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녕대군이 형인 양녕대군을 제치고 왕이 될수 있었던 이유와 충녕대군이 조용히 왕이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라는 추측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라 칭송받는 세종대왕 누구나 한번쯤은 세종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보니 그가 처음부터 세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신 분들이 많을텐데요
실제로 부왕인 태종 또한 장남인 양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된 후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그를 세자 자리에 앉혀둔 것만 봐도 한때는 양녕대군을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했다는걸 알수있죠
그렇다면 14년이라는 세월동안 세자였던 양녕대군을 제치고 충녕대군이 왕이 될수 있었던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요?
세종 이도는 1397년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의 6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위로는 원래 다섯 명의 형이 있었지만 맨 처음 낳았던 3명의 아들이 모두 어린 시절 죽었기 때문에 사실상 양녕대군이 장남이고 효령대군이 둘째, 충녕이 삼남으로 자랐죠
충녕대군은 어릴적부터 한번 잡은 책은 책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읽는 독서광이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의 왕자는 과거 시험을 봐서 벼슬길에 오를 수 없었기 때문에 충녕의 뛰어난 재주를 아깝게 여겼던 태종은 아들의 취미 생활을 전적으로 지원해줬다고 하는데요
덕분에 충녕은 학문뿐만 아니라 미술, 음악까지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며 여러 방면으로 재능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세종이 대군시절에는 왕위에 대한 욕심없이 그저 공부만 열심히 하다가 태종의 눈에 들어 왕이 됐다고 알려지기도 했지만 최근 들어서는 충녕 또한 자신에게 왕위가 올 가능성을 생각하고 행동했다는 의견이 많죠
먼저 세자였던 양녕대군이 계속되는 기행과 방탕한 생활을 하며 그에 대한 태종의 실망이 점점 커지던 타이밍에 충녕대군이 본격적으로 공식적인 자리에서 자신의 총명함을 드러냈다는 점입니다
충녕이 총명한 모습을 보일때마다 태종은 어김없이 그를 칭찬했고 신하들마저 충녕의 영특함을 칭찬하는 분위기가 계속되자 세자였던 양녕대군으로서는 매우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겠죠
그외에도 양녕대군은 태종에게 혼날때마다 공손하지 못한 말투와 행동을 보이며 말대꾸를 했는데 이때마다 충녕대군이 그를 타일렀다고 합니다
하루는 양녕대군이 옷을 차려입고 몸단장을 한 뒤 자신의 모습이 어떠한지 아랫사람에게 묻자 그 말을 들은 충녕대군은 "먼저 마음을 올바르게 하는게 우선이고 용모는 그뒤에나 신경쓰시기 바랍니다"라며 태클을 걸었는데요
같이 있던 신하들도 모두 충녕대군의 말이 옳다고 간접적으로 양녕대군을 비난하며 세자의 속을 뒤집어놓았습니다
1달이 지나도록 그 일을 마음에 두고 있던 양녕은 태종에게 "충녕은 항상 말만 번지르르할 뿐 속은 심약한 놈이 틀림없사옵니다"라고 헐뜯었지만 태종은 오히려 "충녕 그 아이가 겉으로는 유약해 보여도 총명함과 결단력에 있어서는 누구도 당할 자가 없다!"라고 오히려 충녕을 옹호했죠
사실 자기 자신만 모르고 있을뿐 양녕이 그때까지 했던 짓을 보면 누구라도 충녕의 조언이 옳고 양녕이 잘못한 일이라는 것을 알수있습니다
양녕과 충녕의 인간성이 어떠했는지 잘 보여주는 일화가 바로 태종이 40세 가까운 나이에 낳은 늦둥이 아들 성녕대군에 관한 이야기죠
태종과 원경왕후는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을 워낙에 예뻐해서 성녕대군이 8살의 나이로 결혼을 했음에도 궁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두 부부가 온갖 애정을 쏟아부으며 지극정성으로 길렀다고 합니다
때문에 1418년 1월 성녕대군이 홍역에 걸려 위독해지자 태종은 나랏일을 며칠이나 돌보지 않으며 옷을 벗은채 편히 잠자리에 들지 않았고 밥도 제대로 먹지못할 정도로 걱정하며 흥덕사에 기도를 올렸죠
평소 자신의 형제들을 잘 챙기던 충녕은 궁중의 의원들과 함께 의서를 보며 친히 동생을 위한 약을 제조했기 때문에 그모습을 본 태종부부도 크게 감격했다고 하네요
하지만 양녕대군은 신경도 쓰지 않은채 그저 활쏘기나 하면서 놀러다니기 바빴다고 합니다
결국 성녕대군이 12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훗날 기생 어리의 일로 태종이 양녕을 꾸짖을 때 "성녕이 죽었을 때 너는 궁중에서 활쏘기 놀이나 하고 있었다고 들었다
친동생이 죽어서 부모가 애통해하고 있는 때에 그따위 짓이나 하고 있었다니 그러고도 니가 사람이라 할수있겠느냐?"라고 호통을 쳤다고 하죠
충녕은 양녕이 잘못된 행동을 할때마다 대놓고 그의 잘못을 지적하는 일이 여러번 있었는데 하루는 상왕인 정종이 베푼 연회가 끝난후 양녕이 자신의 매형 이백강의 첩인 칠점생을 데리고 가려하자 충녕은 이런 양녕의 행동이 올바르지 못하다며 지적했고 양녕은 결국 칠점생을 데려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또한 양녕이 할머니 신의왕후의 기일에 흥덕사에 가서 향을 피운 후 아랫사람들과 어울려서 바둑을 두며 놀자 충녕이 "장차 왕이 되실 세자께서 간사한 소인배와 놀이나 하고 있는것도 옳지 못한 일이며 더군다나 오늘은 신의왕후의 기일인데 어찌 이러실수가 있습니까"라며 고하자 양녕도 매우 불쾌해하며 "너는 관음전에 가서 잠이나 자거라"라고 맏받아쳤죠
뿐만 아니라 양녕은 종2품 대신 곽선의 첩인 어리라는 여인이 엄청난 미인이라는 소문이 한양에 퍼지자 일국의 세자라는 지위를 이용해 그녀를 반강제로 납치해왔는데요
어리를 매우 마음에 들어했던 양녕은 그녀를 여러차례 궁에 몰래 들였고 이 일이 들통나며 태종에게 혼이 나는 일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양녕은 반성하기는커녕 충녕이 태종에게 어리에 대한 얘기를 한것이 틀림없다며 그를 원망하기 바빴죠
태종에게 혼쭐이 난 양녕은 크게 화를 내며 충녕을 찾아나섰고 마침 대자암에서 성녕대군을 위해 불공을 드리고 오던 충녕과 마주치게 됩니다
양녕은 길길이 날뛰며 "어리의 일을 반드시 네가 전하께 아뢰었을 것이다" 라고 소리쳤지만 충녕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고 하죠
충녕이 왕위에 욕심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일화가 있습니다
바로 충녕이 자신의 집에서 1차 왕자의 난 당시에 살해된 남은의 형이자 태종이 즉위하는 데 큰 공을 세운 남재에게 연회를 베풀었을 때의 일인데요
연회 도중 남재가 갑자기 충녕대군에게 "지금의 주상(태종)께서 즉위하시기 전에 제가 그분께 학문을 권했더니 왕위도 못 잇는데 학문은 해서 뭐합니까?라고 하셔서 임금의 아들이라면 언젠가 왕위에 오를수도 있지 않겠습니까?라는 말씀을 드린적이 있었습니다
대군께서 학문을 좋아하시니 기쁩니다"라는 말을 했죠
그자리에는 남재와 충녕대군 두 사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연회에 참석해 있었던 상황이었지만 충녕대군은 그 말을 듣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보통의 경우 그런말을 한 사람을 꾸짖고 심한 경우에는 그가 역심을 품고 있다고 고발하는 등 확실히 선을 그어야 했지만 충녕대군은 그저 그 일을 태종에게 보고하는 것으로 끝냈고 태종또한 "그 늙은이 과감하구나!"라고 웃어넘겼다고 합니다
사실 충녕대군에게 왕위에 대한 욕심이 전혀 없어서 그자리에서 남재를 크게 꾸짖고 부왕에게 달려가 그에게 역심이 있음을 고발했다면 남재는 의금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 목이 날아가거나 유배를 갔을수도 있을만큼 위험한 발언을 한것이었죠
이상의 일화들을 살펴볼 때 충녕대군은 분명히 왕위에 욕심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계속해서 큰 사고를 치는 바람에 양녕대군은 결국 1418년에 폐세자가 되었고 그를 대신해서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었죠
충녕대군은 훗날 태종으로부터 양위를 받아 세종이 되었습니다
양녕대군은 태종이 상왕이 된 후에도 계속 사고를 쳐서 참다못한 상왕 태종이 그를 가두다시피하고 철저히 감시하라는 명령을 내렸죠
훗날 태종은 마지막 순간에 양녕대군이 후환이 될 것 같으면 죽여도 좋다는 유언을 세종에게 남겼고 양녕대군은 그 후에도 끊임없이 사고를 쳐서 신하들로부터 양녕대군을 벌주라는 상소가 끊이지 않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인내심이 많고 형제들을 아꼈던 세종은 계속해서 문제를 일으켰던 양녕을 감싸줬으며 그를 벌하라고 상소를 올리는 신하들에게 화를 내기까지 했죠
그럼에도 양녕은 끝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는데요
자신을 타이르는 세종의 편지에 "계속 사사건건 내 일에 간섭을 한다면 다시는 주상을 보지 않겠습니다"라며 삐딱하게 나오는것은 물론이고
하루는 또다시 사고를 친 그를 세종이 그를 추궁하자 "하늘에 맹세코 내가 저지른 일이 아닙니다"라고 큰소리쳤지만 얼마 후 양녕이 저지른 일임이 드러나며 그가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세종이 이토록 그를 감싸주었음에도 양녕은 세종이 죽은후 수양대군의 편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앞장서서 동생의 손자인 단종을 죽이라는 상소를 올리는 금수만도 못한 모습을 보여줬죠
지금까지 양녕대군과 충녕대군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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