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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탐구

오다 노부나가. 100여년간 지속된 전국시대를 종결시키고 일본 통일 직전까지 갔지만 아쉽게 죽은 인물

by 사탐과탐 2022.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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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여년간 지속된 전국시대를 종결시키고 일본 통일 직전까지 갔지만 아쉽게 죽은 인물 오다 노부나가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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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7년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후계자 문제를 명분으로 슈고 다이묘들이 항쟁한 ‘오닌의 난’ 이후 일본은 100여년간 각지역의 다이묘들이 전쟁을 일삼는 전국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일본의 막부시대는 천황 아래에 일본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쇼군이 있고 그 아래에 각 지역을 다스리는 다이묘(영주)들 그리고 그런 쇼군과 다이묘들을 호위하는 사무라이(무사)들이 있었는데요

 

하지만 일본이 전국시대에 접어들고 나서부터는 쇼군의 권력과 지배력이 약해지면서 다이묘들끼리 서로 치열한 영토 쟁탈전이 벌어지게 되죠

각 지역 영주들의 더 넓은 땅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100여년간 지속된 대 혼란의 시대 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백성들의 삶은 나날이 피폐해져갔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죠

 

그러자 끝없는 전쟁 상황과 혼란스러운 나라를 통일해 과거의 안정을 되찾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진 다이묘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지만 서로가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덕에 이런 혼란 상황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런때에 강력한 카리스마로 일본 전체를 휘어잡을 한 사람이 등장했는데 그사람이 바로 오다 노부나가 였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오늘은 약 200년간 존속되던 무로마치 막부를 끝내버리고 일본 통일의 직전까지 갔지만 허무하게 좌절되어버린 오다 노부나가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오다 노부히데로 오다 가문의 행정 사무를 담당했던 인물이었는데 오다 노부나가의 집안의 위치는 처음에는 보잘것 없는 편이었죠

그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노부나가는 14살이 된 해에 사이토 도산의 딸과 정략 결혼을 하게 되는데요

 

사이토 도산은 살무사라는 별명을 가진 비정한 성격의 소유자 였고 어릴적 바보라고 소문난 노부나가와 자신의 딸을 결혼시킨 이유가 훗날 오다 가문의 땅을 차지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썰도 있죠

실제로 노부나가는 별명이 바보였을정도로 어렸을때부터 행동이 굼뜨고 용모도 깔끔하지 않았는데 사실 이것은 오다 가문의 형제들과의 경쟁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한 행동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죽은후 오다 가문을 잇게된 노부나가는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경악을 금치못할 행동을 하는데요

당시 매장풍습이 있던 일본에서 그는 아버지의 시신에 향을 한번 확 뿌리고는 그대로 불을 붙여 화장해버린것이죠

당시 전통적인 것을 꺼리는 노부나가의 성향 이기도 했지만 그의 이런 과감한 행동은 노부나가의 세력을 확장 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또한 과거 바보같은 행세는 온데간데 없이 경쟁관계에 있던 다른 형제들과 친척들을 포함해 오와리국 내의 힘있는 가문들을 순식간에 복종시켰고 1559년에는 오다 이세노카미 가문도 멸망시키면서 방계혈통이던 노부나가가 오다가의 당주가 되었죠

그렇게 얼마안가 오와리국의 모든 영토를 자신의 손에 넣는데 성공 한 노부나가는 기요스성의 영주이자 오와리국의 태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근 지역의 태수이자 도카이도 최고의 무사라 불리던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오와리를 침공하지만 당시 오다는 3천명 밖에 안되는 군사로 요시모토의 군을 기습해 격파했고 결국 이때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오다에 의해 목숨을 잃었죠

그렇게 그의 이름이 세상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는 자신의 아버지 장례식에서도 그랬듯이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적인 성향의 인물이었죠

 

그는 자신의 부하들의 체면은 아랑곳 하지 않은채 엄청 막 대했으며 심지어 온갖 외모비하까지 해댔을 정도였습니다

사람들 많은곳에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원숭이라 불렀고 아케치 미쓰히데는 귤대가리라 불렀을 정도였죠

그리고 행동 역시 잔인무도 했는데요 자신에게 대항하는 사람들에게 자비는 없었죠

 

한 사찰에서는 승려들 모두가 합심해 노부나가에게 대항하려 들자 그들을 모두 한 사찰에게 몰아넣고 불을 질러버렸다고도 합니다

또한 노부나가는 전통적인 것을 꺼려하는 성향도 있었고 그만큼 새로운것을 받아들이는것 또한 빨랐죠

1540년대 말에 포르투갈의 상인들이 들고온 화승총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자 이걸 본 노부나가는 전투에서 매우 유용할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당시 그가 다스리던 오와리 지역은 비옥한 평야지대 였던 덕분에 쌀 수확량이 많았고 정략결혼을 통해 상업과 무역까지 섭렵하면서 가지게 된 막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다른 영주들보다 먼저 화승총 부대를 조직하기 까지 했죠

그리고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값비싼 대포까지 구입할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노부나가는 경제적 기반과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영토를 계속해서 늘려 나갔고 미노를 정복한 후 부터는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는데요

그는 '천하포무(天下布武)’라고 적혀있는 직인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것의 의미는 '무로써 세상을 덮겠다' 라는 뜻이었죠

바로 자신의 힘으로 천하를 통일하겠다는 의미 였습니다

 

그러려면 일단 교토로 진출을 해야 했었기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어느날 노부나가가 교토에 입성할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찾아오죠

바로 13대 쇼군이던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영주 중 한명인 미요시 가문에 의해 암살당하고 만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암살당한 쇼군의 사촌동생인 아시카가 요시히데를 다음 쇼군으로 옹립했는데 암살당한 쇼군의 동생인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도망쳐 노부나가에게 도움을 청했던 것이죠

 

그렇게 그는 막부를 바로 세운다며 교토로 군사를 끌고 갔고 마침내 미요시 가문과 14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히데를 내쫓고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15대 쇼군으로 옹립했습니다

이로써 그는 작은 오와리 지방의 영주로 시작해 교토까지 먹은 당대 권력의 일인자가 되었죠

그리고 그는 쇼군에게 요청해 대량의 화승총을 제조할수 있는 기반까지 마련할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부나가가 급격한 성장을 하고 심지어 교토까지 진출해 권력의 최고 위치까지 올라가자 그를 견제하거나 대항하는 세력이 더욱더 많이 생겨버렸죠

그런데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오다의 힘이 너무 강력해지자 여러 영주들과 합심해 토벌군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쇼군의 토벌군을 대파해버렸고 결국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교토에서 추방되고 말았죠

 

그렇게 전국시대의 혼란속에서도 겨우겨우 명맥을 유지하면서 200여년간 존속되었던 무로마치 막부는 끝이나고 말았습니다

비록 명목상이었지만 막부가 사라지자 영주간의 경쟁은 더 치열해졌죠

그런데 노부나가의 전국통일 야심은 큰 난관에 부딪히게 됩니다

이제는 과거와는 다른 강력한 세력과의 전쟁을 치뤄야 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중 일본 동쪽에서 가장 세력이 강력했던 다케다 가쓰요리와 패권다툼을 해야했습니다

당시 전투의 핵심전력은 바로 기마병이었는데요

다케다의 군대는 최정예 기마병을 보유하고 있었던 세력이었죠

반면 노부나가의 병력은 대부분 보병이었습니다

 

그렇게 나가시노 라는 곳에서 다케다 군대가 침공을 해오며 전투가 시작되었죠

그런데 최정예 기마병을 상대로 노부나가의 군대가 압승을 거둬 버리는데요

그는 전투가 벌어지기 전 3천여명의 화승총 부대를 만들었고 최강의 기마병으로 구성된 다케다 군도 화승총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당시 노부나가는 근처에 영주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연합작전을 벌였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군대는 나가시노 전투가 있기 하루 전날에 다케다 군이 방심한 틈을 타 기습공격을 감행했고 이후 다케다 군의 후방을 차단해 버렸던 것이죠

퇴로를 차단 당한 다케다군은 오다군에 돌격하는수 밖에 없었고 그런 다케다군에 화승총 공격으로 승리를 거머쥘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후로도 우에스기 겐신, 이시야마 혼간지 등과의 전투에서도 운도 많이 따라주기도 하고 연전연승을 거듭해 동쪽의 반대파 세력을 잠재울수 있었죠

이제 노부나가는 교토의 서쪽을 진압해야 했는데요

서쪽의 강력한 반대파 세력은 바로 모리가문이었죠

 

모리가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엄청나게 넓은 영토까지 차지하면서 전국 통일을 눈앞에 두게되는 중요한 시점 이었습니다

노부나가는 이 중요한 전쟁의 지휘를자신의 가신이던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맡겼는데요

노부나가의 명을 받고 출진한 하시바 히데요시는 쉽사리 돗토리성을 함락시킨 뒤 3만여명의 병사를 이끌고 다음 공격 목표인 빗츄다카마쓰 성으로 출진했죠

 

하지만 빗츄다카마쓰성에서의 전투가 교착상태에 빠지자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에게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노부나가는 부하인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원군을 이끌고 히데요시를 지원하라고 명령했죠

이에 미츠히데는 자신의 본거지로 돌아가 출진 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나서 5월 29일, 오다 노부나가 자신도 아즈치성을 출발해 교토 혼노지로 가서 그곳에서 지원군을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이때 노부나가는 고작 100여명의 수행원만 데리고 갔는데요

혼노지가 있는 지역은 자신의 가신 아케치 미츠히데가 다스리고 있던곳이기도 하고 혼노지는 단순한 절이 아니라 방어하기 좋은 요새였기 때문에 별 걱정 없이 약간의 병력만 데리고 갔던 것이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렇게 혼노지에 도착한 노부나가는 6월1일 다과회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이때 아케치 미츠히데는 자신 휘하의 병력 1만 3천여명을 이끌고 히데요시를 구원하러 가던 도중 돌연 진로를 변경해 병력을 교토로 돌려버린것이었죠

6월 2일 새벽, 미츠히데가 이끄는 1만 3천여명의 병력은 비로소 혼노지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나서 혼노지를 완전히 포위한뒤 공격을 개시 했죠

 

이에 노부나가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잠에서 깼고 얼마안가 미츠히데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몰려드는 적들에게 활을 쏘고 창을 휘두르며 맞섰지만 압도적인 병력차에 의해 심한 부상을 입고 말았죠

그러자 노부나가는 싸움을 포기하고 건물의 안에 들어가 부하 모리 란마루에게 불을 지르게 한 뒤 그 안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아케치 미쓰히데가 왜 오다 노부나가를 배신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미스테리 인데요

오다 노부나가가 평소에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치욕스러운 언사와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라는 의견도 있고 노부나가가 아케치의 영지를 빼앗으려는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다 라고도 하죠

 

어쨌든 전국시대를 종결 시키고 전국 통일에 가장 가까웠던 인물인 오다 노부나가의 꿈은 그렇게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가 이룬 업적이나 독특한 성격, 그리고 전통을 부정하고 신문물을 받아들이는 근대적 사고 등으로 인해 지금까지도 일본인이 좋아하는 전국시대 인물 중 1위에 뽑히고 있죠

그래서인지 그를 주제로한 여러 문화 예술 작품이 넘쳐난다고 하네요

 

통일을 이루기 직전에 부하에게 비참하게 죽임당한 전국시대 3웅 중에 한명, 오다 노부나가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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