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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숙종.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숙종의 실제 모습

by 사탐과탐 2022.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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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폭군 아닌 폭군인 숙종의 실제 모습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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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19대 왕인 숙종은 여태 나왔던 많은 드라마에서 마르고 여린 미소년으로 나오거나 기침이나 자주 하는 병약한 왕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죠

게다가 강렬한 이미지의 희빈 장씨와 비교되면서 우유부단하고 여자에게 약한 못난이 왕으로 나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숙종은 불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마음에 들지 않는 신하들은 모조리 숙청하는 등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다 하고 살 만큼 절대왕권을 가진 강력한 왕이었는데요

역사학자들은 2016년 대박이라는 드라마에서 최민수가 보여준 카리스마 넘치는 숙종의 모습이 실록에 묘사된 모습과 가장 근접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과연 실제 숙종의 모습은 여태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 얼마나 달랐던 것인지 지금부터 함께 보시죠

숙종은 1661년 조선의 18대 왕인 현종과 명성왕후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674년에는 13살의 어린 나이에 조선의 임금으로 즉위했는데 그의 어머니인 명성왕후 김씨는 아직 숙종이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그가 직접 나랏일을 돌보는 것을 반대했지만 평소 속이 깊었던 그는 수렴청정을 받지 않고 그 어린 나이에 누구의 간섭도 없이 직접 나라를 통치했죠

 

이는 조선왕조에서 매우 특이한 경우에 해당했지만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숙종의 아버지인 현종이 할아버지인 효종의 외아들이었고 숙종 자신도 정실부인에게서 태어난 유일한 아들이었으므로 그가 조선 왕조 역사상 최상급의 정통성을 가진 몇 안 되는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형제가 없었기에 연산군 때의 중종처럼 그를 폐위시킨 후 대신 내세울 마땅한 대군이 없었고 유일한 경계대상이었던 인평대군의 아들들은 숙종의 재위 초기에 삼복의 옥 사건으로 제거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그를 위협할 수 있는 세력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는 상황이었는데요

 

덕분에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음에도 수렴청정 없이 직접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게 된 것이죠

숙종은 세자 시절부터 몸이 허약했지만 성미는 매우 불같아서 궁녀들이 머릴 빗겨주거나 옷을 갈아입히는 것조차 몸서리칠 정도로 싫어했다고 합니다

 

결국 그의 머리를 빗겨주는 것은 어머니가 직접 했다고 하는데 그나마도 못 참고 투정을 부렸기 때문에 빗 같은 물건으로 머리를 때려가면서 겨우 빗겨줬다고 하죠

그래서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 김씨도 아들에 대해 평하기를 "세자는 내 배로 낳았지만, 그 성질이 아침에 다르고 점심에 다르고 저녁에 다르니, 나로서는 감당할 수가 없다" 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런 불같은 성격 덕분에 숙종은 평생에 걸쳐서 아랫배가 아프고 대소변이 잘 나오지 않는 '산증'을 앓았는데 이것은 전형적인 화병의 증상이라고 하네요

여태 나왔던 드라마 등의 영향으로 장희빈만 악녀이고 착한 숙종은 장희빈에게 홀려 이리저리 끌려다닌 것으로 아시는 분들도 많지만 기록을 보면 사실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숙종 14년인 1688년에 장희빈이 아들(훗날의 경종)을 출산하자 장희빈의 어머니가 가마를 타고 입궁한 적이 있습니다

이때 사헌부의 말단 직책인 소유들이 그녀의 가마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녀가 탄 가마는 옥교라는 지붕이 달린 여성용 가마로 당시 법에 의하면 정 3품 이상 관리(당상관)의 여자 가족이나 탈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그런 가마를 타는 것은 명백한 불법이었죠

 

그래서 소유들은 원칙대로 장희빈 어머니가 가마를 타고 들어오는 것을 제지한 후 가마를 부숴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전해들은 숙종은 불같이 화를 내며 그 소유들을 전부 때려죽이라고 명했죠

 

원칙을 지킨 관료들을 죽일 수는 없다며 신하들이 겨우 말려서 사형이 중단되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의금부에 끌려가 심문당하던 소유 중 2명은 고문 중에 맞아 죽게 됩니다

이 기록만 봐도 숙종의 평소 모습이 어땠는지 엿볼 수 있죠

숙종은 재위 기간 동안 모두 네 명의 왕비를 들였는데 이 중 두 번째 왕비가 인현왕후 민씨, 세 번째가 희빈 장씨였는데요

 

재위 기간 동안 나랏일을 멀리하고 희빈 장씨를 비롯한 많은 여인들을 탐했던 국왕이라는 사람들의 인식과는 달리 실제 숙종은 후궁의 수가 다른 조선의 임금에 비해서 적은 편이었으며 자식도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숙종이 여자문제가 많은 임금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이유는 그가 다른 국왕과는 달리 정치적 사건을 해결하는데 자신의 부인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이죠

 

숙종은 장희빈을 이용해서 강적이었던 송시열과 서인 세력을 견제했으며 서인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송시열이 죽고 난 이후에는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를 이용하면서 장희빈을 외면했습니다

두 번째 왕비인 인현왕후를 온갖 트집을 잡아 폐서인 시키고 장희빈을 중전으로 삼아주더니 장희빈의 이용 가치가 사라지자 다시 인현왕후를 왕비로 삼았는데요

 

다시 왕비로 복위된 인현왕후가 폐위됐을 때 얻은 병이 악화되며 결국 복위된 지 7년 만에 끝내 사망하게 되자 숙종은 그 죽음을 희빈 장씨의 저주 탓으로 돌리며 그녀에게 사약을 내려 죽였죠

숙종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반성은커녕 오로지 일의 원인을 남 탓으로 돌리는 패턴으로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자 권모술수의 달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바른 말을 하는 신하들이라 할지라도 가차 없이 죽였고 자신의 아내들마저 거리낌 없이 몰락시키면서 그들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의 인생도 엉망으로 만드는 짓을 서슴없이 저질렀죠

먼저 인현왕후는 5년이라는 오랜 폐비 생활 때문에 죽음을 맞았고 장희빈은 고문을 당한 궁녀들의 강요된 자백만으로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누명을 씌워 세자(경종)의 어머니였던 그녀를 가차 없이 죽여버렸습니다

 

숙종은 장희빈이 몰래 신당을 차려 인현왕후를 시해하는 저주 굿을 했다고 발표했죠

하지만 신당을 차린 것은 애초에 세자가 두창이라는 병에 걸렸기 때문에 그 병의 쾌유를 빌기 위함이었고 숙종의 주장대로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해 신당을 차렸다는 증거는 딱히 없었습니다

 

그나마 증거라고 제시된 것도 고문으로 인한 억지 자백이었기 때문에 정말로 그것을 믿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으며 그녀가 신당을 차려 굿을 한 것이 정말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세자의 쾌유를 위한 것이었는지에 대한 의혹은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숙종실록을 살펴봐도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 민씨를 저주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고 하죠

인조반정 이후 현종 때까지는 붕당 간에 적절한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졌지만 숙종이 즉위한 이후부터는 한 당파에 의해 모든 권력이 독점되는 상황이 계속됐는데요

 

즉 임금이 남인을 선택하면 서인이 죽어나갔고 서인을 선택하면 남인이 죽었다고 합니다

숙종은 재위 내내 이렇게 집권세력을 통째로 갈아치우는 환국 정치를 펼치며 자신의 왕권을 강화시켰고 신하들에게 반강제로 왕을 향한 충성을 맹목적으로 강요하면서 많은 신하들이 그를 두려워하며 따르게 되죠

숙종은 애초에 신하들을 대등한 존재로 보지 않았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숙종 17년인 1691년에 우의정 김덕원이 숙종에게 "제가 궁궐 생활을 오래 한 내관에게 전해 듣기로 인조대왕과 효종대왕은 늘 검소하고 절약하는 모습을 보이셨다고 하는데 님도 좀 검소하게 생활을 해보시죠"라는 말을 했다가 "네가 감히 선조의 일을 그것도 천한 내시의 말을 들먹이면서 나를 능멸해?"라는 숙종의 대답과 함께 호된 대가를 치러야만 했죠

 

오래전에 죽은 그 내시는 김덕원에게 그 말을 전해준 대가로 일가친척들과 함께 내시 명단에서 삭제되었고 김덕원 본인은 그날로 파직을 당했다고 합니다

영의정을 비롯한 주변 신하들이 싹싹 빌면서 용서를 구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고 하죠

 

심지어 숙종은 환국을 이용해 인조와 효종, 현종까지 무려 3명의 왕을 모셨던 송시열마저 사약을 내려 죽였는데요

애초에 숙종은 세자 시절부터 송시열을 싫어했는데 1689년 숙종이 100일도 채 안 된 아들인 경종을 원자로 책봉하려는 것을 송시열이 열렬히 반대하며 자신과 대립각을 세우자 크게 분노하며 그를 제주도로 유배 보내버렸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로 인해 송시열을 따르던 유생들과 신하들이 상소를 올리자 숙종은 그 상소를 올린 사람들마저 죄다 유배를 보내는 불같은 성질을 보여줬죠

그럼에도 계속되는 상소에 열불이 난 숙종은 송시열을 국문하기 위해 그를 유배지에서 한양으로 직접 불러들였습니다

 

송시열이 유배지에서 올라오는 길에 그를 추종하는 노론 세력들이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는데 한양에 가까워질 무렵에는 그 수가 무려 500명이 넘었다고 하죠

하지만 숙종은 신경도 쓰지 않고 사약을 든 선전관을 보내서 결국 송시열을 사사시켜버립니다

그런데 숙종이 절대왕권을 가지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며 살았던 건 맞지만 나랏일을 내버려 둔 채 흥청망청 놀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고 여러 면에서 나름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요

 

먼저 경제적으로는 평안도와 함경도,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대동법을 시행해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려 노력했고 본격적으로 화폐를 제조하기 시작했는데 흔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상평통보가 바로 숙종 즉위 초년부터 주조되기 시작해 전국으로 유통되었습니다

 

때문에 숙종 시대 전반에 걸쳐 상품화폐 경제의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국가의 재정 역시 탄탄해졌죠

숙종은 특히 군주로서의 책임감이 강해서 백성들의 삶에도 많은 관심을 쏟았습니다

대동법 시행지역의 확대를 비롯해 백성들이 억울하게 땅을 뺏기는 것을 막으려는 을해정식 제도를 시도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죠

 

그 외에도 백두산에 청과 국경선을 다시 긋고 정계비를 세우면서 북방의 영역을 확고히 했으며 정종과 단종의 신원을 회복시키는 등 조선왕조의 과거사를 정리하는데도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외에도 탕춘대성과 문수산성 등 여러 성을 쌓으면서 수도방어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죠

이때 만들어진 수도 방어 체계는 고종 때까지 유지되었다고 하네요

 

이후 46년간 조선을 다스리던 숙종은 1720년 6월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죠

지금까지 조선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권을 가졌던 숙종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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