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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탐구

마고 여왕. 가톨릭vs개신교 분쟁의 희생양이 된 피의 결혼식 사건

by 사탐과탐 2021.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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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후반 프랑스는 가톨릭과 개신교 간 종교 분쟁으로 나라가 엉망이었습니다.
가톨릭 세력의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마고)'와 개신교 세력의 '앙리 드 나바라'는 성대한 결혼식을 가지게 되지만 대학살이 벌여지는 피의 결혼식이 되고 마는데요..

 

 

1572년 8월 23일과 24일. '성 바르톨로메오 데이'의 기간 동안 5천여 명의 개신교 신자들이 무차별 학살 당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날 결혼식 축하 파티를 즐기고 있던 새 신부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의 하얀 드레스는 핏빛으로 물들었고 훗날 사람들은 그날의 결혼식을 '피의 결혼식'이라 불렀죠.

마르그리트의 결혼식이 있었기 때문에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대학살 사건'도 발생한 것인데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야 할 날이 대학살의 날이 되어버린 것일까요?

 

(영화 여왕 마고 -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1553년 5월 14일. 프랑스의 생제르맹 앙 레 궁전에서는 어여쁜 공주님이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 였죠.

막내딸로 태어난 만큼 모두의 사랑을 받으며 태어난 마르그리트는 어릴 때부터 굉장히 예쁘고 총명해서 오빠들이 '마고' 라는 애칭을 만들어줄 만큼 그녀를 아꼈습니다.

 

그런데 당시 프랑스의 사정은 매우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었는데요 가톨릭을 믿는 발루아 왕조와 개신교를 국교로 하는 나바르 왕조로 나누어져 피 튀기는 전쟁과 수많은 분쟁이 끊이질 않았던 것이죠.

이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마르그리트는 모두의 사랑을 받으며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가톨릭 세력의 중심이던 기즈 가문의 기즈 공작은 마르그리트에게 적극적인 구애를 했죠.

마르그리트 역시 기즈 공이 싫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톨릭 군대를 지휘하는 멋진 모습의 기즈 공작을 너무나 사랑하고 있었죠.

그런데 그 운명의 수레바퀴는 그 둘을 이어주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치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기즈 가문을 싫어하고 있었고 오빠인 샤를 9세 역시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기즈 가문을 못마땅해 하고 있었기 때문에 카트린과 샤를9세는 기즈 공작을 압박해 다른 여자와의 결혼을 명령해버렸죠.

 

그리고 마르그리트는 정략에 의해 나바라 왕국의 후계자인 앙리 드 나바라와 결혼을 추진했습니다.

이 결혼으로 인해 오랜 가톨릭과 개신교의 길고 긴 전쟁을 끝냈으면 하는 마음이 크기도 했고 발루아 왕국의 왕인 샤를 9세의 건강이 좋지 않았고 후계자도 없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계산도 들어있었죠.

 

하지만 마르그리트는 여전히 기즈 공작이 좋았습니다.

얼굴도 기즈 공작보다 못생겼고 종교도 개신교였던 앙리 나바라와의 결혼도 하기 싫었죠.

그러나 오빠와 어머니의 강압에 못 이겨 결국 결혼을 받아들였습니다.

앙리 나바라의 어머니이던 호아나 3세 또한 가톨릭 신자였던 마르그리트를 며느리로 삼는 것이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발루아 왕조의 공주와의 결혼은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더 많을 것이라 생각했고 결혼을 승낙하게 되었죠.

 

그러던 1572년 결혼 준비를 위해 발루아 왕국으로 온 호아나 3세는 결혼식을 하기 전에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종교 문제였는데요.

호아나 3세는 아들과 마르그리트의 결혼 후에 어떤 종교를 믿을 것인지 확실히 하고 싶었던 것이죠.

그런데 이 문제가 정해지기도 전에 1572년 6월 8일. 호아나 3세는 지병인 폐결핵으로 인해 급작스레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앙리 나바르는 어머니는 살해당한 것으로 생각했지만 물증이 없었죠.

 

시간이 흘러 결혼식 날인 8월 18일이 되자 그는 800명의 기사를 수행원으로 삼아 검은색 상복을 입고 파리로 들어섰습니다.

개신교 세력의 수장이던 콜리니 또한 결혼식 참석을 위해 파리로 왔죠.

그리고 그는 자신은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며 결혼식이 거행되는 노트르담 대성당 안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성당 정문에서 혼인서약을 했을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가톨릭 신자들에겐 유쾌한 모습은 아니었죠.

 

(영화 여왕 마고 -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한편 앙리 나바르를 굉장히 못마땅해 하던 마르그리트도 어머니와 오빠의 강요에 못 이겨 결혼식에 참석하게 되었고 시종일관 불성실하고 비협조적인 태도로 결혼식을 하고 있었죠.

나중에는 "앙리 드 나바르를 남편으로 맞겠는가"라는 추기경의 물음에 꼿꼿이 선채로 대답도, 목례도 하지 않는 그녀를 보다 못한 샤를9세가 억지로 머리를 눌러 고개를 숙이게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1572년 8월 18일. 그 둘은 부부가 되었죠.

야사에 따르면 첫날밤을 보내야 하는 그날 밤, 어째선지 그 둘은 같은 방안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남편방에 들어가지 않고 사랑해 마지않던 기즈 공작과 함께 은밀한 밀회를 가졌죠.

그리고 다음날엔 자신의 신분을 가리기 위한 검정 마스크를 쓴 채 파리의 거리로 나왔습니다.

하룻밤을 보낼 남자를 찾던 중 라몰이라는 남자와 눈이 맞았고 그와도 격정적인 밤을 보내게 되었다고 하죠.

 

(영화 여왕 마고 -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아무튼 그렇게 그녀의 내면에 감춰져있던 음탕한 마음이 용솟음치게 되었습니다.

며칠 후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채 말이죠.

결혼식이 끝난 후 6일간의 결혼 축하파티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는 드디어 지긋지긋한 전쟁도 끝이고 화합과 평화의 세상이 될 것만 같았죠.

 

그러나 강경 가톨릭 세력의 중심이던 기즈 공작은 이번 기회에 개신교 놈들을 싹 쓸어버릴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8월 24일, '성 바르톨로메오 데이'가 되자 샤를 9세의 명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기즈 공작은 자신의 병력을 동원해 개신교 세력의 수장이던 콜리니를 살해했고 개신교의 지도자들을 모조리 숙청해버렸죠.

그러자 가톨릭을 믿는 파리 시민들까지 가세해 무차별 학살을 시작했는데 개신교 신자인 여성들은 가톨릭 신자들에게 강간당한 후 잔인하게 살해당했고 개신교 신자의 어린 자식들 또한 예외는 아니었죠.

 

그날 밤 살해된 개신교 신자는 5천여 명에 달했고 날이 밝아오자 온 도시는 시체와 피투성이의 도시가 되어있었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이 학살에 대해 보고를 받은 뒤 하나님을 찬양했다며 바티칸에서는 이 일을 축하하는 축포를 터트렸고 이 대학살에 대한 그림을 그리도록 했죠.

또한 학살의 날을 축하하며 '하느님께 찬미'란 뜻의 성가인 '떼 데움(Te Deum)'을 불렀으며 특별 감사 미사를 집전하고 이 대학살의 날을 축제일로 정했으며 이날을 기념하는 기념주화를 제작하기까지 했습니다.

 

(영화 여왕 마고 -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아무튼 이 학살로 인해 앙리 나바르와 마르그리트의 결혼식은 '피의 결혼식' 이라고 불리게 되었죠.

그리고 이날 샤를 9세의 앞에 잡혀온 앙리 나바르는 아내인 마르그리트의 간청으로 간신히 살아남긴 했는데 개신교를 포기하라는 요구에 사촌동생인 앙리 드 콩데와 함께 강제로 가톨릭으로 개종해 미사에도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나마 앙리 나바르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던 샤를 9세가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다음 왕으로 앙리 3세가 즉위하자 그와 사이가 좋지 않던 마르그리트는 남편을 탈출시켜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죠.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잡혀있었던 앙리 나바라는 1576년 2월, 사냥을 간다고 하고 밖으로 나갔는데 가신인 도비녜와 아내 마르그리트의 애인인 라몰의 도움을 받아 천신만고 끝에 파리를 탈출했습니다.

 

하지만 마르그리트는 파리에 남아 있었는데요.

남편이 있는 나바라 왕국으로 가려고 했지만 앙리 3세와 어머니 카트린의 반대로 가지 못한 채 또 4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게 되었죠.

그러다 앙리 3세 이후로는 발루아 왕조에는 후계자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마르그리트는 발루아와 나바라의 후계자를 낳아야 한다는 사명하에 1578년 나바라 왕국으로 떠나게 되었죠.

 

오랜만에 남편과의 재회 후 후계자를 낳기 위한 4년 동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식이 생기지 않자 자포자기한 둘은 수많은 애인을 만들며 프리한 성생활을 즐기게 되었는데 그로 인해 부부 사이는 점점 멀어졌고 결혼식 때처럼 서로 못마땅해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다 그녀는 남편과 오빠 간의 사이를 다시 좋은 관계로 만들겠다는 명분으로 다시 파리로 돌아오게 되었죠.

돌아온 이후 '자크 드 아를레' 를 비롯한 여러 귀족 남자들과의 화려한 간통 생활이 시작되었는데요.

보다 못한 앙리3세는 마르그리트를 궁정에서 추방했고 그녀는 옛 애인이던 기즈 공작에게 몸을 의탁하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앙리 3세에게 붙잡혀 오베르뉴의 위송에 감금되기까지 했죠.

 

그러다 기즈 공작이 앙리3세에 의해 목숨을 잃고 앙리 3세 또한 암살당하자 남편이던 앙리 드 나바라가 앙리 4세로 프랑스의 왕으로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된 앙리 4세는 마르그리트에게 자식을 못 낳고 여러 남자와 바람을 피웠다는 이유로 이혼을 요구했고 1599년 둘의 결혼은 무효가 되었죠.

그렇게 이혼당한 뒤 파리로 돌아온 마르그리트는 이혼하며 받은 연금으로 호화스러운 생활을 계속 이어 나갈 수 있었고 이제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여러 남자들과 애정행각을 벌였죠.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

 

그렇게 모든 면에서 풍족한 삶을 영위하다 1615년 5월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죽고 난 13년 후, 마르그리트의 자서전이 출간되었는데 두 오빠 샤를 9세와 앙리3세와의 근친상간을 참회하는 내용이 담겨 당시 유럽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하죠.

여담으로 훗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97년 8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에 가톨릭교회가 개입됐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가톨릭은 이 사건에 대해 사과했다고 합니다.

 

권력에 휩쓸린 공주로써 피의 결혼식을 보내고 이혼까지 당했지만 호화로운 생활과 핫한 성생활까지 영위하며 불행하지만 행복한 삶을 살았던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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