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베를린장벽 근처에서 콘서트를 하던 유명 가수, 말실수 한 동독의 실무자 그리고 오보를 전 세계에 타전한 언론사 이렇게 세가지 사건의 절묘한 조합으로 인해 얼떨결에 통일된 독일 이야기
20세기에 가장 황당한 사건을 들라고 하면 바로 베를린장벽 붕괴로 인한 독일통일을 들 수 있습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고 그 누구도 의도치 않았지만 우연과 실수 그리고 오보가 결합되어 발생한 황당한 사건이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가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있는 것처럼 2차 세계 대전 이후 20세기 말까지 독일은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되어 있었죠.
서독은 자본주의 경제체제하에서 종교와 노동의 자유가 보장된 의회 민주주의 국가였고 동독은 소련의 영향권 하에서 친소련적인 사회주의 공화국이었습니다.
이 독일을 가로질러 분리하는 장벽이 바로 베를린 장벽이었죠.
베를린 장벽은 독일 분단의 상징이자 동시에 냉전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1989년부터 동독에서는 각종 개혁을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가 이어졌고 특히 1989년 9월 라이프치히에서의 대규모 시위를 기점으로 국민들의 시위는 동독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동독인들의 엄청난 시위로 인하여 당시 최고지도자였던 '에리히 호네커' 동독 공산당 서기장은 잘렸고 동독 시민들은 호네커의 사임을 계기로 '언론자유화, 자유로운 여행 개방'을 원한다며 오히려 더 과격한 반정부 시위를 벌이면서 동독의 상황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이에 다급해진 동독의 집권당이었던 공산당은 소련에 급히 도움을 요청도 해 보았지만 당시 소련 경제 여건도 매우 좋지 않았기에 소련의 대통령인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동독에 대해 이전과는 다르게 간섭하지 않는다며 수수방관으로 일관합니다.
상황이 계속해서 다급해지자 동독 공산당은 일단 분노한 반정부 시위대를 달래면서 잠시라도 시간을 벌기 위해 여행 자유화 정책을 조만간 실시하겠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1989년 11월에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발표는 폭동 수준에 이르게 된 시위대에 대한 회유책이었을 뿐 실제로는 여권발급 기간 단축 외에는 바뀐 것이 전혀 없었죠.
그런데 이 회유책도 못 되는 '동독 정부의 여행 자유화 개선 검토'에 대해 한 이탈리아 언론이 엄청난 사고를 치고 맙니다.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동독의 여행 자유화 정책을 발표한 ‘귄터 샤보프스키’는 휴가에서 막 돌아온 상황이었는데 여행 자유화 정책에 대해 제대로 숙지 못한 상태에서 언론 앞에 서게 됩니다.
동독의 여행 자유화와 관련된 기자 회견장에서 "11월 10일부터 여행 허가에 관한 출국 규제 완화에 대한 내용을 베를린 장벽을 포함하여 모든 국경 통과 지점에서 출국이 인정된다" 라고 잘못 발표해 버립니다.
그리고 "언제부터 국경 개방이 시행됩니까?" 라는 이탈리아 기자의 질문을 받자 별 생각없 이 한마디를 해 버립니다.
그 말은 바로 "지금부터 당장" 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기자 회견장에 참석한 기자들은 샤보프스키가 말한 동독의 여행 자유화 정책이라는 게 여권 심사 기간 단축과 같이 별거 아니라는 걸 알았기에 동독 실무자의 발언이 실언임을 알았고 이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안사'라는 언론사가 동독 정부가 발표한 어설픈 여행 자유화 조치를 황당하게도 베를린 장벽 철거라고 세기의 오보를 낸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긴급 속보로 전 세계로 타전을 한 것이죠.
사실 평상시 라면 그냥 묻힐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 동독의 상황이 전국적인 시위로 격양되어 있었기에 이 오보 조차도 엄청난 파급력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서독의 언론사에서도 이탈리아의 보도를 인용하여 곧 베를린장벽 철거에 대한 소문을 보도하게 됩니다.
소문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지만 당시 오랜 시위로 흥분한 동독인과 또 수많은 서독인들이 베를린장벽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갑자기 떼로 몰려든 군중들은 누구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장벽을 부수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장벽에 먼저 올라간 것은 서독인들이었고 장벽에 서독인들이 있는 것을 본 동독인들도 연장을 챙겨와서 장벽을 부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베를린장벽 인근에서는 데이비드 보위가 콘서트를 하고 있었는데 그의 콘서트를 보고 듣기 위해 동서 베를린 시민들이 장벽 근처로 몰려들어 있는 상태에서 그의 노랫소리는 장벽을 타고 베를린 전역에 퍼져나갔고 베를린 장벽 파괴에 커다란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데이비드 보위가 부른 노래는 히어로즈라는 노래로 그는 장벽에 가로막혀 쉽게 만날 수 없다니 얼마나 안타까울까 생각하며 베를린 장벽에서 격정적으로 포옹하는 한 연인에게 영감을 얻었고 사랑과 젊음이 있다면 장벽도 무너뜨릴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았던 노래가 바로 '히어로즈'였습니다.
데이비드 보위는 후에 인터뷰를 통해
"벽 건너편 사람들이 함께 노래를 따라 불렀다. 내 인생에 다시없을 일이었다."
라고 말할 정도로 인상 깊은 광경으로 이를 기억했다고 합니다.
평소 같으면 당연히 기관총을 난사했을 동독의 국경수비 대원들도 전국적인 시위의 광풍이 불던 상황에서 통제 불가능한 어마어마한 인파가 계속 밀려오자 극단적인 불안감이 그들을 덮쳤고 공산당 상부에 이 같은 사태를 보고를 했지만 어떠한 대답도 듣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동독의 공산당 최고지도부도 국경수비대의 긴급 보고를 받았지만 몰려든 인파가 너무 많았기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고 있었으니 국경수비 대원들이 아무런 물리적인 제지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죠.
동독 공산당은 자신들이 그동안 믿어왔던 소련의 지원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동독인들의 엄청난 시위와 서독인들까지 베를린 장벽에 몰려든 상황에서 총격을 해서 엄청난 사상자가 날 경우 그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국경수비대 장교들과 병사들은 그저 상황을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이렇게 어이없게 베를린 장벽이 해체되게 됩니다.
그렇게 1989년 서방의 여러 예술인들과 록 가수들도 떼를 지어 베를린 장벽으로 와서 특별 콘서트를 여는 등 베를린 장벽 일대는 1989년 연말까지 축제 분위기였고 동독은 베를린 장벽 해체 후 구심점을 잃고 와해되어 1990년 10월에 통일 독일이 공식 선언됩니다.
베를린장벽 붕괴를 야기한 샤보프스키는 사실 베를린장벽 철거의 1등 공신이었지만 과거 베를린장벽을 무단으로 넘으려는 동독인 다수를 살해한 혐의로 10개월간 투옥되었다가 사면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평생 자신의 실수에 대한 죄책감과 도의적 책임감에 시달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통일은 전 독일국민에게는 정말 좋은 일이었지만 동독의 붕괴는 그로 인한 것이었으니까요.
당시 동서독 수뇌부들은 물론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의 나라 수뇌부들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독일의 통일은 샤보프스키의 말실수와 이탈리아 언론의 오보 그리고 영국 가수 보위의 콘서트 영향으로 인해 냉전의 붕괴라는 20세기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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