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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공양왕. 우물쭈물 하다가 결국 망하게 된 고려의 마지막 왕

by 사탐과탐 2022.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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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 나약하고 호구 왕으로 알려져있던 공양왕은 망해가는 고려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는데요 결국엔 우물쭈물하다가 고려가 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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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제34대 왕이자 고려 최후의 왕인 공양왕

한 왕조의 마지막을 장식한 왕의 경우 좋은 평가를 받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공양왕은 무능한데다 막장짓까지 했던 우왕이나 아무 실권없이 휘둘리기만 했던 창왕과는 달리 망해가는 고려를 어떻게든 지켜보려고 발버둥쳤던 인물이라 평가받고 있죠

 

과연 이 고려의 마지막 왕은 살아남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으며 그의 마지막 모습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공양왕 왕요는 1345년 정원부원군 왕균과 국대비 왕씨의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공양왕은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는 부유한 왕족으로서 큰 걱정없이 여유로운 삶을 살아왔지만 이성계 일파의 추대를 받아 왕위계승자로 천거되면서 그의 불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죠

 

고려말 홍건적과 왜구등 여러 외세를 물리치면서 점점 세력을 키워온 이성계는 위화도 사건이후 이인임을 비롯한 기존의 권력가들을 제치고 고려에서 제일가는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고려의 왕이었던 우왕은 꼭두각시가 된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환관 80명을 무장시켜서 이성계의 집을 습격했지만 그 당시 이성계는 집을 비운 상태였고 나머지 가족들도 이방원이 모두 대피시킨 후였기 때문에 우왕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머지않아 그는 이 일로 분노한 이성계 일파에 의해 폐위당했죠

 

우왕을 폐위시킨 이성계 일파는 우왕의 아들이었던 8살의 어린 창왕을 다음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하지만 고려의 세력들이 창왕을 중심으로 뭉치려는 낌새를 보이자 또다시 군주를 바꿀 마음을 먹게 되는데요

때문에 사실 우왕이 요승 신돈의 자식이었다는 우창비왕설을 주장하며 그의 아들인 창왕을 폐위시킬 명분을 만들게 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렇게 자신의 혈통자쳬가 부정당한 창왕은 왕이 된지 불과 1년만에 신돈의 손자라는 누명을 쓰면서 폐위당하게 되죠

이때 새로운 국왕후보를 찾던 이성계의 눈에 띈것이 바로 정원부원군 왕균의 아들인 공양왕 왕요였는데요

그렇게 공양왕은 1389년 고려의 34대 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비록 당시 고려의 실권은 이성계일파가 꽉 잡고 있었지만 순순히 허수아비 왕노릇을 할 생각이 없던 공양왕은 이색과 정몽주등의 반 이성계파 인사들에게 관심을 보이며 이성계일파를 견제하고 고려왕조를 지키려했죠

고려의 멸망을 함께한 왕이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공양왕은 나약한 모습만을 보이다가 속절없이 이성계에게 왕자리를 내준것으로 알고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실제로 그는 어떡해서든 이성계에게 대항하려 노력했다고 합니다

 

그러한 모습을 잘 보여준 사건이 바로 전대의 왕이었던 우왕과 창왕에 대한 처리문제였는데요

이성계는 그들을 처형하는데 있어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였지만 공양왕은 그들을 즉시 처형해야 한다며 강력하게 주장했고 결국 공양왕이 즉위한지 1달만에 우왕과 창왕이 모두 처형되었죠

 

이후 1392년에 명나라에 갔다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하기 위해 황주로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중에 말에서 떨어지며 큰 부상을 당하자 정몽주와 공양왕은 이성계가 없는 틈에 대간을 움직여 이성계일파의 핵심 인물인 정도전, 남은, 조준 등과 그들의 측근인 윤소종, 남재, 조박까지도 모두 탄핵한후 유배를 보냈습니다

 

황주에서 치료를 받던 이성계는 이 소식을 듣고선 불편한 몸을 이끌고 즉시 개경으로 향하게 되는데요

당시 공양왕과 협력관계에 있던 정몽주는 드디어 이성계를 제거할 기회가 왔다고 주장했죠

하지만 공양왕은 이성계와 사돈관계였던데다 애초에 자신또한 이성계일파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었기 때문에 만약 이성계를 몰아낸다면 자신이 계속 왕위를 유지할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요

 

게다가 정몽주는 공양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것이 아닌 고려왕조를 지켜내는것에 더 관심이 많은 인물이었을뿐만 아니라 애초에 정몽주 또한 과거 우왕과 창왕을 폐위시키는데 동참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운좋게 이성계를 몰아내봤자 정몽주가 제2의 이성계가 되어 자신을 폐위시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위화도회군 이후 고려의 군대는 이미 이성계일파가 완전히 장악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괜히 이성계를 자극했다가 그가 다른 마음이라도 먹게 되면 자신또한 우왕과 창왕꼴이 날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때문에 그는 결정을 내리지 못한채 망설이기만 했고 그렇게 부상에서 회복한 이성계가 개경으로 복귀하게 되면서 이성계를 공격하려던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죠

 

이후 이성계는 어떻게든 정몽주를 굴복시킨 후 공양왕에게 선위를 받는등의 정당한 절차를 통해 왕이 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 이방원은 아버지와 생각이 달랐죠

정몽주는 절대 이성계가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일에 협력하지 않을것이며 어떠한 말로도 정몽주를 설득할수 없을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래서 이성계의 집을 방문했다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정몽주를 암살하기 위해 조영규를 비롯한 자신의 부하들을 보냈는데요

정몽주가 탄 마차가 선죽교라는 다리를 넘으려고 할때 갑자기 나타난 이방원의 부하들이 활을 쏴대기 시작했고 크게 놀란 정몽주가 말을 타고 달아났지만 조영규와 부하들은 부상당한채 도망치는 정몽주를 쫓아가 철퇴와 몽둥이로 그를 때려죽여버렸죠

 

명망있는 대신이자 반 이성계파로서 공양왕의 든든한 지원 세력이었던 정몽주가 무참히 살해되자 더이상 공양왕을 도와줄만한 세력은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궁지에 몰린 공양왕은 정몽주를 살해한 이성계 일파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힘조차 없는 상황에 처했는데요

그렇게 고려의 마지막 기둥이 무너지면서 공양왕의 왕권또한 완전히 무너져내려버렸죠

 

왕과 신하들이 나랏일을 의논하는 '조회'가 끝나면 공양왕이 아직 자리에 있음에도 신하들이 그보다 먼저 일어나 나가버리는가하면 연회자리에서는 대놓고 공양왕 앞에서 술주정을 하는 신하도 있었다고 합니다

막다른 벼랑에 몰린 공양왕은 자신의 신하인 이성계에게 동맹을 맺자는 제안까지 하며 어떻게든 고려의 명맥만이라도 유지해보려 했지만 이제 이성계에게는 그 제안을 받아들일만한 이유가 없었죠

 

얼마후 이성계일파는 고려의 31대 왕인 공민왕의 4비였던 왕대비 안씨를 협박해서 공양왕을 폐위시키는 교지를 내릴것을 강요했고 그렇게 1392년 왕대비 안씨의 이름으로 공양왕은 폐위됐습니다

이후 백관들이 왕대비 안씨의 옥새를 들고 이성계의 집을 찾았을 때 이성계는 문을 열어주지 않으며 왕위를 사양하는척했고 얼마후 백관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가자 몇 번을 사양한 끝에 마지못해 옥새를 받는척했죠

 

이후 즉위식에서도 최대한 겸손한 모습을 보이며 강제로 왕위를 빼앗았다는 비난을 피하려 했습니다

위화도 회군이후 이성계가 왕위를 찬탈하고자 했다면 진작에 왕이 될수 있었지만 강제로 왕위를 뺐었다는 소리를 듣기 싫었던 그는 공양왕을 왕위에 세우며 그가 자신에게 왕위를 양보하기를 기대했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이성계의 생각과 달리 공양왕은 순순히 왕위를 넘길 생각이 없었고 공양왕의 본심을 알게된 이성계는 그를 강제로 폐위시킨 것이죠

폐위된지 한달뒤 공양왕은 공양군으로 강등되었고 오늘날의 강원도 원주로 유배를 떠나게 됩니다

 

이후 계속해서 멸망한 고려왕실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살아남은 왕씨들이 역모를 일으키려 한다는 의혹까지 제기되면서 공양왕은 폐위된지 2년만에 강원도 삼척에서 목숨을 잃게 되죠

비록 고려왕조 최후의 왕이 되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긴 했지만 공양왕은 그저 무능하기만 한 군주는 아니었으며 순순히 이성계에게 왕위를 갖다바치지도 않았습니다

 

애초에 이성계가 자신을 왕위에 올린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이성계가 원하는대로 왕위를 양보했으면 목숨을 건질수도 있었지만 차마 500년 역사의 고려왕조를 망하게 할수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할수있는 일은 나름 다해본 군주였는데요

공양왕은 어느정도 군주의 자질을 갖고 있었지만 앞의 두 왕인 우왕과 창왕이 너무나도 무능했기 때문에 본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수습을 하기가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실제로 고려사의 공양왕 세가를 보면 신하들이 올린 상소의 대부분이 공양왕 개인의 잘못에 대한것보다는 이전의 왕들이 저질러놓은 실책이 너무나도 크니 공양왕은 이러지 말라는 것을 적은 내용들이었다고 하네요

그는 어떻게 해서든 고려 왕조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써봤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확실하게 치명타를 날리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바람에 다시없을 기회를 날려버렸죠

 

그렇게 기회를 날려버리면서 자신의 나라와 목숨뿐만 아니라 수많은 왕씨들의 목숨까지 잃게되는 결과를 불러오게 됩니다

때문에 '고려사'에서는 이런 공양왕을 두고 사람은 착한데 너무 우유부단했다는 평가를 남겼죠

 

지금까지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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