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왕족이지만 불행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 많은데요
아마 가장 불쌍한 공주는 오늘 이야기할 경혜공주가 아닐까 합니다
경혜공주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조선왕조의 역대 왕들 중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인물로 꼽히는 것이 바로 단종이죠
그런데 혹시 단종의 단하나뿐인 누나 또한 동생 못지않은 불운한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세종의 손녀이자 문종의 딸로 태어났지만 숙부인 세조 때문에 비극적인 삶을 살게된 경혜공주의 이야기입니다
경혜공주는 1436년 조선의 5대 왕인 문종과 현덕왕후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경혜공주가 태어난 것은 아버지 문종이 왕으로 즉위하기 전 아직 세자시절일때였는데 그녀의 어머니 권씨는 경혜공주 덕분에 세자빈으로 봉해졌다고 하죠
원래 문종의 세자빈이었던 순빈 봉씨가 폐위되자 문종의 부인중 경혜공주의 어머니인 양원 권씨와 승휘 홍씨가 세자빈 후보에 올랐는데 세종이 "세자가 승휘 홍씨를 더 좋아하지만 양원 권씨는 세자의 딸을 낳았으니 나중에 아들도 낳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권씨를 세자빈으로 책봉하라"라고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세자빈 권씨는 1441년 경혜공주의 남동생인 단종을 낳은 후 산후병으로 사망하게 되죠
원래 경혜공주 위로 언니가 한명 있긴 했지만 태어난 지 1년도 못 된 1433년에 죽었고 이후 문종이 더이상 재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혜공주와 단종 남매는 세자의 단둘뿐인 자식으로서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 문종과 할아버지 세종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자랐다고 합니다
문종은 조선 시대 대표적인 '딸바보'중 하나라고 하는데요
경혜공주는 문종의 첫 자식이자 유일한 딸이었던 데다 그녀의 어머니인 권씨도 일찍 죽은 상황이라 더욱 애틋할 수밖에 없었죠
때문에 세종32년 경혜공주가 혼인할때 문종이 신혼집으로 한양에서 가장 비싼 땅인 현재 서울 북촌 지역에 대궐 같은 큰 집을 지어줬다고 합니다
실록에는 당시 경혜공주의 신혼집을 짓기 위해 민가 30여 채가 철거됐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죠
여기서 민가라는 단어만 보고 그저그런 초가집 30여 채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공주의 집이 들어설 것이다 보니 당연히 궁 근처의 부자 동네에 지어졌고 실제로 한성부 북부 양덕방지역의 민가들이 철거되었다고 실록에 나와있는데요
양덕방은 오늘날 종로구 계동 및 가회동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당시 한성에서도 가장 부유한 동네였습니다
지금으로 보면 평창동이나 성북동의 호화 저택 수십 채가 대통령 딸의 분가를 위해 철거되었다는 의미죠
이때 신하들이 항의하자 문종은 "내가 조사해 보니 5채만 허물었다고 하던데? 그리고 어차피 거기 살던 사람들 다 고위 관료들이라서 쉽게 다른 집을 구할수 있는데 뭔 상관이냐?"라고 반박하며 딸바보다운 모습을 보여줬다고 합니다
하지만 문종이 왕위에 오른지 2년만에 세상을 떠나게 되고 동생 단종이 즉위하게 되면서부터 비극이 시작됐죠
이때 경혜공주의 나이가 18살, 단종은 12살이었습니다
단종은 궁을 떠나서 경혜공주의 집에서 머무는 것을 좋아했다고 하는데 의지할 가족이 1명도 없는 궁궐보다는 가까운 사이인 친누나의 집이 더욱 편하게 느껴진 모양이죠
보통 국왕이 궁궐을 떠나서 사저에 장기간 지내면 경호 등 여러가지 문제점이 발생하기 때문에 신하들도 되도록 빨리 궁으로 환궁할 것을 권유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신하들도 어린 나이에 부모를 모두 잃은 단종이 안돼 보였는지 누나 경혜공주의 집에서 지내는 것에 대해 크게 뭐라고 하지 않았죠
문제는 수양대군이 이런 점을 노리고 계유정난을 계획할 당시 경혜공주의 집을 목표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계유정난이 일어났을 때도 단종은 누나인 경혜공주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고 하죠
그렇게 계유정난이 성공하면서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게 되고 단종은 상왕으로 물러나게 됩니다
이후 왕이 된 세조는 단종의 편에 섰던 혜빈 양씨와 금성대군 등을 귀양보냈는데 이 과정에서 경혜공주의 남편인 정종도 유배를 가게 되죠
동생은 억울하게 왕권을 빼앗기고 남편마저 귀양을 가게되자 경혜공주는 사람을 시켜 자신이 아파서 중병에 들었음을 세조에게 알렸는데요
말이 중병이지 사실 그녀가 전하려던 진짜 의미는 '나는 이렇게는 못 살겠으니 당장 조치를 취해주지 않으면 목숨을 끊겠다' 라고 세조에게 항의를 한 것이었습니다
가뜩이나 쿠데타를 일으켜 민심이 안 좋았던 상황에서 조카인 경혜공주마저 진짜 자살이라도 한다면 세조로서는 사람들에게 온갖 비난을 당할 것이 뻔했죠
때문에 그녀의 말을 전해듣고 깜짝 놀란 세조는 그날 바로 경혜공주에게 약과 어의를 보내주었고 정종의 유배지를 강원도에서 경기도로 옮겨주었습니다
경혜공주가 병석에 누웠다는 소식을 들은 단종도 큰 충격에 빠져 세조에게 사람을 보내서 정종만이라도 석방해달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했는데요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물수 있듯이 혹시라도 남매가 나란히 목숨이라도 끊게되면 자신이 굉장히 곤란해진다는 것을 알았던 세조는 다음날 정종을 다시 한양으로 불러들입니다
그런데 정종이 한양으로 돌아오자마자 경혜공주가 병석에서 일어났는데 이것이 또 문제가 되었죠
사실 정종은 공식적으로 죄를 사면 받은 것이 아니라 아내인 공주가 아프다고 해서 임시로 한양에 온것이었는데 공주의 병이 치료되었으니 다시 유배지로 돌아가라는 상소가 올라온 것인데요
상황이 그렇게 되자 세조는 경혜공주에게 이왕 이리된거 남편인 정종의 유배지로 따라가서 둘이 함께 사는것이 어떻겠냐며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죠
그렇게 당시 21살이던 경혜공주는 유배된 남편을 따라서 김포지역의 통진까지 가게 됩니다
그나마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공주의 신분이었고 남편만 유배 중이었을뿐 자신은 죄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인들을 부리는 등 최소한의 품위 유지는 할수있었죠
하지만 세조가 즉위한 지 약1년 후에 단종을 복위시키려던 사육신 사건이 터지게 되는데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성삼문이 상왕 단종도 거사 계획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자백을 해버렸는데요
가뜩이나 단종을 다시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을까 경계하던 세조와 측근들은 이 사건을 빌미로 아예 그 싹을 잘라버리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죠
통진에 있던 정종의 유배지는 머나먼 전라도 광주로 바뀌었고 가지고 있던 재산마저 모두 몰수당했습니다
세조는 경혜공주에 대한 마지막 배려로 원한다면 남편인 정종을 따라 광주로 가도 좋다고 허락했죠
이렇게 해서 경혜공주는 남편을 따라 광주로 내려가게 됩니다
그런데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갔던 단종이 다음 해에 죽음을 맞게 되자 정종은 공공연히 세조에게 반감을 품은 발언을 하고 다니다가 반역을 꾸몄다는 이유로 능지처참 당해 죽게 되는데요
이렇게 경혜공주는 26살의 나이에 부모와 동생 그리고 남편까지 모두 잃게 되는데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남편이 사형당할 당시 그녀가 임신중이었다는 것입니다
실록에서는 경혜공주가 정종이 죽은 후부터 무척 가난하게 지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하죠
세조와 왕비인 정희왕후도 억울하게 죽은 단종과 노비가 된 경혜공주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동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세상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그 해에 바로 경혜공주를 한양으로 불러들였죠
그녀의 형편이 너무 좋지않다보니 보다못한 세조가 그녀에게서 빼앗은 노비를 돌려주고 집까지 지어줬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희왕후가 공주의 아들 정미수를 궁궐로 데려와 길렀고 경혜공주는 딸을 낳은 이후 출가해서 비구니가 되었다고 하네요
경혜공주의 입장에서 보면 친동생 단종이 왕권을 뺏긴 것만으로도 억울하기 짝이 없는데 남편마저 역모죄로 능지처참당했으니 삶에 아무런 미련이 없었겠죠
그럼에도 그녀에게는 3살, 1살된 어린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로서 어린 자식들을 두고 차마 목숨을 끊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을 보러 궁궐에 가자니 세조와 마주치는게 죽기보다 싫었던 경혜공주로서는 비구니가 되는 선택을 할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나마 원수 소굴이나 다름없던 궁궐에 자식들을 맡길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현덕왕후의 시종이자 자신의 유모였던 백어리니라는 인물이 정희왕후와 함께 "자식들을 위해 왕을 용서해야한다"라며 그녀를 설득했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지금까지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경혜공주의 이야기였습니다
'한국역사 탐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숙종.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숙종의 실제 모습 (0) | 2022.05.11 |
---|---|
조선시대 최고의 주당, 술꾼들에 대한 이야기. (0) | 2022.04.29 |
오구라 컬렉션. 일제강점기 엄청난 양의 우리나라 문화재와 유물을 일본으로 빼돌린 오구라 다케노스케 (0) | 2022.04.27 |
조광조. 중종의 신임을 받아 파격 승진에 거침없는 개혁 정치를 하지만 결국 버림받고 비참한 최후를 맞은 인물 (0) | 2022.04.14 |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무력 최강자는 누구였을까? (0) | 2022.03.31 |
사야가 김충선.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환멸을 느끼고 조선에 투항해 수많은 공을 세운 인물 (0) | 2022.03.27 |
광복 후 한반도에 남아있던 일본인들의 삶. (0) | 2022.03.23 |
고려 현종. 고려시대 최고의 성군으로 불리는 왕 (0) | 2022.03.21 |