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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헌종. 그가 정력에 집착했던 이유는?

by 사탐과탐 2022.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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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손꼽히는 미남인 헌종은 유독 정력에 좋은 음식과 약을 즐겨 섭취했습니다
그 이유가 대체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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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때 왕의 초상화를 '어진'이라고 불렀습니다

현재까지 어진이 남아있는 왕은 태조와 세조, 영조, 정조, 철종, 고종, 순종정도라고 하죠

 

그외의 왕들은 초상화가 대부분 사라졌지만 그들의 외모에 대한 설명이 사료에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의 왕중에서는 문종과 연산군, 영조, 정조 그리고 헌종이 미남이었다고 짐작되는데요

 

오늘은 그중에서도 조선시대 최고의 미남이었지만 정력제를 너무 많이 먹은탓에 어린 나이에 죽은 비운의 왕 현종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조선의 24대왕인 헌종은 아버지인 효명세자가 22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할아버지인 순조마저 건강이 악화돼 죽음을 맞으면서 8살의 어린 나이에 국왕이 되었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현재로 따지면 초등학교 1학년인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순조의 정비이자 할머니인 순원왕후 김씨가 왕을 대신해 나라를 다스리는 수렴청정을 하게 되죠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던 시기에는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발생했습니다

 

게다가 관직을 사고판 관리들이 백성들을 착취하면서 백성들의 삶은 파탄나기 직전까지 몰리고 있었지만 순원왕후를 비롯한 조선 조정에서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죠

그때까지는 세도가문들의 별다른 견제를 받지 않았던 헌종은 직접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하던 20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왕실과 혼인을 맺게되면서 왕실과 같은 가문에 속해있다는 이유로 온갖 횡포를 부리던 척신들을 견제하기 시작했는데요

 

흔히 사람들에게 나약하고 존재감 없는 왕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 헌종은 어린 나이임에도 왕권 강화를 위해 신 안동 김씨로 대표되는 세도 가문을 견제하면서 이들을 컨트롤하려는 노력을 했던 왕입니다

야사에 따르면 헌종의 외삼촌이었던 조병구가 권세를 휘두르자 "외삼촌의 목에는 칼이 안들어가는가?"라며 호통을 쳤다는 일화도 있죠

 

헌종은 신 안동 김씨의 실세인 김흥근이 왕인 자신이 아니라 순원왕후의 비위를 맞추며 정치를 하자 과감하게 그를 탄핵한후 귀양보내기도 했습니다

또한 신 안동 김씨의 수장인 김좌근 등을 압박해서 유배를 보내는 등 계속해서 신 안동 김씨와 대립하는 모습을 보여줬죠

그리고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 대구 서씨인 서희순을 이조판서 겸 총위대장으로 내세우기도 했고

 

신 안동 김씨에게 밉보였던 인물들인 김정희와 조병헌을 유배에서 풀어줬으며 안동김씨들에게 요주의 인물로 찍혀있던 박규수를 조정으로 불러들여 그를 중용할 의지를 보였습니다

반대로 영의정 정원용은 신 안동 김씨에게 아부를 했다는 이유로 파직당했으며 수도인 한양을 방어하는 오군영의 훈련대장을 외척들이 아닌 사람들로 채워넣고 병조판서의 자리를 오로지 자신이 원하는 인물로 임명하기도 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렇게 군권을 장악한후에는 정조의 장용영을 본받아 자신의 친위대인 총위영까지 구성하는 등 아주 활발한 왕권 강화 정책을 펼쳤습니다

아마도 당시 청나라가 아편전쟁으로 인해 나락에 빠지는 것을 보면서 국방력 강화와 척신 척결이 조선을 강력하게 만들기 위한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짐작되죠

 

뿐만 아니라 수령들이 뇌물을 받아먹는 문제를 대놓고 언급하며 법 개정을 주도한 적도 있었는데요

수령들이 받아먹은 뇌물들중 많은 양이 세도 가문들에게로 가고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법개정은 세도가문들을 견제하기 위한 의도였던 것이 확실하지만 비변사가 훼방을 놓으면서 아쉽게도 법 개정은 무산되었습니다

 

그외에도 헌종은 암행어사를 활발하게 전국으로 파견했고 신 안동 김씨의 조종을 받던 삼사를 모조리 파직하기도 했는데요

재위 말에는 동국사략과 동국문헌비고 등을 편찬하고 각 도의 제방과 저수지를 정비하는 등 많은 업적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2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사망하면서 기울어져가는 조선을 끝내 바로잡지는 못했죠

 

조선 최고의 미남왕이었던 헌종은 잘생긴 외모덕분에 수많은 궁중 여인들의 선망과 사랑의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2012년 해를 품은 달이라는 드라마에서 김수현 배우가 바로 이 헌종 역을 맡았는데 실제 헌종도 김수현씨 못지않은 미남이었을 것으로 짐작되죠

 

헌종실록 1권을 보면 '외모가 준수하고 명랑하며 큰 목소리가 마치 금석에서 나오는 것 같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얼굴이 잘생긴 것은 물론이고 목소리마저 매우 좋았다는 뜻인데요

헌종실록 외에도 헌종의 외모에 대해 극찬하는 기록들이 상당히 많다고 합니다

다만 17살때 천연두를 앓은 기록이 있어서 그이후에 피부가 조금 안좋아졌을지도 모른다는 짐작이 있죠

 

한때 헌종이 워낙 미남이라 젊은 궁인들이 승은을 입기 위해 그를 유혹했다는 설이 떠돌았던 적도 있었는데 이 설은 조선왕조실록에 헌종이 즉위할 때 신하들이 "전하의 나이가 워낙 어리시니 사특한 무리들이 전하를 유혹하려 하는것을 경계하시옵소서" 라고 진언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것을 두고 미남이었던 현종을 젊은 궁인들이 승은을 입기 위해 유혹했다는 식으로 왜곡돼서 퍼진 것이라고 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실제 실록의 기록을 보면 '헌종이 미남이라 궁인들이 그를 유혹했다'라는 내용이 아니라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궁인들이 온갖 유흥거리로 유혹해서 나랏일을 돌보는데 방해가 될수있으니 경계했다' 라는 식으로 되어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헌종이 워낙 여색을 많이 밝혔기 때문에 지나치게 성관계를 했다고 하는 카더라도 있는데 그가 궁인들을 가까이한 것은 단순히 여자를 밝혀서가 아니라 안동 김씨를 비롯한 세도가 출신의 자손을 더는 낳지 않고 어떻게든 그들과 관련이 없는 후궁을 통해 대를 잇겠다는 의지였다는 해석이 더 많습니다

 

헌종하면 빼놓을수 없는 인물이 바로 경빈 김씨인데요

야사에 따르면 헌종의 첫 왕비인 효현왕후가 16세에 죽자 새로운 왕비를 뽑기 위한 간택을 시작했습니다

이때 경빈 김씨도 참여했는데 헌종은 김씨를 좋아했으나 왕실 어른들은 홍씨를 더 마음에 들어했죠

 

하지만 당시 국혼은 당사자보다 왕실 어른들의 뜻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었기에 결국 홍씨가 두번째 왕비(효정왕후)로 정해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일화는 야사가 확실한 것이 당시의 승정원일기를 보면 간택을 위한 처녀 명단에 김씨의 이름이 아예 없었기 때문에 헌종이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이야기는 야사에 불과할 뿐이죠

 

실제로는 효정왕후가 새 왕비가 된 지 3년 후인 1847년에 대왕대비였던 순원왕후의 명으로 후궁 간택을 하게 되는데 이 때 김씨가 헌종의 후궁으로 최종 낙점되고 경빈으로 책봉되었습니다

헌종은 경빈 김씨를 총애해서 그녀를 위해 창덕궁에 낙선재와 석복헌을 지었다고 하는데요

 

이는 정조가 수빈 박씨와의 처소를 서로 가까이에 두면서 순조를 낳게된 일화를 따라한 것으로 경빈 김씨가 자신의 후계자를 낳기를 바라는 뜻에서 한일이었죠

이때까지만 해도 헌종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김씨는 궁내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헌종이 23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면서 약 2년간의 짧은 신혼을 보내던 김씨는 궁궐을 떠나야만 했죠

이후 김씨는 별궁인 순화궁에서 살게 되었고 왕실에서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예우를 받았다고 합니다

 

현종은 사망하기 얼마전부터 피를 토하며 소화 불량 증세를 자주 보였고 설사가 심해지며 얼굴에 갈수록 심한 부종 증상이 나타나 의원들이 지어준 약을 먹고 치료를 받으면서 상태가 좋아졌다 나빠졌다를 매번 반복하다가 사망했다고 전해지는데요

 

현대 의학적 관점에서는 헌종이 평소 정력에 좋다는 음식을 많이 먹었다는 일화를 봤을때 급성 간염이나 간경변의 합병증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현종은 평소 녹용과 당귀가 들어간 귀용군자탕등의 정력제를 너무 많이 복용했다고 하죠

기록에 따르면 사슴의 녹용만 달인 한약을 천첩이나 먹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평소 먹었던 약들이 모두 정력과 관련된 약이었으며 심지어 술을 마실때도 정력에 좋은 술만 골라 마셨다고 하죠

이런 식습관 때문에 간에 무리가 많이 갔던 것으로 짐작되는데요

20대 초반의 젊은 왕이 이토록 정력에 집착했던 이유는 헌종이 지나치게 여색을 밝혀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정조 사후 그의 직계후손이 귀해졌던 탓으로 짐작됩니다

 

정조의 장남인 문효세자가 어린 나이에 사망하면서 아들이라고는 순조 한명만 남았는데 순조의 하나뿐인 아들 효명세자마저 헌종 하나만을 남긴채 22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헌종이 정조의 마지막 남자 직계후손으로 남은 상황이었죠

 

이에 어떻게든 후손을 남기려고 많은 노력을 했지만 결국 후계자를 남기지 못한 상태에서 요절하면서 정조의 직계후손은 대가 끊기게 되었다고 하네요

지금까지 조선 최고의 미남왕 헌종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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