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역사 탐구

효명세자. 22세의 어린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조선의 희망이던 세자

by 사탐과탐 2022. 5. 30.
반응형
망해가던 조선의 희망이던 효명세자는 22세의 어린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마는데요
그런 효명세자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클릭하시면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왕조들은 국왕이 나라를 다스리다가 그 왕이 사망하거나 더이상 나라를 다스리기 힘든 상황이 오면 그의 후계자가 왕위에 올라 국정을 돌보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왕이 아닌 왕세자가 왕명을 받고 왕대신 나랏일을 돌보는 대리청정을 하기도 했는데요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효명세자 또한 대리청정을 하던 시기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면서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받았지만 안타깝게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죠

 

효명세자의 본명은 '이영'으로 1809년 순조와 순원왕후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국왕과 왕비 사이에서 낳은 장남이라는 뜻의 '원자'가 탄생한것은 명성왕후가 숙종을 낳은 이후 150년만의 일이었기 때문에 창덕궁 인정전에서 모든 신하들이 모여 원자의 탄생을 축하했다고 하죠

 

순조 또한 크게 기뻐하며 백성들이 내야 할 세금을 줄여줬다고 합니다

효명세자는 1812년 왕세자에 정식 책봉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가 불과 만으로 3살이었다고 하네요

효명세자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잘생긴 외모를 가졌을뿐만 아니라 어린시절부터 남달리 뛰어난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에 부왕인 순조 또한 비록 자신은 안동 김씨들에게 눌려지냈지만 자신의 아들은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라며 많은 기대를 했다고 하죠

 

그는 1817년 성균관에 입학했으며 1819년에는 풍양 조씨가문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들였는데 이 세자빈이 훗날 고종대에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했던 신정왕후 조씨라고 합니다

1827년 순조는 평소 자신의 몸이 좋지 않을때가 많아 치료를 받느라 나랏일을 제대로 볼수없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제 세자가 장성했고 평소 총명하고 영리한 모습을 보였으니 자신을 대신해서 나라를 다스리라며 대리청정을 지시하게 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조선시대에는 왕세자가 왕명을 받들어 공식적으로 정치에 참여한 경우가 여러 차례 있었는데 보통 왕이 병들어 나랏일을 돌볼수 없거나 나이가 많이 들어 오랜시간 힘든 업무를 하기가 힘든 경우 또는 나라에 큰 위기가 닥쳐서 세자에게 자신의 일을 대신 시킬 때에 행해졌는데요

순조가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자 신하들이 크게 기뻐하며 환영했을 정도로 당시 효명세자는 많은 사람들에게 기대를 받고 있었다고 합니다

 

평소 조선역사에 대해 관심있게 보시던 분들은 이 대목에서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실수도 있는것이 과거에는 왕이 세자에게 대리청정의 명을 내리면 신하들이 벌떼같이 들고일어나서 반대하는 경우가 많았죠

세종이 문종에게 대리청정을 명했을때도 어김없이 신하들이 반대하며 명을 거둬달라고 했는데 세종이 "요즘 몸이 너무 아픈데 이렇게 계속 일하다보면 니들 왕 과로사하게 생겼다!"라고 신하들에게 큰소리를 치고나서야 간신히 받아들여졌다고 합니다

 

숙종시절에는 왕이 세자인 경종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 당시 경종을 폐세자하고 싶어했던 노론에서는 세자를 쫓아낼수 있는 트집이 생겼다며 좋아했지만 소론에서는 윤지완 등의 인물이 청을 들어주지 않으려면 차라리 도끼로 자신의 목을 쳐달라는 도끼상소까지 올리며 대리청정을 반대하는등 분위기가 매우 험악했었다고 하죠

 

영조대에도 세손이었던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려하자 세손의 반대파였던 홍인한과 정후겸등의 대신들이 모조리 들고일어나 결사반대하는 등 왕이 대리청정을 선언하면 신하들의 반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순조가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할때는 남공철과 김재찬, 한용귀등 당시의 중신들이 하나같이 두 팔을 벌려 세자의 대리청정을 환영했고 순조가 직접 내린 명령서가 담겨있는 비망기를 보고는 "신들은 전하의 현명한 결단에 기뻐서 발을 구르고 춤추면서 앙달(우러러보고 아뢰다)하는 마음을 금할길이 없사옵니다"라며 숙종의 결단을 찬양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남아있다고 하네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유일하게 효명세자만이 예전 조상들의 사례를 본받아 예의상 몇 차례 거절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랏일을 맡기는 대리청정이나 왕위를 넘겨주는 양위등의 민감한 사안은 자칫하면 후계자가 왕에게 불충하다는 시선을 받을수도 있으며 심하면 역모죄로까지 이어질수도 있기 때문에 지시가 내려온다고 해서 덥석 받아들여서는 큰일이 날수 있었죠

 

아무리 왕과 세자 그리고 신하들간에 어느 정도 합의가 되어있다고 해도 자신이 권력에 큰 욕심이 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는 최소 한두번은 거절하는 것이 당시의 미덕이자 의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몇몇 왕의 경우는 대리청정이나 양위를 통해 신하들 또는 세자를 향한 충성심 테스트를 하거나 그들의 기강을 바로잡으려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네요

 

하지만 순조는 대리청정으로 이런 장난질을 하려는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효명세자에게 나랏일을 맡기고 싶어했기 때문에 빠르게 대리청정이 시행되었다고 합니다

순조는 당시 조선의 조정이 세도정치를 거치며 안동 김씨에게 권력이 집중돼있던 상황속에서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김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려 했죠

 

이에 효명세자 또한 그 뜻을 받들어 세자빈의 친정인 풍양 조씨와 다른 당파의 인물들을 중용했으며 이인좌의 난 이후 축출된 소론 계열 인물들까지 등용했습니다

그는 20살도 안 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단호한 일처리로 뛰어난 판단력을 보여주며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시작했죠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맡기 전 순조가 나라를 다스리던 시절에는 순조의 몸이 자주 아파서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면서 관료들의 기강이 상당히 해이해져 있었다고 하는데요

관리들을 감시하고 부정부패를 감독해야 할 왕이 자신의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선의 여러 곳들이 썩어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한 이후 실록의 기록을 살펴보면 관리들의 파직, 탄핵, 유배, 해임등의 처벌과 관직을 내리고 상을 줬다는등의 기사가 쏟아진다고 하죠

효명세자는 어느 고을의 수령이 백성들을 착취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으면 어김없이 그 관리에게 엄한 벌을 내렸고 심지어 정승같은 고위관직도 자신이 직접 임명하며 인사 문제도 다루는 등 단순한 왕의 대리가 아닌 실질적인 군주의 역할을 도맡아 진행했다고 합니다

 

이때 효명세자에게 기용된 인재중 대표적 인물이 바로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이자 개화파의 시조로 불리는 박규수라고 하죠

부왕인 순조 또한 효명세자가 생각이상으로 맡은 일을 잘 해내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권한을 침범한다고 불쾌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적극적으로 세자를 지원하면서 힘을 실어줬다고 하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애초에 순조가 대리청정을 명했던것도 딱히 정치적인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정말로 몸이 안 좋아서 아들을 믿고 맡긴 것이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가뜩이나 몸도 안좋은데다 안동김씨들이 설치는탓에 제대로 국정을 돌보지 못했던 순조로서는 세자의 활약상을 보며 춤이라도 추고싶은 심정이었을 겁니다

 

이렇게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이 점점 늘어났지만 효명세자는 겸손한 태도를 잃지 않으며 아버지 순조의 권위를 높이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순조의 생일을 축하하는 탄신진연등의 주요 연회들을 성대하게 개최하며 조선왕실의 권위를 드높이는데 힘썼죠

그 와중에 효명세자는 연회에서 쓰이는 '정재'라는 궁중 무용의 내용 중 대부분을 수정하는데 직접 참여하는 등 예술에도 재능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때문에 현시대의 일부 역사가들은 효명세자를 두고 직접 발레 공연에까지 참견할만큼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와 비교하며 '조선의 태양왕'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다고 하네요

지난 역사를 살펴보면 권력이라는것의 특성상 부모자식이나 형제사이라도 치열하고 냉정한 다툼을 벌이는 경우가 많지만 순조와 효명세자는 대리청정 시기에도 서로간에 충돌하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부자간에 사이좋은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주면서 권력다툼에 지쳤던 조정의 관료들도 활기를 찾는듯했죠

 

하지만 계속해서 밝은 햇살만이 비칠것 같았던 조선의 하늘에 예상치 못했던 먹구름이 잔뜩 끼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성군이 될 자질을 뽐내며 대리청정을 잘 해내고 있던 효명세자가 갑자기 병에 걸리면서 22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만 것인데요

 

일부 학자들은 안동김씨가 효명세자를 독살한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지만 그 의견을 뒷받침할만한 증거가 전혀 없을뿐만 아니라 세자가 사망한 당시 원인을 조사하라는 상소가 올라오자 순조가 자식의 죽음으로 슬픈 마당에 그런데 신경쓸 겨를이 없다며 거절한 탓에 아직까지도 효명세자의 죽음의 원인에 대해서는 밝혀진것이 없다고 하죠

 

어쩌면 조선의 운명을 크게 바꿀지도 몰랐던 효명세자의 이야기였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