랑카이족 출신으로 1176년에 태어났는데 어머니는 그를 낳다가 사망하고 말았죠

그리고 아버지는 대장장이였던 '자르치우다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과거 아버지 자르치우다이는 형인 젤메를 테무진의 노예로 바쳤는데 (테무진 : 칭기스칸의 본명) 당시 갓태어난 테무진 먹여살리기에도 벅찼던 예수게이는 훗날 젤메가 다 크면 그때 보내라며 그를 돌려 보냈죠

하지만 훗날 예수게이가 독살을 당하고 말았고 테무진은 포로로 잡히는 등 겨우겨우 목숨을 연명하고 살았는데 자르치우다이는 사실 예수게이의 죽음으로 약속을 이행하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 젤메가 어느정도 장성하자 테무진의 노예로 보내면서 약속을 지켰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때 젤메를 따라 수부타이도 14살의 나이에 테무진 칸의 카마그 몽골 부대에 입대했죠

당시 테무진은 부족이나 인종, 출신과 상관없이 자신이 능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높은자리까지 올려주었을정도로 오직 실력과 경험만 보고 인재를 등용했기도 했고 약속을 지켜 자신을 찾아온 젤메와 수부타이를 테무진은 각별히 신임했었습니다

 

수부타이는 입대했을 당시에는 테무진의 막사를 지키고 각종 시중을 드는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자연스럽게 칭기스칸과 여러 장군들의 전략 및 전술회의에 참여할수 있었고 이 덕분에 어릴적부터 많은 전술과 전략을 터득하게 되죠

그리고 전쟁에 대한 이해도 역시 높았습니다

 

그렇게 1196년이 되었을 때 테무진은 과거 의형제였던 자무카와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요

이때 수부타이는 전쟁에서 엄청난 활약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그는 1200년에는 타이치우드족을 정벌했으며 1202년에는 아버지의 원수이자 금나라를 등에 업고 온갖 악행을 저지르던 타타르족, 1203년에는 4대 부족중 하나인 케레이트족과의 전쟁에도 선봉에 나서서 무수히 많은 적을 무찌르는 공을 세우면서 타타르족과 케레이트족까지 복속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죠

 

또한 '베수트 제베'라는 명장의 부관으로 임명되어 더욱 더 정교한 전략과 전술을 짤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었으며 이 이후부터 압도적인 전공을 세우게 됩니다

1204년 나이만족과의 전쟁에서는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산맥을 돌파해 적진을 털어버리기도 하는 등 적들이 예상할수 없는 전략과 전술을 사용해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했으며 몽골을 통일하는데 일등공신이 되기도 했습니다.

 

1205년에 메르키트족 잔당들을 소탕했으며 금나라와의 전투에서도 수많은 공을 세운 수부타이는 1200년부터 1205년까지 거의 모든 전장에 투입되어 쉬지않고 적들을 베어 나갔던 것이죠

칭기스칸은 몽골을 통일한 후 실크로드 교역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교역의 중심지였던 호라즘 왕국과의 교역을 위해 사신단을 보냈죠

 

하지만 사신단이 호라즘의 도시인 오트라르에 도착하자 그곳의 총독이던 이날축은 사신단을 모조리 죽여버렸고 이에 칭기스칸은 한번 참아주면서 2차로 사신단을 보내 화친을 제안했지만 호라즘 왕 무하마드 샤의 동의 아래 이날축은 2차 사신단까지 모조리 죽여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이에 분노한 칭기스칸은 수부타이와 제베를 비롯한 10만여명의 병력을 일으켜 호라즘 왕국으로 출진하죠

 

호라즘 왕국과의 거리는 3000km가 넘는 거리 인데다가 황량한 사막 지대를 지나야했으며 추위와 굶주림으로 몽골군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고통을 받았던 행군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몽골군의 기세는 너무 강했기 때문에 호라즘 왕국은 전체 인구의 5분의 4가 죽거나 노예로 전락해버렸고 전쟁이 일어나고나서 고작 11일만에 수도인 사마르칸트가 함락되었으며 3년만에 호라즘왕국은 지도상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사신단을 죽였던 이날축에게는 눈과 귀에 녹인 은을 부어버렸으며 왕이었던 무하마드 샤는 몽골군을 피해 도망을 쳤는데요

이에 칭기스칸은 수부타이와 제베에게 2만의 군대를 주어 무하마드 샤를 끝까지 추격해 잡아오라 명령했고 이에 그들은 무하마드 샤를 잡으러 출격하게 되었습니다

무하마드 샤를 추격한다고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캅카스 지역에 있던 조지아 왕국을 조져버렸으며 조지아 왕국이 제대로 털리는 모습을 본 여러 작은 나라들은 얼른 줄서서 재물을 갖다 바치기 시작했죠

 

그렇게 엄청난 전리품까지 손에 쥐게되었습니다

수부타이는 무하마드 샤를 추격하면서 지나가는 모든 지역을 초토화시켰고 모조리 약탈했던 것이죠

그렇게 집요하게 무하마드 샤를 추격하던 수부타이는 결국 그를 카스피해의 어느 작은섬에 몰아 넣었고 얼마안가 무하마드 샤는 굶주림과 폐렴으로 인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에 1223년 칭기스칸은 수부타이에게 전리품을 가지고 귀환할것을 명령했는데 수부타이와 제베는 돌아가는 김에 크림반도까지 딱 찍고 전리품을 싹 걷어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크림반도에 있던 제노바 공화국의 식민도시들을 또 모조리 다 털어버렸죠

전리품을 충분히 획득했다 생각한 수부타이와 제베는 이제 돌아갈려고 하는 와중에 러시아 연합군 6~7만명과 맞딱드리게 되었는데요

 

수부타이는 칭기스칸의 명령도 있었고 다시 몽골로 돌아가는길에 카스피해 주위와 남러시아 주위를 정찰만 한 뒤 카스피해 위쪽으로 빙 돌아 킵차크지역 쪽을 지나 몽골로 귀환하려고 했던것인데 지레 겁먹은 러시아군이 선제공격을 해오면서 전투가 벌어졌던것입니다

그런데 오랜기간 전투로 단련되어있던 수부타이와 몽골군은 2만 VS 7만이라는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군을 완벽하게 격파해버렸죠

 

수부타이와 제베가 원정에서 돌아오자 칭기스칸은 격하게 그들을 반겨주었고 수부타이의 나이도 50세를 바라보던 나이 였기 때문에 그에게 이제 후방에서 편하게 쉬라고 했죠

하지만 수부타이는 칸이 직접 출진하는데 자신이 어찌 뒤에서 쉬고 있겠냐며 칭기스칸의 명령을 거부했다고 합니다

호라즘 왕국과의 전투에서 몽골 역시 굉장한 피해를 입기도 했는데요

 

그러자 과거에 몽골군에게 항복했었던 서하가 다시 들고 일어났고 이에 칭기스칸은 1227년에 수부타이와 여러 장군들을 불러모아 다시 서하를 공격하게 되죠

하지만 이때 낙마사고를 당해 칭기스칸은 앓아 누웠다가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고 그의 아들인 우구데이가 다음 칸이 되었습니다

수부타이는 우구데이칸에게 계속해서 몽골의 영토를 확장하고 주변국들을 정복해야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는데 우구데이 역시 수부타이를 믿고 있었기 때문에 1230년 마침내 그에게 지휘를 맡겨 별동대를 이끌고 동관으로 향하게 한 뒤 자신은 친히 본대를 이끌고 대대적인 금나라 침공을 시작했죠

 

하지만 수부타이는 이때의 전투에서 처음으로 뼈저린 패배를 맛보게 되는데요

1231년 수부타이는 당시 금나라 최고의 명장 '완안진화상'이 이끌던 금나라 군대와 맞붙었지만 패배하여 도망을 쳤는데 완안진화상은 수부타이의 목을 치기위해 추격했지만 결국 놓치고 말았죠

하지만 금나라가 다시 일어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얼마 후 몽골군에 의해 금나라의 수도가 함락되었으며 금나라 황제 애종이 도피 중 몽골군에게 포위당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뒤를 이은 말제도 몽골군에게 죽임당하면서 금나라는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금제국을 멸망시킨 후 열린 쿠릴타이에서 (쿠릴타이 : 몽골의 정책 결정 최고기관) 수부타이는 몽골제국 서쪽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라도 유럽을 쳐야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는데 지난 남러시아 정찰을 했을때 보아둔 수많은 이점들과 최강 기동력의 몽골 기병을 이용하면 순식간에 유럽을 점령할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죠

 

결국 우구데이 칸은 유럽원정을 승인했는데 그렇게 1236년에 칭기스칸의 손자이던 바투가 총사령관이 되었고 수부타이는 부사령관이 되어 15만명 이상의 대규모 몽골군이 서방 원정을 위해 출진하게 되었습니다

바투는 믿음직하고 모험심 강하기로 유명하긴 했지만 경험이 부족했기에 대규모 원정군을 이끌기엔 무리가 있었기 때문에 사실 바투는 명목상 총사령관이었고 실질적인 서방 원정군의 지휘는 수부타이가 맡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렇게 강들이 꽁꽁 언 겨울이 되자 전군 출진을 명령했고 한 겨울에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는 무모한 전략을 실현시킨 수부타이는 하루에 약 12km를 행군했으며 최대로 많이 행군한 날엔 128km를 주파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의 총 진군거리는 7000km에 달했다고 하죠

심지어 몽골의 침략에 대한 소문이 유럽에 퍼지기도 전에 수부타이는 모스크바에 도착했습니다

 

눈 깜짝할새에 나타난 몽골군에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한 채 흠씬 두들겨 맞은 러시아군은 겨우 병력을 끌어모아 반격에 나섰지만 수부타이에게 순식간에 격파 당했고 러시아의 대공 유리 2세마저 죽임 당했죠

또한 수부타이는 총사령관이던 바투의 삽질까지 커버쳐가면서 불과 1년도 지나지않아 러시아 북부를 초토화 시켜버렸습니다

 

그 이후 수부타이는 과거 제베와 함께 풍비박산을 내버린 키예프 공국을 다시 침공해 또다시 쑥대밭을 만들어 항복을 받아냈고 1940년 12월, 마침내 러시아 원정이 마무리 되었죠

이후 바투가 킵챠크 칸국을 세운 뒤 초대 칸이 되어 그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고 그렇게 러시아는 약 200년간 몽골의 지배를 받게 된것입니다

 

이때 수십만에 달하는 러시아 유민들은 몽골군을 피해 헝가리로 도망쳐 국민으로 받아달라며 헝가리 국왕 벨라 4세에게 부탁했는데 이들은 모두 겁에 질려있었다고 하죠

또한 누가 침공해 오긴 했는데 그들이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는지 전혀 알수없는 지옥의 군대였다며 이상한 소리를 해댔다고 하죠

 

이에 벨라 4세는 지옥의 군대니, 전쟁이니 하는건 전혀 생각하지 못한 채 이들을 받아주면 자신의 권위가 더 올라갈것이라는 생각밖에 하지못하고 기쁘게 이들을 맞이 했죠

당시 헝가리의 군사력은 막강해 신성 로마제국과 함께 유럽 최강이라 자부할수 있었기 때문에 설사 그 지옥의 군대가 쳐들어 온다 하더라도 충분히 막을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수부타이는 러시아 북부를 정리하고나서 1941년 헝가리를 침공하기 시작하는데요

이때 배후를 안정시키기위해 부하인 바이다르와 오르다, 카단에게 약 8천명의 병사를 주고 폴란드와 보헤미아 지역을 침공하게 했는데 이때 폴란드의 레그니차 지역에서 유럽의 튜튼기사단과 성전기사단, 폴란드, 오스트리아 연합군은 몽골군에 의해 처참하게 궤멸되고 말았죠

 

이와 동시에 수부타이는 부대를 세갈래로 나누어 헝가리를 침공하는데 여러 방향에서 갑자기 침공해오는 몽골군에 의해 헝가리왕 벨라 4세는 정신을 차리지도 못한채 이리저리 휘둘리고만 있었습니다

그러다 벨라4세는 주위 나라에 원군을 요청한뒤 모든 병력을 모아 몽골군과 운명을 건 일전을 벌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렇게 원군을 요청하는 파발들이 유럽 각지로 흩어졌고 전 유럽에서 지원군이 속속 도착했죠

또한 당시 유럽에서 최강국이라 할수있는 신성로마제국에서도 원군을 파병했을 정도였습니다

헝가리로 집결한 원군들은 10만에 달했고 이에 맞서는 수부타이의 군대는 7만이었는데 수부타이는 겁에 질린척 군대를 후퇴하는척 도망을 치기 시작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잡힐듯 잡히지 않도록 적당히 도망을 쳤는데 쫓고 쫓기는 추격전은 9일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사요강에 이르러서야 두 군대는 운명을 건 결전을 하게 됩니다

당시 수부타이는 이미 주변 지형의 정찰을 모두 마친 상황이었기 때문에 결전이 일어나기 전날밤 적들이 모르게 3만의 병력을 몰래 강을 건너 빼돌린 뒤였죠

 

그리고 날이 밝자 샤오강 전투가 시작되었는데 공성병기를 이용해 포격을 가하면서 샤오강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유럽연합군이 강을 건너기 힘든 상황을 이용해 공성병기로 포격을 했으며 이에 연합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진영은 흐트러졌고 혼란은 가속화되었죠

연합군이 우왕좌왕대며 혼란에 빠지자 뒤로 빼놓았던 3만의 병력까지 합세해 연합군을 두들기기 시작했으며 이에 10만에 달하는 유럽연합군은 거의 전멸당하다시피했고 헝가리 국왕 벨라 4세도 겨우 목숨을 부지해 도망칠수 있었습니다

 

이 사요강 전투를 끝으로 유럽은 더이상 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에 저항할 힘이 없었고 수부타이는 헝가리 전역을 쑥대밭으로 만든 뒤 파죽지세로 동유럽 전체를 뒤흔들었으며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까지 정복했죠

그리고 이제 유럽의 최강국이던 신성로마제국으로의 침공을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유럽 전체는 패닉에 빠져있었는데요

자꾸 동유럽으로부터 밀려오는 겁에 질린 유민들과 그들이 전해주는 지옥의 군대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죠

 

당시 교황과 황제, 왕, 백성들 모두가 할수있는건 고작 신에게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이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신것인지 군대를 이끌고 밀고 들어오기만 하면 유럽 서쪽 끝까지 쭉 점령해 나갈수 있던 몽골군이 별안간 철수를 시작했던 것이죠

사실 수부타이와 바투는 모든 준비를 마친채 1241년 12월 서유럽까지 정복하기 직전에 몽골의 수도 카라코룸에서 온 급한 전갈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긴급 전갈은 바로 우구데이 칸이 사망했으니 새로운 대칸 선출을 위한 쿠릴타이가 개최되기 때문에 신속히 복귀해 참석하라는 이유에서 였죠

쿠릴타이 중에서도 새로운 대칸 추대를 위한 쿠릴타이는 그 어떤것보다 우선시 되었기 때문에 황족인 바투와 수부타이는 어쩔수 없이 철수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서유럽은 몽골군의 말발굽에 짓밟히지는 않았지만 수부타이가 철수하는 길에 있던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 몇몇 나라는 결국 몽골군에 의해 철저히 파괴와 약탈을 당하고 말았죠

 

이후 대칸으로 즉위한 귀위크 칸은 수부타이를 중국 원정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지만 원정 당시 너무 나이가 들었던 탓에 몸이 쇠약해져 말도 탈수 없었고 한쪽 눈까지 보이지 않는 상태였으며 결국 68세에 수도로 돌아와 쉬다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후 그의 일족은 몽골 제국과 원나라의 4대 명문가문 중 하나로 권세를 누릴수 있었고 그의 아들과 손자도 몽골제국의 명장으로 명성을 떨쳤죠

 

수부타이는 금나라를 정벌할때 완안진화상에게 한번 패하고 도망친 이후론 패배한적이 거의 없었고 평생 20여번의 원정 동안 두 나라의 운명을 건 총력전에서 65번이나 승리했으며 그렇게 멸망해버린 나라만 32개에 달했습니다

이런 총력전을 회전(會戰)이라고 하는데 수많은 명장들도 평생토록 5번 이상의 회전을 경험하기도 힘든데 수부타이는 65번이나 겪으면서 모든 회전을 격파해버렸으니 유럽 뿐만아니라 아시아에 걸쳐서 칭기스칸과 더불어 최악의 악명과 두려움을 떨게한 세계최고의 명장 중 한명이 되었죠

 

또한 우구데이 칸이 사망하지 않았다면 수부타이는 분명히 유럽을 제패했을거라고 합니다

칭기스칸의 가장 충실한 심복이자 세계 최고의 명장이라 일컬어지는 수부타이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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