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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조선시대 최고의 주당, 술꾼들에 대한 이야기.

by 사탐과탐 2022.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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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 취하지 않으면 신하들을 집에 안보낸 정조. 예종에게 넌 이렇게 놀지말라고 한 세조. 술에는 진심이었던 조선시대 주당들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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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연예인이나 유명 운동선수들을 봐도 그렇고 우리 주변에서도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아주 흔하게 볼수 있죠

우리에게 익숙한 역사속 유명인들 또한 애주가로 소문난 사람이 많았다고 하는데요

오늘은 주당으로 소문난 역사속 인물들에 대해서 먼저 소개를 해드리고 옛날 영웅호걸들이 술을 말통으로 마실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도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조선의 제7대 국왕인 세조는 신하들과 술자리를 많이 가지기로 유명해서 현대에 와서는 그에게 회식왕이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였는데 세조의 신하들 또한 왕 못지않은 주정뱅이들이었다고 하죠

조선왕조실록에서 술자리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973건이 나오는데 이 중 절반 가까이 되는 467건이 세조 시절이라고 합니다

 

세조는 술자리에서 흥이 오르면 직접 악기를 연주하거나 신하들을 일으켜세워 같이 춤을 추기도 했으며 신하들에게 퀴즈를 내서 맞히지 못하면 사발에다가 벌주를 만들어서 마시게 하는 술게임까지 즐겼다고 하죠

심지어 술자리에서 맘에 드는 신하를 승진시키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아무래도 술자리다 보니 각종 사건사고가 생기기도 했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술자리에서 왕이 앉는 자리를 어탑이라고 불렀는데 하루는 이예라는 신하가 술에 취해서 거기 올라가는 일도 있었으며 정창손은 세조가 술김에 세자에게 왕의 자리를 넘기겠다는 말을 꺼내자 좋은 생각이라며 맞장구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정인지는 술에 취해서 세조에게 '너'라고 부르거나 사사건건 세조의 말꼬리를 잡기도 했죠

심지어 신숙주는 술자리에서 세조가 장난으로 신숙주의 팔을 잡아비튼후 "경도 따라해보라"라고 하자 세조가 너무 아파서 비명을 지를 정도로 세조의 팔을 세게 비틀어버렸다고 하는데요

 

도를 넘은 신숙주의 행동에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세자(훗날의 예종)가 한참동안 신숙주를 노려보자 머쓱해진 세조는 세자에게 "나는 이러고 놀지만 너는 이렇게 놀지마라"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죠

왕이 되기 전이었던 수양대군 시절에는 종친과 대신들을 초청해서 술자리를 연적이 있었는데 참가했던 손님들이 모두 술에 취해 정신을 못차리는 상황에서도 수양대군과 그의 큰아버지인 양녕대군만 멀쩡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그래서 수양대군이 양녕대군에게 "역시 저의 상대는 백부님뿐입니다"라며 인정하는 말을 남겼다고 하죠

세종대왕 때의 문신이었던 윤회는 워낙 술을 좋아하는 걸로 유명했는데 그의 건강이 나빠질 것을 걱정한 세종이 어명을 내려서 은으로 만든 작은 술잔 하나를 주고는 "앞으로는 이 술잔으로 딱 3잔만 마셔라"라고 한 일화가 야사에 전해집니다

 

그런데 골때리는 사실은 윤회가 세종의 말대로 3잔만 마시긴 했는데 그 술잔을 망치로 두들겨 펴서 아예 세숫대야 크기로 만들어 마셨다는 것이죠

이때의 일화가 전설로 남아서 후대에도 전해진 것인지 성종 시절의 재상이었던 손순효도 왕이 직접 은으로 만든 주발을 하사하며 하루에 한잔만 마시라고 하자 그 주발을 대장간에 맡겨서 아예 세숫대야 사이즈로 늘려서 한잔을 마셨다고 합니다

 

선조때의 문신인 정철 또한 선조가 그의 건강을 걱정해서 은잔을 하사하며 하루에 한잔만 마시라는 어명을 내리자 정철은 그 은잔을 망치로 두들겨펴서 사발로 만들어 마셨다고 하죠

조선의 22대 왕인 정조는 어릴적에 받은 스트레스 때문인지 술과 담배를 병적으로 즐겼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술의 경우 자주는 아니고 어쩌다 한 번씩 마셨다고 하는데 그 어쩌다 한번 술을 마시게 되는 날이면 만취해서 아예 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많이 마셨다고 하는데요

또한 술버릇은 다른 사람 참 피곤하게 만드는 술버릇 중 하나인 다른 사람에게 어거지로 술을 권하기였다고 합니다

 

단순한 직장 선배가 이런 주사를 부려도 골치가 아픈데 신분제 사회의 꼭대기에 있는 왕이 이러니 신하들로서는 참으로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겠죠

수원화성 팔달문 근처의 팔달문 시장(남문 시장) 입구 쪽에 보면 정조가 술상 앞에 앉아 있는 동상이 남아있습니다

그 동상에 불취무귀라는 글귀가 새겨져있는데 해석해보면 '취하지 않으면 집에 못 간다'는 뜻이죠

 

다만 이것은 정말로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쓴 것은 아니고 백성들이 술에 취해 흥취를 즐길수 있을 정도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싶다는 정조의 의지가 반영된 글귀라고 하네요

정조는 선비들도 강해져야 한다는 명목으로 정약용 같은 문약한 선비에게는 하루종일 손이 부러져라 활쏘기를 시켰으며 술을 옥으로 만든 필통에 부어 마시라고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 시절 필통은 붓 몇 자루가 들어가는 현대 기준으로는 바가지만한 크기였는데 정조가 여기다 직접 삼중소주라는 술을 부어 정약용에게 내렸다고 하죠

이때 정약용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훗날 그날을 회상하며 "오늘이 내 제삿날이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식들에게도 "되도록 술을 마시지 말고 특히 '원샷'을 피하라"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죠

 

어떤 날은 한 선비가 술에 취한 채 궁궐 담벼락 밑에서 밤에 잠을 자다가 야간 통행금지에 걸려서 잡혀온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정조는 "요즘 사람들은 술이 약해서 제대로 마실 줄을 모르는데 이 자는 술을 잘 마셔서 그 멋을 아니 참으로 가상하다 상으로 쌀 한 포대를 주고 풀어줘라"라는 명을 내렸다고 하죠

 

다만 야사에 따르면 조선은 술에 대해 매우 관대한 나라였다고 합니다

높으신 분들부터 천민들까지 한 번 마시면 쓰러질 때까지 마시는 게 기본이라 생각할 정도였다고 하는데요

일단 한번 작정하고 마시기 시작하면 안주도 거의 안 먹으면서 빠른 속도로 술을 마셨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면 술상에 그대로 엎어지거나 술을 가지러 가다가 술상 근처에서 쓰러져 잠드는 일이 흔했는데 이렇게 아침까지 바닥에서 자다 깨서 관료들은 나랏일을 보러 가고 농부들은 농사를 지으러 갔다고 하죠

그 누구도 관리들이 술에 취해 아침까지 널브러져 자는것을 보고 뭐라고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실제로 조선을 유람하고 간 외국인들의 기록을 보면 '조선은 술 때문에 망할 나라'라는 내용이 많다고 하죠

 

이는 '조선인들은 하도 밥을 많이 먹어서 농사를 지어봐야 소용없다'라는 내용과 함께 가장 흔하게 발견되는 외국인들의 조선 탐방 후기라고 합니다

정조가 유독 심했다고 하기에는 애초에 조선의 술 문화 자체가 장난이 아니었던 것이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경우에도 술을 매우 좋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난중일기를 보면 자신을 찾아온 사람에게 술을 먹여 보냈다거나 밤새 같이 술을 마셨다는 기록이 정말로 많이 나옵니다

 

부하나 동료들이 이순신 장군과 같이 술을 마시다 뻗어서 인사불성이 됐다는 기록도 많은 것을 보면 평소 엄청난 주당이었던 것으로 짐작이 되죠

이순신 장군이 여가시간을 보내는 수단으로 가장 많이 이용한 것이 바로 술을 마시는 것이었다고 하는데 심지어 몸이 좋지 않았던 날에는 몸이 너무 차서 그런것 같다며 소주를 마셔 몸을 따뜻하게 하려고 했다가 오히려 배탈이 심해져서 꼬박 사흘을 앓았다는 기록도 남아있다고 하네요

 

그리고 난중일기를 보면 조선시대판 인생게임이라 할 수 있는 승경도 놀이를 즐겼다는 기록도 제법 자주 나타나는데 지금으로 치면 4성 장군이 휘하 참모들과 보드게임을 즐겼다는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마냥 무섭고 엄하기만 한 상관은 아니었다는 얘기겠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비록 전쟁 중이라 할지라도 추석같은 명절이 되면 여러 장수들과 모여 술과 반찬을 같이 나눠먹기도 했으며 항복한 왜적출신 부하들이 축제를 하게 해달라고 조르면 마지못해 허락을 해주고는 광대로 분장한 항왜들의 놀음을 구경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 역시 이순신 장군이 평소에는 엄격해도 풀어줄 땐 풀어주는 융통성을 갖춘 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일화죠

과거시대를 다룬 문학작품이나 영화, 드라마를 보면 말술이라는 표현이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한 말의 술은 오늘날로 치면 약 2리터정도 되는 양인데 당나라의 시인 이백은 술 한말을 마시고도 백편의 시를 쓴다는 기록이 있으며 수호지에 나오는 무송이라는 인물은 18사발이나 되는 술을 마셨다고 하는데 지금으로 따지면 3리터나 되는 양이죠

 

무송은 그렇게나 많은 술을 마시고 호랑이를 때려잡았다고 하는데요

제대로 서있기도 힘들만큼 많은 술을 마시고도 그런일을 해낼수 있었던데는 다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바로 그들이 마셨던 술과 요즘 술의 도수가 다르다는 것이죠

 

옛날 사람들은 쌀이나 기장,좁쌀등의 곡물을 발효시켜 만든 양조주를 주로 마셨는데 당시에는 여과 기술이 그다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술에 쌀 찌꺼기같은 이물질이 많이 남아있어 쉽게 변질이 되었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당시의 사람들은 대부분 술을 끓여서 마셨는데 이렇게 살균된 술은 오늘날의 감주와 비슷한 알코올 1도정도의 술이었다고 합니다

 

그외에 주점이나 양조장에서 이물질을 많이 걸러낸 청주라는 술도 기껏해야 알코올 도수가 5도정도 되는 맥주정도의 술이었죠

따라서 이백이 마신 한말의 술이라고 해봐야 맥주4병 수준에 불과했던 것인데요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고량주를 2리터씩 마신것이 아니라 이슬톡톡을 잔뜩 마시고는 온갖 허세를 다 부렸던 것이죠

지금까지 역사속 주당들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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