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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탐구

사드 후작. 사디즘을 창시한 원조 사디스트

by 사탐과탐 2021.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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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귀족이었던 사드 후작은 가학적이고 괴상한 성적 집착을 보였습니다.
그는 훗날 사디즘이라는 용어를 탄생시킨 주인공이며 사디스트의 원조이기도 합니다.

 

1768년 부활절 때 프랑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매춘부였던 로즈 켈러에게 한 명의 젊은 귀족 남자가 다가오죠.

 

그녀는 방을 청소해 주면 금화 한 닢을 주겠다는 젊은 귀족에 이끌려 어떤 한 집으로 가게 됩니다.

집에 도착하자 약속과는 달리 그 귀족 남자의 태도는 180도 달라졌습니다.

 

그녀는 온몸에 채찍질을 당했고 칼로 인해 찢겨진 살에 뜨거운 밀랍이 부어지는 등 생전에 당해보지 못한 기괴한 짓을 당합니다.

그러다 로즈 켈러는 천신만고 끝에 그 집을 탈출하게 되고 경찰에 신고를 합니다

 

이 사건을 ‘부활절 사건’이라고 부르죠.

부활절 사건은 프랑스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사건이었습니다.

 

사드 후작 초상화

그 기이한 짓을 행하던 젊은 귀족 남자는 이 사건으로 인해 감옥신세를 지게 되죠.

젊은 귀족 남자는 사드 백작이었고 이 사건으로 인해 사드 백작은 세상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사드 백작의 본명은 '도나시앵 알퐁스 프랑수아 드 사드' 로 1740년 6월 2일에 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의 귀족의 자제로 태어났습니다.

 

 

무난한 10대 생활을 보냈던 사드 백작은 1767년 초 부친이 사망하자 그는 작위를 물려받아 사드 후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문의 재산을 물려받았는데 유흥비로 거액을 탕진하게 됩니다.

그는 10대 후반부터 사디즘적 면모를 보이며 동네 난봉꾼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고 부활절 사건이 터지며 그의 악명은 온 프랑스로 퍼지게 되었죠.

부활절 사건으로 인해 수감 후 석방된 후에도 사드 후작의 행각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최음제가 들어있는 사탕을 가지고 다녔는데 마르세유 지방을 방문했을 때 매춘부를 상대로 최음제를 과다하게 사용했고 그 부작용으로 인해 매춘부가 실신하자 살인미수 혐의를 받게 되어 이탈리아로 도주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사드 후작 (영화 퀼스)

 

더 가관인 것은 이때 아내 대신 불륜 상대였던 애인 한 명과 함께 도망을 갔는데 그 애인은 다름 아닌 처제였던 것이죠.

 

이에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강했던 장모는 사드 후작의 행태에 엄청나게 분노했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사위를 미워하며 벼르게 됩니다.

 

아무튼 도피 생활을 이어가다 1774년 부인과 함께 자신의 영지의 성에서 칩거 생활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곳에서 그의 기행은 악명을 더해가기 시작했고 심지어 그 기행을 아내까지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미성년자인 하녀들을 상대로 음란하고 가학적인 행위를 하기도 했고 어린 매춘부들 하인들 그리고 아내와 함께 자신의 성에서 온갖 이상한 행위를 했습니다.

 

남자와 관계를 맺기도 하고 채찍질이나 가학적인 행위를 동반한 관계를 가지기도 했습니다.

 

이 일이 알려져 1777년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의 명령에 의해 체포되게 되는데 그를 미워하던 장모가 국왕에게 호소하여 사면 없는 무기한 구금 명령을 받아냄으로써 결국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또다시 감방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는 감방에 수감이 된 후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쥐스틴 또는 미덕의 불운>, <쥘리에트 이야기 또는 패덕의 승리>, <소돔의 120일> 등 많은 창작물을 남기게 됩니다.

 

쥐스틴 또는 미덕의 불운

그 이후 사드 후작은 1784년 파리의 바스티유 감옥에 이감되었다가 감옥 밖의 군중들을 선동한 이유로 정신병원으로 보내집니다.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프랑스 왕정이 폐지되자 사드 후작은 자유의 몸이 되는데 이미 부인에게는 이혼 당했고 남은 재산마저 모두 탕진해 버린 후라서 그는 집도 절도 없는 상태였죠.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비참한 생활을 하다 자신이 썼던 여러 원고들을 익명으로 간행하기도 했지만 악평만 얻었습니다.

 

1793년 말에 반혁명분자로 지목되어 다시 체포되었다가 석방되기도 했고 나폴레옹 치하인 1801년 초에는 음란물 유포 죄로 또다시 체포되었고 나중에는 또다시 정신병원으로 옮겨집니다.

 

이미 사드라는 이름은 프랑스 내에서 악명으로 자자했고 그 이름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던 자녀들이 그를 정신병자로 몰아세워 정신병원에 가둬버린 것이었죠.

 

정신병원에 갇힌 사드 후작 (영화 퀼스)

 

그 이후 그는"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나에 대한 기억이 깨끗이 사라지는게 더없는 기쁨이다" 라며 자신의 무덤 위에 여러 가지 나무를 심어 무덤의 흔적조차 없애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1814년 12월 2일에 정신병원에서 눈을 감게 되었습니다.

 

그의 유언과는 달리 그의 이름은 세월이 흐르며 더욱더 악명을 얻게 되었고 그의 이름인 사드를 따서 사디즘과 사디스트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사디즘은 가학성애로 성적 대상에게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줌으로써 성적 쾌락을 얻는 것을 뜻하고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을 사디스트라고 하죠.

 

훗날 사드 후작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나뉘는데 미치광이 변태 성도착자라는 부정적인 평가와 인간의 성적 본능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자 및 가톨릭 교회와 귀족들의 위선을 까발린 폭로자로서의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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