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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소기파. 삼포왜란 당시 전투중에 술을 마시고 안주로 왜군의 쓸개를 먹었던 엽기적인 무장

by 사탐과탐 2022.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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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포왜란 당시 왜군과의 전투중에 술을 마시고 안주로 왜군의 쓸개를 먹었던 엽기적인 무장 소기파 장군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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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화약무기를 먼거리에서 날려대는 현대전에 비해서 칼과 창을 직접 맞대던 예전의 전투에서는 아군의 사기를 높이고 적군을 위축되게 만드는것이 지금보다 더 중요한 요소중의 하나였다고 하죠

때문에 부대를 이끄는 장수들은 상대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썼는데 그중에서도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소기파는 마치 호러영화에서나 나올만한 엽기적인 행동을 했다고 하는데요

 

대체 어떤 행동을 했길래 실록에까지 이름을 남기게 된것인지 지금부터 알아보겠습니다

 

1510년에 부산포와 염포,제포등 삼포에서 일본인들이 대규모 폭동을 일으킨 삼포왜란 사건이 발생했는데요

삼포란 조선 세종시절 일본인들의 출입과 거주가 허락된 세 포구를 말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삼포왜란하면 그 시절 흔히 있었던 왜구들의 침입정도로만 생각하시는 경우가 많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좀더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고 하죠

고려말부터 이어진 왜구들의 침입은 조선 건국 이후에도 계속 됐고 이런 왜구들의 노략질은 조선과 명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에도 큰 골칫거리였다고 합니다

 

해적이나 다름없었던 왜구들의 노략질은 일본 본토라고 해서 피해가는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때문에 일본의 몇몇 다이묘들은 아예 돈으로 그들을 매수해서 자신의 영토에 있는 백성들의 피해도 줄이고 자신이 거느린 병사수도 늘리는 방법을 택하기도 했는데요

조선에서는 이에 대한 대책으로 1419년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태종이 이종무에게 대마도를 정벌할 것을 명했다고 합니다

 

대마도를 아예 정벌해버리면서 왜구들에게 경고를 보내는 동시에 3포를 개항하고 왜관을 두면서 일본인들의 무역활동을 비롯한 각종 상업활동을 장려하는 정책 또한 펼쳤기 때문에 왜구들의 수는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고 하죠

하지만 오랜 시간동안 자신들을 괴롭혔던 왜구에 대한 조선백성들의 증오심은 생각보다 컸기 때문에 그때까지도 조선의 백성들이 바라보는 일본인은 자신들을 약탈했던 '해적 집단'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당시 조선에 온 일본인들중 밀수를 하기위해 들어왔던 범죄자들이 과격한 행동을 하면서 민폐를 끼치고 다니자 그들에 대한 반감이 더 심해졌죠

때문에 삼포를 개항하면서 조선의 영토내에 일본인들이 사는 거주구역을 둔 것은 가뜩이나 서로간에 갈등이 심하던 상황에 아예 불을 붙여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는데요

 

초창기에는 일본인들의 수를 약 60명 정도로 제한했지만 점점 교역량이 늘어나면서 왜관의 일본인 수는 급격히 늘어났고 조선 조정에서 이들에게 면세등의 다양한 혜택까지 주면서 세종 말년에는 무려 2000명이나 되는 일본인이 있었다고 하죠

그와중에 일부의 일본인들은 마치 지금의 중국 어선들처럼 정해진 구역을 벗어나 남의 구역을 침범해서 물고기를 잡거나 다른 무역선들을 약탈하는 해적질까지 하면서 민폐를 끼쳤기 때문에 중종반정이 일어난후 조선 조정에서는 이들 왜관에게 내렸던 혜택들을 하나씩 줄여버렸습니다

 

게다가 국가에서 이전과 달리 일본인들에 대한 혜택을 줄이는 것을 보고 일본인들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던 조선의 백성들 또한 그들을 대놓고 멸시하고 차별하기 시작했죠

부산포 첨사였던 이우증은 지나가던 일본인을 붙잡아 그의 머리카락에 노끈을 묶은후 천장에 매달고 노끈을 활로 맞춰 그를 떨어뜨리면서 공포에 떠는 일본인을 보고 즐거워하는 놀이를 즐겼다고 하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의 주위의 있던 조선 군인들도 그를 말릴 생각은 않고 오히려 이우증의 활솜씨를 칭찬하며 같이 즐겼다고 하죠

이 사실을 알게된 일본인들의 분노가 폭발하게 되고 마침 대마도주가 이들을 지원해 주겠다는 약속까지 하면서 삼포에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1510년 4월 4일 약 5000명 정도의 일본인들이 사방에 불을 지르면서 난동을 피우기 시작했죠

이후 부산포와 제포 등이 함락당하고 부산포 첨사 이우증 등이 살해당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270명가량의 조선병사와 민간인들이 죽어나갔고 800채 정도의 집이 파괴되는등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고 하죠

 

며칠 후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상황이 훨씬 심각해졌다는 것을 알게된 대마도주는 조선 조정에 사신을 보내 이 사태를 어떻게든 무마해보려 했지만 조선 조정은 단호하게 군사들을 보내며 이들을 토벌하라는 지시를 내렸는데요

이때 일본인들을 상대로 가장 악명을 떨친 사람이 바로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소기파였죠

 

1490년 이전에 무관으로 출사한 소기파는 1494년 북방의 변경지역을 정벌하는 부대에 참가해서 1500년에는 조선땅을 침범한 여진족들을 정벌하는데 공을 세우면서 1508년 부령부사로 승진을 하게 됩니다

부령부사가 된 그는 백성들에게 관대한 모습을 보이면서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고 1509년에 백성들을 잘 다스린 공로를 인정받아 왕인 중종으로부터 포상을 받게 되죠

 

그런데 이때 백성들이 왕의 교지를 전하러 온 이장곤이라는 인물을 보고서는 새 부령부사가 부임하는 줄 알고 이장곤에게 달려와서 소부사님이 더 계시게 해달라며 간곡히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이장곤은 이러한 사실까지 모두 중종에게 보고했고 소기파를 기특하게 여긴 중종은 특별히 그의 품계를 한등급 더 올려주었다고 하네요

 

중종실록을 보면 당시 중종이 소기파를 두고 "기파는 무인으로서 성격이 청렴 결백하여 재물을 모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며 적을 만나면 용맹스럽기가 누구에게도 비할수없다"라며 그를 높게 평가한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중종의 말처럼 그는 재물이나 승진에 큰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전투에만 전념하며 묵묵히 임무를 수행하던 장수였다고 하죠

 

그는 다음해 웅천의 현감으로 부임했는데 그곳에서도 백성들에게 잘 대해주며 어진 관리로 널리 이름을 알렸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에 삼포에 있던 일본인들이 난을 일으키자 자신의 조카인 소세온과 소세공을 데리고 왜적들을 진압하러 달려갔는데 그당시 소기파의 나이가 이미 50대 초중반 정도였음에도 전장에서 뛰어난 활솜씨와 무예실력을 보이며 왜적들의 사기를 크게 꺾었다고 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실록을 살펴보면 안골포가 일본인들에게 포위되어 함락될 위기에 몰려있었는데 소기파가 병사 두세명만을 데리고 접근해서 뛰어난 활솜씨로 적의 포위를 풀어버린 후 돌격해서 그들을 모두 쫓아내 버렸다는 놀라운 기록이 있습니다

 

그의 뛰어난 무예만으로도 충분히 일본인들의 기를 죽이기에 충분했지만 무엇보다도 소기파가 일본인들로부터 공포의 대상이 된이유는 바로 그가 전투중에 죽은 일본인들의 시체 사이를 뒤지고 다니면서 아직 살아있는 사람이 있으면 칼로 그들의 배를 갈라서 흘러나온 피를 자신의 얼굴과 손에 바르고 술을 마시면서 그 사람의 쓸개를 손으로 꺼낸 후 안주삼아 씹어먹는 엽기적인 행동을 했기때문이라고 하죠

 

이 충격적인 장면은 상대인 일본인들뿐만 아니라 같은 조선인들마저 기겁을 하게 만들었고 이후부터 그는 아군과 적군 모두에게 마치 전투에 미친 괴물과 같은 이미지로 남았다고 하네요

그렇게 소기파는 사람들 사이에서 야차라는 별명을 얻었고 그의 성씨인 소를 붙여 '소야차'라 불렸다고 합니다

이 일화를 들으면 마치 이야기꾼들에게서나 퍼지는 야사처럼 들리겠지만 놀랍게도 이 이야기는 실록에도 기록돼있다고 하죠

 

바로 중종실록의 중종 5년 4월 22일자에 나와있다고 합니다

이런 소기파의 엽기적인 행동은 조정에도 보고되었지만 삼포왜란 당시 그가 세운 공이 워낙 컸기 때문에 일등군공에 해당하는 공적을 인정받으며 이후 전라도 수군절도사를 거쳐 병마절도사까지 역임하게 되죠

 

당시 워낙 일본인들에 대한 혐오가 극에 달해있기도 했었고 전쟁터에서 서로 죽이던 적들을 상대로 한 행동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소기파의 행동이 적들의 사기를 꺾기 위해서 벌였던 조금 과격한 퍼포먼스 정도였다고 판단한것 같습니다

그렇게 삼포왜란이 끝난 이후 분노한 조선 조정에서 왜관을 폐쇄해버리자 그때까지 교역을 통해 들어오던 수입이 끊기며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대마도주는 폭동을 주도한 주모자의 머리를 잘라 조선에 바치면서 애초부터 자신들은 조선과 싸울 생각이 없었다며 애원했다고 하죠

 

이후 대마도주의 요청을 받은 무로마치 막부에서도 조선에 다시 교역을 허락해달라며 간청한끝에 1512년 '임신약조'를 맺고 다시 교역을 재개해주게 됩니다

하지만 이 '임신약조'에서 조선은 예전에 비해서 훨씬 적은 교역량만을 허가했기 때문에 여기에 불만을 품은 대마도주와 왜구들은 또다시 사량진 왜변을 일으켰다고 하네요

 

지금까지 소기파 장군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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