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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탐구

무타구치 렌야. 역대급 무능함으로 일본제국의 패망을 앞당겨준 일본의 3대 오물이자 어둠의 독립운동가

by 사탐과탐 2022.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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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타구치 렌야는 일본의 3대 오물로 불리는데요 그는 역대급 무능함으로 일본제국의 패망과 우리나라 광복을 앞당겨준 개폐급 일본 장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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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부터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 중일전쟁은 수백만 명이나 되는 희생자를 만들어낸 끔찍한 사건이었죠

그런데 혹시 이 중일전쟁이 한 사람의 터무니없는 삽질 때문에 벌어진 전쟁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오늘은 온갖 뻘짓으로 일본제국이 패망하는데 큰 기여를 하면서 일본 내에서는 3대 오물로,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어둠의 독립운동가라는 조롱 섞인 칭송을 받는 무타구치 렌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888년 일본의 사가현에서 태어난 렌야는 22세가 되던 해인 1910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29세의 나이로 고급 참모 과정인 육군대학교를 졸업했죠

이후 그는 10월 혁명으로 집권한 볼셰비키의 공산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해 일본군이 러시아 영토에 출동한 시베리아 침공에 참전했고 이후 프랑스에 주재무관으로 파견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소령 계급에 해당하는 소좌 시절에는 러시아의 캄차카반도에 잠입해서 홀로 정탐 활동을 벌이기도 했죠

이때까지만 해도 그냥 평범한 일본군 장교 중 하나였지만 이후 일본에 돌아와 참모본부에서 일하다가 1936년 중국에 파견되어 베이징에 주둔 중인 제1연대의 연대장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어둠의 독립운동가 다운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의외로 잘 알려지지는 않은 사실이지만 중일전쟁이 일어난 원인을 제공한 것이 바로 렌야라고 하는데요

1937년 7월 펑타이에 주둔하고 있던 이치키 기요나오 소좌가 중국군과는 아무런 사전협의도 없이 중국의 관할구역을 침범해서 실탄사격훈련을 하고 복귀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8중대장인 시미즈 세쓰오 대위가 갑작스럽게 수십 발의 총소리가 들리자 깜짝 놀라서 병사들을 모아 점호를 실시했는데 정찰병 역할을 맡은 이등병 한 명이 보이지 않자 중국군의 선제공격을 받아 병사 1명이 실종됐다는 황당한 보고를 렌야에게 올렸죠

 

이에 렌야는 처음에는 중국군과 교섭을 할 것처럼 굴더니 한창 협상이 진행되던 새벽 4시에 갑자기 부하들을 시켜 즉시 중국군을 공격하라는 미친 명령을 내려버립니다

명령을 받은 이치키 소좌도 너무 황당해서 정말 공격해도 되는 거냐고 물어봤지만 렌야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중국군을 공격할 것을 명령했고 그렇게 중일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황당한 사실은 그 당시 렌야가 고위 장성 계급이 아니라 전쟁을 일으킬 권한이 없는 일개 연대장에 불과했다는 것이죠

일본의 육군성이나 참모본부로부터 중국을 공격해도 좋다는 그 어떠한 허가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독단적으로 그런 미친 짓을 벌인 것입니다

 

심지어 전투가 벌어지고 난 후 기자들이 취재를 하러 오자 전선에는 나가보지도 않았던 렌야가 피 묻은 붕대를 팔에 감은 채 "중국군이 도발을 해왔지만 내가 격퇴하는 중이다"라는 언론플레이까지 해댔죠

참고로 실종됐다고 알려진 일본군 병사는 점호 20분 후 본대에 복귀했으며 이후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한 수색작업에 동원돼서 어둠 속을 헤맸다고 하네요

 

그런데 당시 일본군이 어지간히도 부패했는지 총살을 당해도 모자랄 죄를 지은 렌야가 오히려 대령에서 소장으로 승진을 하고 1940년에는 중장으로까지 승진을 하게 됩니다

이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렌야는 제18사단의 사단장이 돼서 싱가포르 전투에 참전해 또다시 멋진 업적을 세우게 되죠

 

자신의 부대에서 술잔치를 벌이던 중 갑자기 포격이 날아오자 살기 위해 허겁지겁 도망가다가 하수구를 대피소로 착각하고 그곳으로 숨은 것입니다

그렇게 더러운 하수구에 처박혀있다가 수류탄 파편에 맞는 기가 막힌 부상을 입었다고 하네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1941년 12월 지트라 전투에 사단장으로 참여한 렌야는 운 좋게도 영국군과의 전투에서 그들의 보급품을 빼앗는데 성공하며 자신들의 보급을 해결하는 동시에 전투에서도 재미를 보게 됩니다

이때부터 렌야의 머릿속에 영국군은 약골이며 아군의 보급은 적군의 것을 뺏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죠

이런 렌야의 생각 때문에 일본군은 훗날 임팔작전에서 큰 재앙을 겪게 됩니다

 

렌야가 이끄는 18사단이 싱가포르를 함락시킨 후 일본제국군의 최고 통수기관인 대본영에서는 계속해서 인도로 진격하기를 원했지만 밀림과 산악지역에서는 작전을 수행하는 것 불가능하다는 렌야의 반대로 계획이 무산되었죠

그런데 1943년에 렌야가 미얀마 지역을 방어하는 15군의 사령관으로 승진한 후 영국군이 인도 지역으로부터 넘어와서 미얀마에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자 렌야는 이전에 자기가 했던 말은 까맣게 잊기라도 한 듯 갑자기 인도 침공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는데요

 

이후 렌야는 미얀마에서 아라칸산맥을 직접 넘어 인도제국 북부의 전략적 요충지인 아삼 지역의 임팔을 기습한다는 작전을 세우게 됩니다

그는 작전을 펼칠 예정지의 지형이나 적군의 상태 같은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15일이면 작전이 끝날 것이라며 보급부대도 따로 없이 병사들 개개인이 최대한으로 짊어질 수 있는 식량만 준비하게 만들었죠

 

하지만 실제 작전 기간은 3달이 넘게 걸렸다고 합니다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출발 직전에 신문기자단을 모아놓고 인터뷰에서 임팔은 3주일이면 충분히 뺏을 수 있으며 자신은 임팔뿐 아니라 인도 상업과 공업의 중심지인 델리까지 점령해버리겠다며 장담을 했다고 하죠

 

하지만 자신감이 넘치는 렌야와 달리 일본군 총지휘부인 대본영에서는 무려 9만 2천 명의 대병력을 동원하면서 보급계획이라고는 하나도 세워놓은 게 없이

"필요한 보급품은 적에게서 빼앗고 식량은 약탈하면 되고 포탄은 자동차 대신 소나 말에 싣고 가다가 포탄 다 쓴 후에 필요 없어진 소나 말을 먹으면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것마저 없으면 길가에 난 풀을 뜯어 먹으면 된다"라는 렌야의 일명 징기스칸 작전을 듣고 그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미친 소리냐며 그를 뜯어말렸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렌야의 밑에도 정상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참모들과 부하 지휘관들도 엄청나게 반대를 했지만 렌야는 반발하는 부하들을 가차 없이 모두 잘라버렸고 당시 일본의 최고 실권자였던 도조 히데키마저 렌야의 계획을 적극 지지하면서 그렇게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길 임팔 작전이 시작됐는데요

결과는 여러분도 예상하셨듯이 일본군의 참패로 끝났습니다

 

전사자만 3만 2천 명에 굶어죽은 일본군만 무려 4만 명이나 되었죠

렌야가 생각했던 것과 실제 전장은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입니다

렌야는 보급품을 적들에게서 뺏으면 된다고 했지만 당시 적군들 또한 상대에게 순순히 무기를 내줄 바보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후퇴해야 되는 상황이 오면 무기와 보급품을 적들이 쓰지 못하게 파괴해버렸죠

 

그리고 렌야가 식량으로 쓰겠다는 소와 말은 모두 점령지에서 조달했는데 애초에 장거리 이동을 하는데 적합하지도 않은 품종의 소와 말들을 강제로 부린 데다가 먹이마저 제대로 챙겨주지 않으면서 소와 말들이 대부분 굶어죽었다고 합니다

상황이 심각해져가자 렌야의 부하들은 더 이상 작전을 펼치는 것은 무리라고 건의했지만 렌야는 "작전이 제대로 수행되지 못하는 것은 정신력이 부족한 탓이다 무기의 부족이 패배의 원인은 될 수 없다"

 

라는 주옥같은 명언을 남긴 채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으며 식량이 다 떨어져서 병사들이 먹을 것이 없다는 보고에는 "일본인은 원래부터 초식동물이다 이렇게나 푸른 산에 둘러싸여 있는데 식량이 부족하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같은 편조차 모두 벙찌게 만드는 정신승리를 보여줬는데요

 

결국 먹을 것이 없어서 뼈와 가죽만 남은 부하들이 굶어죽어가는 꼴을 보다 못한 31사단장 사토 고토쿠 중장이 상급부대인 15군에서 보급도 제대로 못해주는 주제에 후퇴까지 못하게 막자 "멍청한 지휘관 하나 때문에 지금 1만 명의 부하들이 굶어죽기 직전이다 일이 이 지경이 된 것은 모두 사령관 때문이다"라는 전보를 보낸 후 독단적으로 후퇴를 결정해버렸습니다

 

전문을 본 렌야의 참모들이 사토 중장을 말리러 오자 사토는 "지금 우리들의 적은 영국군이 아니라 바로 렌야의 15군 사령부다!"라며 길길이 날뛰었고 이런 머저리들과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는 말을 남긴 채 정말로 후퇴를 해버렸죠

 

이후 사토 중장이 무타구치를 만나러 왔을 때 무타구치는 사토가 항명을 했으니 자결해 버리라며 탁자 위에 단도를 남겨뒀는데 정작 자신은 사토 중장을 보기 부끄러웠는지 어딘가에 숨어버린 채 사토를 만나주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이에 크게 분노한 사토는 "이 칼로 무타구치의 배때기를 쑤셔버리겠다!" 라고 이를 갈며 칼을 갖고 뛰쳐나갔다고 하네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렌야도 9만 명이 넘는 대부대 중 8만 가까운 병력을 날려먹은 게 찔리기는 했는지 그냥 자결해버릴까라며 혼자 중얼중얼 거리고 있자 그 꼴이 너무나도 얄미웠던 렌야의 부관이 "자결하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 중에 진짜로 죽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명색이 사령관님의 부하이니 자결하시겠다면 말리는 시늉은 하겠지만 당신이 정말로 사령관으로서 책임을 느낀다면 그냥 닥치고 배를 가르십시오 아무도 안 말립니다"라며 그에게 일침을 날렸죠

 

그는 전쟁이 끝난 후 열린 전범재판에서도 그가 했던 짓이 오히려 연합군의 승리에 도움이 되었다는 이유로 매우 가벼운 처벌만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후 임팔 전투의 일본군 전사자 유족들이 위령제를 지낼 때도 렌야가 그 자리에 나타나서 '임팔 전투의 패배는 내 잘못이 아니라 부하들이 잘못 싸웠기 때문'이라는 내용의 유인물을 나눠주려고 하다가 똥물 세례를 받고 쫓겨났으며 사토 고토쿠 같은 옛 부하가 죽었을 때도 장례식에 나타나서 똑같은 짓을 저지르다가 유족들에게 쌍욕을 들은 후에 멱살을 잡힌 채 바깥으로 내쫓기는 망신을 당했다고 하네요

 

지금까지 어둠의 광복군 무타구치 렌야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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