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명품 브랜드 샤넬의 창립자 코코 샤넬은 알려진 이미지와는 다르게 매국노와 나치 추종자 이미지도 있습니다.
이중성 이미지가 있는 코코 샤넬에 대해 자세히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900년대 당시 프랑스의 여성복은 쓸데없이 큰 치마와 숨쉬기 힘들 정도로 꽉 조이는 코르셋을 착용하는 등 정말 실용적이지 않고 불편했으며 거추장스러웠습니다.
그러자 이 거지 같은 여성복에 대해 회의감을 느낀 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 여성의 이름은 '가브리엘 보뇌르 샤넬' 이었습니다.
그녀는 꽉 조이는 불편한 코르셋을 없애버리고 거추장스러운 긴 드레스를 확 잘라버려 리틀 드레스를 만들었으며 남성용 정장의 소재를 사용해서 심플하고 실용적인 디자인의 현대적 여성복을 만들어 버렸죠.
그 현대적 여성복의 이름은 '샤넬 슈트' 였습니다.
이 디자인을 만들어 낸 것을 시작으로 속옷이나 장식이 많았던 여성복을 완전히 실용적이고 깔끔하게 탈바꿈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죠.
또한 그녀는 최초의 여성용 바지도 만들었습니다.
현대 여성복의 시초가 되는 옷들을 그녀가 만들어 낸 것이죠.
그리고 그녀는 '모든 여성들에게 아름다움을' 이라는 모토를 가지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 샤넬을 만들어내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코코 샤넬의 인생 자체는 대중적으로 알려진 모습과 다르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샤넬 브랜드의 대중적 이미지는 그녀의 과거에는 관심이 없던 미국에서 만들어졌고 많은 부분에서 페미니즘 운동의 영향으로 인해 좋게 포장된 이미지라고 하죠.
단적인 예로 미국 타임지에서는 코코 샤넬을 20세기 100대 인물로 선정했을 정도이지만 프랑스에서는 그녀의 인생과 철학에 대해 잘 알기에 평가가 좋지 못합니다.
프랑스 대표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는 프랑스의 정치∙경제∙문화 등의 발전에 공적이 있는 사람에게 수여하는 최고 권위의 훈장인데요.
크리스티앙 디오르, 이브 생로랑, 위베르 드 지방시, 엠마누엘 웅가로, 잔느 랑방, 피에르 발망 등 수많은 프랑스 패션 디자이너들이 수상하기도 했지만 정작 코코 샤넬은 받지 못한 상이죠.
그리고 그녀의 사업 수완과 디자이너 로써의 천재성은 인정하지만 사생활에 대해서는 말이 많습니다.
그녀는 불우한 삶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과감히 개척해나간 신여성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돈 많은 여러 남자들과 교제하며 그들로부터 자금을 후원받아 사업을 키우고 확장해 나갔으며 위기가 있을 때에도 그들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등 말이 많은 인물입니다.
현재 최고의 명품 브랜드 샤넬의 창립자인 그녀가 어째서 이런 평가를 받고 있을까요?
1883년 8월 19일 프랑스의 소뮈르라는 곳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릴 적에는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알콜중독의 아버지에 의해 수녀원과 고아원에 맡겨져 그곳에서 생활했습니다.
나이가 좀 든 후 수도원에서 도망쳐 도시로 와서 살게 되었는데 가수가 되기를 꿈꿨던 그녀는 카바레에서 노래를 하게 되었죠.
이때부터 자주 불렀던 노래의 가사를 따와 '코코 샤넬'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정작 샤넬 본인은 코코 샤넬이라는 예명을 썩 좋아하지는 않았다고 하죠.
하지만 나중에는 본인도 인정을 했는지 샤넬의 로고를 코코에서 C를 따서 하나는 그대로 쓰고 하나는 뒤집어써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카바레에서 노래를 하던 그녀는 에튀엥느 발장이라는 장교와 교제를 하며 노래를 그만두고 그 남자의 목장에서 머물게 됐는데 거기서 일하는 여자들을 보고"여자들은 왜 저렇게 불편한 복장으로 일을 하고 있을까?"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애인이던 발장의 후원으로 모자 가게를 개업하게 되었는데 발장과 헤어지게 되면서 영국의 청년사업가인 아서카펠과 교제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아서카펠의 도움으로 두 번째 가게인 '샤넬 모드' 라는 모자 가게를 오픈하게 되었으며 모자가 잘 팔리자 여성복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최초의 여성 바지를 만들어냈는데 당시 바지를 처음 입어본 여성들에게 너무 편하다며 극찬을 받았죠.
1916년에는 컬렉션을 발표하며 대성공을 거뒀고 손님들에게 서비스를 주려고 한 조향사에게 향수 샘플을 몇 개 보내달라고 합니다.
샘플들의 향기를 맡아본 샤넬은 5번째 향수를 골랐는데 이 향수가 샤넬의 대표적 향수인 '샤넬 No.5' 향수이죠.
처음엔 VIP 고객들을 위한 특별한 선물이었던 향수였는데 반응이 폭발적이고 대박의 조짐이 보이자 출시를 하게 됐으며 이 향수로 또다시 떼돈을 벌게 됩니다.
메릴린 먼로가 "전 자기 전에 샤넬 넘버 파이브만 걸쳐요" 라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죠.
애인이던 카펠이 사고로 사망하자 그녀는 웨스트민스터 공작과 교제를 하게 되었는데 보석 애호가이던 공작의 영향을 받아 쥬얼리 컬렉션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당시 같이 활동했던 대부분의 패션 디자이너들과 사이가 굉장히 안 좋았는데요.
다른 디자이너들의 패션을 진부하다느니, 이상하다, 한심하다 라며 악평을 쏟아 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브 생로랑에게는 자신의 정신적 후계자라며 칭찬하기도 했다네요.
계속해서 승승장구하던 샤넬은 1939년엔 공장의 노동자가 약 4천 명이 될 만큼 대기업으로 성장하지만 그녀는 노동자들의 인권이나 처우에 대해선 일절 관심이 없었고 여성인권에 대해서도 역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노동인권이 존중되지 않는 환경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게 되었고 그때 충격을 받은 샤넬은 사업을 접고 프랑스 패션계를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미국에서 메릴린 먼로 덕에 갑작스럽게 얻게 된 인기와 미국의 페미니즘 운동으로 인해 샤넬 자신의 이미지는 운 좋게도 나쁘지 않게 포장되었죠.
그리고 2차 세계대전에 발발했을 때 프랑스가 독일군에 점령당하자 샤넬은 독일군 장교와 교제를 하며 나치에 적극 협력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옛 애인인 웨스트민스터 공작의 친구였던 윈스턴 처칠의 마음을 움직이려 했던 공작에도 적극 가담했으며 나치의 비밀경찰과 가까워지면서 독일 방첩국에 첩보원으로 발탁되어 나치의 요원으로 쓸만한 인물을 탐색하는 임무를 하는 등 스파이 노릇까지 했었죠.
그녀가 나치에 협력한 이유는 그녀의 사업 파트너였던 피에르 베르트하이머 라는 사람 때문이라는 설이 있는데요.
샤넬은 1924년부터 이 피에르 베르트하이머 라는 사람과 사업제휴를 통해 향수 사업과 의류사업에 대한 지분을 나눴었습니다.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했을 때는 베르트하이머는 가족들과 미국으로 건너 갔고 샤넬 향수 부문을 그녀 혼자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인 베르트하이머가 소유하고 있던 샤넬 코스메틱에 대한 권리를 빼앗고 싶었기 때문에 나치에 가담했었다고 하죠.
하지만 훗날 샤넬은 샤넬 브랜드 자체 및 모든 권리를 베르트하이머 가문에 팔아버렸고 현재까지도 샤넬 브랜드는 피에르 베르트하이머의 손자 두 명이 반반씩 소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다 1944년에 연합군이 프랑스에서 독일군을 몰아내고 프랑스를 해방시키자 샤넬은 나치 독일에 협력했다는 비난이 쏟아졌고 프랑스를 탈출해 수년간 스위스에서 망명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10년 후 스위스의 망명생활을 끝내고 프랑스에 돌아온 샤넬은 다시 프랑스 패션계로 복귀를 꾀했지만 프랑스에선 매국노라는 타이틀이 씌워져 샤넬 브랜드는 맥을 못 추었죠.
하지만 1955년에 발표한 새로운 샤넬 슈트가 미국에서 대대적으로 성공을 거두며 다시 재기를 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는데 연이어 길이를 조절할 수 있는 체인이 달린 핸드백과 퀼팅백에 체인을 달아 만든 가방 등을 출시해 다시 한번 재도약하게 되었습니다.
1971년에 거주하던 릿츠호텔에서 컬렉션을 준비하던 샤넬은 갑자기 가슴이 답답하다며 문을 열라고 가정부에게 말하고 침대에 누웠는데 그렇게 그녀는 갑작스레 사망하게 됩니다.
그녀의 유해는 나치 독일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프랑스 땅에 묻히는 걸 정부에서 허가해주지 않았고 결국 망명지였던 스위스 로잔에 묻혔습니다.
샤넬은 현재 여성의류, 핸드백, 향수, 화장품, 수영복, 시계 등 많은 부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으며 전 세계 200개가 넘는 매장을 운영 중이고 한국에서도 수많은 매장을 운영 중인 명품 브랜드입니다.
현재까지도 명품의 최고봉의 위치에 있는 샤넬의 창시자인 코코 샤넬은 어릴 적에는 불우한 삶을 살았지만 독립성과 과감함으로 기존 여성복 질서를 송두리째 바꿔버렸습니다.
비록 여러 가지의 일들로 그녀를 비판하는 여론은 많지만 '패션은 사라지지만 스타일은 남는다'라는 명언을 만들어낸 그녀의 말대로 '샤넬 스타일'은 앞으로도 영원히 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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